[기획특집] 누구나 알지만 잘 알지는 못했던 대만의 게임씬
▶ 해피툭은 어떻게 대만 최대 게임 퍼블리셔가 됐나?
차이나조이 기간, 해피툭의 타이베이 증시 상장 뉴스(7월 25일)를 접했다. 한국인이 만든 대만 게임 퍼블리셔. 궁금했다. 아는 회사지만,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따지고 보면 대만 게임시장에 대한 지식도 10년 전에 멈춰 있었다. 궁금증을 풀고 지식도 업데이트하러 타이베이로 갔다.
2002 한일 월드컵 다음 해였다. ‘한국 최고의 게임회사’에 들어가고 싶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엔씨소프트에 지원해 입사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양민영. 2024년 현재 대만 최대 퍼블리셔가 된 해피툭의 설립자다. 그가 엔씨에서 맡았던 역할은 게임과 관련 없는 일(사내 시스템 관리)이었다.
그시기 엔씨는 날아다녔다. <리니지>는 2000년 7월 <天堂>(티엔탕)이라는 이름으로 대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만에 불을 질렀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2001년 5월, 엔씨는 E3 기간 LA에서 <울티마 온라인>을 개발한 리차드 개리엇 형제를 영입하고 엔씨 오스틴을 설립했다.
세 달 뒤에는 도쿄에서 소프트뱅크와 합작법인(엔씨 재팬)을 만들었다. 이듬해는 북미에 집중했다. 3월 크립틱 스튜디오와 <시티오브히어로> 퍼블리싱 계약을 맺고, 연말에는 블리자드 개발자 출신들이 만든 아레나넷을 인수했다.
엔씨소프트의 리차드 개리엇 영입은 MBC 뉴스데스크에 나올 정도로 국내에서 화제였다. 해외 게임계에서는 더 큰 화제였다.
"도대체 엔씨가 어떤 회사야?"
2003년에는 다시 아시아. 1월 중국 포털 시나와 상하이에 합작법인(엔씨시나)를 설립하기로 발표했고, 8월에는 대만에서 감마니아와 합작법인(엔씨 타이완)을 설립했다. 이듬해에는 방콕에서 태국 최대 통신업체 트루와 합작법인(엔씨트루)을 만들었다.
“회사 규모가 정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타이밍이다 보니까 저도 상대적으로 많은 기회를 얻었던 것 같아요.”
엔씨는 2004년 10월 베이징에 R&D센터를 설립했다. 양민영은 이곳으로 발령이 났다. 4년 동안 베이징과 서울(본사)와 시애틀(아레나넷) 사이의 삼각 협업과 관련된 기술 지원을 담당했다. 본사와 달리 지사는 조직이 크지 않아 업무량이 옆으로 많이 늘어났다. 조직 관리 등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베이징 여자와 결혼했다.
그가 복귀할 무렵, 엔씨의 게임은 이미 여러 나라에 나가 있었다. 합작법인이 있는 대만과 태국은 물론 인도네시아(메가수스), 러시아(이노바), 필리핀(AMDG) 등에 <리니지 2> 퍼블리싱 계약을 맺었다. 이런 상황은 4년 넘게 해외 경험을 쌓고 돌아온 양민영에게 다른 업무를 맡겼다. 해외 퍼블리싱의 기술적 지원을 해주는 ‘해외 기술 PM’이 됐다. 해외 퍼블리셔의 문의와 요구에 대응하는 기술적 카운터파트너였다.
“기술 PM으로서 자부심이 있었어요. (<리니지2>, <아이온> 등이 나올) 당시 엔씨 게임은 기술적으로 상당한 우위에 있었거든요. 역할도 무척 중요했죠. 자카르타, 모스크바, 방콕, 마닐라 등 여러 도시를 돌며 게임의 기술적 지원 활동을 했습니다. 각국의 인프라 상황과 유저 성향에 따른 현지화의 필요성에서도 느낄 수 있었죠.”
엔씨 타이완이 설립된 지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보통 해외 지사는 3~4년을 기준으로 인력을 순환한다. 계속 타이베이에만 머문 엔씨 주재원들의 아우성이 있었다. 인력을 교체해줘야 할 시기였다. 기술을 총괄할 정도의 시니어 급 매니저가 필요했다. 양민영에게 기회가 왔다.
“회사에서도 여러 고민이 있었는데, 해외 경험도 있고, 중국에서의 경험도 있고 해서 또 운이 좋게 대만 파견 기회를 얻었어요. 해외 서비스를 지원한 지 2년 만에 지사의 기술 영역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2000년대는 IT 산업이 계속 성장하던 시기였다. 상당수 직장인들이 창업의 꿈을 가슴 속에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양민영도 그중 하나였다. 대만 지사에서 2년 정도 생활하며 현지 게임 시장을 알게 됐고, 긍정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던 때 기회가 왔다. 함께 일하던 동료 둘이 2021년 하반기 창업을 했다.
“한국인 동료들이 작은 사이즈로 회사를 만들고, 게임 퍼블리싱 사업을 시작했어요. 1~2년 함께 일을 해본 친구들이어서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작은 규모로 투자하고 좀 지켜보기로 했어요.”
그게 해피툭이었다. ‘즐거움을 툭 하고 내놓는다’는 뜻. 열정이나 경험이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 해피툭의 첫 게임 <젬파이터>는 실패했다. 목표와 아주 큰 차이 나는 대실패였다. 계속 운영하려면 투자를 끌어와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창업과 첫 게임 퍼블리싱을 이끌던 이들은 회사를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양민영의 생각은 달랐다. 한 번 더 해보자고 했다. 설득에 실패했다. 양민영은 공동창업자의 지분을 모두 인수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제가 기술 쪽 파트에서 일을 오랫동안 많이 해왔기 때문에 사업적인 영역, 특히 자금을 수혈하는 부분에서는 경험이나 인맥도 충분치 않았어요. 결국 동료를 잡는 것도, 자금을 확보하는 것도 실패하고 혼자서 꾸역꾸역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어요.”
양민영은 베이징에 있던 집을 팔았다. 상하이의 게임 퍼블리셔 나인유에서 소싱 등 해외 사업을 총괄하는 임원을 1년 겸임했다. 회사 설립 초기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투자나 사업에 경험과 인맥이 단기간 쉽게 쌓이지는 않는다. 양민영은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버렸다. 대신 잘 하는 것에 더 집중하려고 했다. 일단 좋은 게임을 찾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게임 하나에 집중했다. 그가 선택한 게임은 <십이지천 2>였다. 가장 좋은 게임은 아니었지만 당시 해피툭에게는 최고의 게임이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대만에서 더 이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 게임이었어요. (게임플라이어가 서비스를 중단했다. 편집자 주)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죠. 그리고 제가 엔씨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니, 이런 PVP 경쟁 중심의 콘텐츠를 조금 더 눈여겨 봤는데 상대적으로 아주 간단한 방식의 성장과, 그 성장한 걸 가지고 끊임없이 PVP 하면서 성취감을 얻는 구조 자체가 단순하면서도 충분히 잘 돌아가더라고요. 운영에 부담이 없었어요. 제가 기술 쪽 출신이어서 기술 부분도 많이 봤는데, 안정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어요. 의외로 깔끔했어요. 아시다시피 오픈했다가 서버 제대로 안 돌아가서 망하는 게임들이 허다하잖아요.”
당시 해피툭의 총직원 수는 3명이었다. 콘텐츠에 대한 이해가 많이 필요하거나 여러 가지 서비스를 챙겨야 하는 게임은 무리였다. <십이지천 2>는 규모가 작은 회사도 도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게임이었다.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PVP가 핵심 콘텐츠인 것도 좋았다. 다양한 부분에서 외주와 외부 도움을 받았지만, 운영과 서비스를 전담하는 핵심 멤버만 가지고 출시했다.
조직 규모가 작으니 적은 매출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서 <열혈강호>를 서비스할 체력을 키웠다.
<열혈강호>는 <십이지천 2>보다 훨씬 큰 게임이었다. 매출이 적은 게임도 아니고, 중국에서도 꾸준히 인기가 있는 지명도 있는 게임이어서 계약 성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소프트월드, 감마니아와 함께 대만 3대 퍼블리셔로 꼽히던 화이가 서비스하고 있었다. 일단 계약부터 문제였다. 화이와 퍼블리싱 계약 기간이 끝날 예정인 엠게임을 설득해 계약하는 데 반 년이 걸렸다.
“엠게임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기존 퍼블리셔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대만에서 3~4번째 게임사가 못하면 1~2번째 하는 회사를 찾아야지, 왜 아래 있는 회사와 계약하느냐는 이야기가 있었었다고 들었어요. 경영진이 저희를 선택하신 건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열혈강호>를 시작하면서 해피툭은 대중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유저와 소통하려는 해피툭의 행보가 기존 퍼블리셔와 차별점을 보였다.
“저희는 회사 규모가 작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유저들에게 정말 친화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지금도 꾸준히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퍼블리셔는 어쨌든 개발사에 많이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개발사를 잘 설득해야 하는데, 개발사가 안 하면 퍼블리셔가 할 수 있는 게 매우 제한되죠. 저희는 그런 것에 위축되지 않고, 현지에서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오프라인 행사를 한다거나, 그게 어려우면 온라인으로 유저들과 소통을 많이 하려고 했어요. 개발사도 저희 판단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매출이 2배 이상 올랐다. 개발사가 지원을 더 하게 된 이유인지, 아니면 개발사의 지원이 늘어난 덕분인지는 모른다. 다른 대만 퍼블리셔와 달리 대표와 임원 등 핵심 인력이 한국인이 터라 한국 개발사와 여러 레벨에서 소통이 더 잘 이뤄졌을 수도 있다.
대만에서 <테라>는 OMG가 2012년 11월 정액 서비스를 시작했다. 출시에 맞춰 90일, 6개월, 1년 정액 이용권을 판매했다. 그런데 그해 12월 한국에서 <테라>는 부분유료화로 전면 전환됐다. OMG도 곧 부분유료화 서버를 오픈했다. 이미 결제한 정액 이용권 구매 유저들에게 보상을 하고 부분유료화 서버로 옮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OMG는 별도 보상 없이 기존 정액제 서버를 그대로 유지했다. 업데이트가 없는 서버였다. 유저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유저들과 함께 블루홀도 OMG의 대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블루홀은 대안을 찾았다. 해피툭이었다.
“저희가 서비스하는 것을 눈여겨 보시면서 <테라> 서비스를 이관하는 계약을 했어요. <테라>가 S급 게임이었기 때문에 대만 유저들에게도 큰 화제가 됐었죠. 가장 많은 매출을 거두는 게임 중 하나입니다.”
<오디션>은 해피툭에게 꼭 필요한 타이틀이었다. 유저층을 확실히 늘릴 수 있는 게임이었다. 해피툭은 회사 초반부터 <오디션>을 가져오고 싶었다. 대만 퍼블리셔 인스리아 사이에 로열티 미지급 등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스리아의 <오디션> 계약은 2014년 8월 끝났지만, 당시 글로벌 퍼블리셔였던 와이디온라인과 개발사 티쓰리엔터테인먼트 사이에 법적 분쟁이 오가며 서비스 권한 이관이 늦춰지고 있었다. 글로벌 퍼블리싱 권한을 갖게 된 한빛소프트는 인스리아에게 시간을 주고 있었다.
“대만 <오디션> 서비스는 망가지고 있었어요. 원래는 굉장히 센세이셔널한 게임이었는데, 퍼블리셔가 방치했어요. 유저들도 많이 떠나가버린 상태였죠. 개발사와 퍼블리셔의 관계가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저희는 유저 DB를 이관 받을 수도 없었어요. 게임에 돈을 쓴 유저들은 엄청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아까운 게임이었다. 해피툭은 다시 게임을 일으키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게임 출시 후 약 한 달 간 게임 내 상품을 무료로 파는 데 한빛소프트와 합의했다. 반감이 있던 유저들이 다시 돌아왔다. 1달 동안 재방문율이 80%를 유지했다. 페이스북에서 소셜 네트워킹을 하던 유저들도 다시 <오디션>으로 돌아왔다.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아직도 유저들에게는 매우 좋은 영향이 남아 있어서 저희가 어떤 상품을 내놔도 신뢰해주시는 것 같아요. 덕분인지 <오디션> 매출은 계속 우상향 하고 있습니다.”
대만 게임 생태계는 2000년대 후반부터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웹게임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은 더 큰 바람인 모바일게임이 덮었다. 2012년 이후 대만에서도 <캔디크러쉬사가>와 <모두의마블>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무렵 PC방은 <리그오브레전드>가 덮쳤다. 그시기 한국처럼 기성 PC 온라인게임 유저는 줄어들고, 신규 출시작은 대부분 실패했다. 소프트월드, 감마니아, 화이 등 PC 온라인게임 퍼블리셔들은 모두 압박을 받았다.
소프트월드가 퍼블리싱 계약한 <클로저스> 출시를 계속 미룬 것도 이런 이유 탓이었다. 나딕게임즈는 소프트월드와 계약을 해지하고, 해피툭과 퍼블리싱 계약을 맺었다.
“대만 유저 성향상 서브컬처 게임에 대한 기대들도 되게 많은데 이게 무한 딜레이 되는 게 좀 아쉬웠죠. 대만이 일본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지역이다 본니까 기대가 컸어요. 사실 1~2년 전이었으면 더 좋은 성적도 가져갈 수 있는 타이틀이었죠. <로스트아크>가 나오기 전까지 출시 초창기 가장 큰 매출을 거둔 타이틀이었습니다.”
<라테일>(2016)과 <거상>(2021) 역시 기존 퍼블리셔가 종료했거나 재계약을 안 한 타이틀이다. 두 타이틀은 <오디션>과 함께 계속 매출이 우상향을 하고 있다.
“<라테일>은 한국에서 <메이플스토리> 때문에 많이 묻혀 있지만 저희가 일해 본 개발사 중에 케미가 가장 잘 맞는 회사였어요. 일하면서 양사가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신뢰와 존중이 좀 특별할 정도로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출시 이후 꾸준히 매출이 우상향 하고 있어요. <거상>은 회사 초창기부터 눈여겨 봤던 타이틀인데,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에 2번 정도 엎어졌었죠. 실무자는 저희와 하고 싶어했는데, 경영진 단위에서 밀렸었어요. 그 실무자가 임원이 됐고, 저희를 잊지 않고 계약하게 됐죠. 저희가 원래 잘 하는 운영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다른 게임들보다 드라마틱하게 좋은 성과를 내고 있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해피툭은 2024년 8월 현재 12일 현재 21개의 게임을 서비스하는 대만 최대의 게임 퍼블리셔가 됐다. 특별한 모멘텀에서 점프업하기보다 단단하게 라인업을 하나하나 성공시키며 성장했다. 그 사이 양민영 대표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운이 좋았다.
“제가 운이 정말 좋다고 하는 게 필요한 때에 사람들이 적시적시마다 조금씩 들어와 주셨던 것 같아요.”
최정필 부사장, 강지훈 이사, 권은효 이사가 필요한 타이밍에 들어왔다. 반면 인력 구하는 게 급할 때 썼던 ‘지인 찬스’는 양날의 검이었다. 지인에게 검증된 사람이 들어오면 상대적으로 빠르게 업무에 적응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인이 깊이 있게 잘 모르고 추천한 이는 기대치와 업무 능력치의 차이는 물론, 그 후에 대응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회사가 커져나가면서 인재들이 많이 들어왔다. 대만에는 튼튼한 중소기업이 많다. 덕분에 대만인들 자체가 중소기업에 대한 거부감이 많지 않다. <열혈강호>를 서비스할 때 소프트월드 출신도 많이 들어왔다. 마침 그 시기가 대만 게임 회사 1, 2, 3위가가 인력 감축과 사업 축소를 하던 과정이어서 게임 타이틀은 물론, 적시적소에 좋은 인력을 구할 수 있었다.
해피툭 양민영 대표
“좋은 분들이 와서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해주셨다 보니까, 저도 그분들에게 많이 기댄 것 같아요. 그분들이 더 좋은 기회나 조건을 만나 이직하면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직원이 50명 이하였을 때 1명이 나간다고 하면 며칠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제일 무서운 게 그거였어요. “대표님 혹시 시간 좀 있으세요?” 규모가 작아 직원 간 유대도 끈끈했는데, 타격이 너무 심했죠.”
2016~2017년 사이 해피툭의 인력도 50명이 넘었고, 업무도 체계화됐다. 직원의 이탈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는 구조가 됐다.
양민영 대표는 올해 5월 출시한 <로스트아크>의 성과에 대해 말을 아낀다. 역대 최고의 성과를 거두고 있고, 리텐션이 매우 높다는 수준 정도다. 해피툭은 7월 26일 타이베이 증시에 상장했다. 확장을 위한 현금을 확보했다
해피툭은 2월 레드랩게임즈의 <롬>의 대만, 일본, 동남아 마케팅과 운영 대행을 맡았다. 과거와 다른 행보를 시작했다. 3월에는 원스토어와 앱마켓 서비스 협력 계약을 맺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공격적인 행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