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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불량일기

식사 시간에 길을 잃다

임상훈(시몬) 2011-03-31 19:16:36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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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시간에 길을 잃다

사랑했던 여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새벽에도 뜬금없이 불러 맥주 마실 수 있던 친구가 청첩장 보내왔을 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상실감의 깊이와 낭패감의 충격은.

수수한 식당, '우리마을'이 30일 가게를 닫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TIG가 대치동으로 이사 온 후, 단연 좋았던 것은 '우리마을'이었습니다.

청계산에서 유기농으로 직접 기르신 채소와 곡물을 재료로,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은 음식.

 

 

사람의 몸은 그가 물려받은 것에, 먹는 것, 경험하는 것의 총합이라는 사실.

'우리마을'을 다니면서 절실히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 음식을 먹은 이후, 매년 걸리던 감기가 갑자기 뚝 끊겼으니까요.

 

첫날의 황당한 기억. 3명이 메뉴 2개를 시키자, 하나로 통일 안 하려면 나가라고 호통치셨던.

'서비스 정신이 저 따윈가' 하면서도 그냥 먹었죠. 그리고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버렸고.

 

지난 2주일 스무 끼 정도를 이 곳에서 먹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제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음식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며.

 

 

6,000원의 청국장, 토장국, 순두부탕, 7000원의 두부전골, 11,000원의 서리태 콩국수.

잘 익은 배추김치와 아삭아삭한 무김치, 상큼한 겉절이과 참 실한 두부, 잡채와 떡볶이, 계란찜, 그리고 다른 식당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각종 제철 나물들.

 

너무 늦었던 것 같습니다.

12년 동안 대치동 도성초등학교 사거리를 지켰던 이 보석 같은 곳을 처음 알게 된 것이.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몸을 맡겼던 식당이 있었다는 게. 몸이 그 곳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게.

 

 

12년 전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며, 손수 기른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신,

최일재 사장님과 정환순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영원히 식당문이 닫힌 어젯밤 10시 반, 식당 앞에서 몇 분을 서성거렸습니다.

한 달간 그 동안 못 가본 여행 맘껏 하시고, 편찮으신 몸 잘 치료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저는 한 달 뒤부터 매주 등산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청계산으로.

약속하신 것처럼, 공기 좋은 산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겠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계속 길을 잃고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 오늘 점심 시간 그랬던 것처럼요.

 

sim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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