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 달 남짓 지났군요.
인간, 아니 동물의 본능이겠죠.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언가 다른 것으로라도 풀려는 게. 제 본능은 그날 이후 어떻게 움직였는지 돌아봤습니다.
1. 책
홍콩에서 돌아오자 마자 책을 향한 욕구가 도졌습니다. 때마침, 연말 맞이 인터넷서점들의 이벤트. 마구마구 질렀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책상 옆, 의자 뒤에 수북히 쌓인 책들. 100권이 좀 넘더군요. 대충 카테고리별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잡다한 가운데, 눈에 띄는 심리학과 진화론 서적들.
심리학 책들은 '인간의 행동은 비이성적'이라는 행동심리학 계열과, 이런 인간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넛지 계열이 대부분이더군요. 진화론 책들은 '순수함보다 다양하게 섞이는 게 건강하다'는 열대예찬 류였고요.
4권을 읽었고, 3권을 읽다 말았으며, 3권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현무암처럼 뻥뻥 뚫린 마음의 구멍. 다른 것으로라도 메꾸려는 심산이었을 텐데, 책을 읽으며 제 머릿속 수많은 구멍들에 놀라고 있습니다. 할 일도 많은데, 말그대로 '구멍송송'에 '첩첩책중'입니다.
2. 청소
10평 남짓 작은 원룸. 크게 어질러 있는 것도 아닌데, 용솟는 정리욕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선 정리. TV와 Xbox, Wii, 2대의 Divx 플레이어 등을 뒤엉켜 오가던 수많은 케이블들. 평소에는 별로 신경이 안 쓰였는데, 유독 눈에 밟히더군요. 하나하나 묶고, 이리저리 또 묶어, 가지런히 뒤쪽으로 돌렸습니다.
그 다음은 침대 밑. 2년 이상 먼지가 켜켜이 달라 붙어있는 터라 두려웠습니다. 정전기 청소포와 천연물걸게 청소포 사기를 잘 했습니다. 꽤 효과적이더군요. 달라붙은 먼지가 대단했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터라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죠.
실제 놀란 건, 침대 패드와 이불에서 나온 먼지였죠. 침구청소기를 사서 한번 돌려봤더니, 수북히 빨려드는 회색 티끌들. 그 동안 깔고 덮고 잤던 먼지가 참 많았더군요.
2년 전에 거금을 주고 샀던 스팀진공청소기는 정리했습니다. 대신 간단히 청소할 수 있는 청소포와 스틱으로 시스템을 바꿨죠. 스팀진공청소기가 더 확실하게 청소는 하겠지만, 게으른 저에게는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자꾸 미뤄지는 대청소보다는, 조금씩 쉽게 청소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 술
저는 몰트 위스키를 좋아합니다. 특히 아일라 쪽 편애가 심하죠.
그런데 최근 마음이 뒤숭숭했던 탓인지 좀 달달한 칵테일이 댕겼습니다. 처음엔 집에 있는 그레이구스에 토닉워터와 라임액을 몇 방울 떨어뜨린 보드카&토닉을 마셨죠. 좋았습니다. 그런데, 더 단 게 먹고 싶어졌습니다.
이마트에 가서 깔루아와 베일리스를 샀습니다. '매일 소화가 잘 되는 우유'도 샀고요. 이것저것 만들어 마셔보다가, 요즘엔 주로 화이트 러시안을 홀짝이고 있죠. 댕기는 날 두세 잔 정도는 괜찮더군요.
여전히 피트향 강한 몰트가 1순위지만, 이건 극단의 취향인 거고. 술이란 게 함께 마시며 흉도 보고, 정도 나누고, 꿈도 꾸는 물건이라면, 달콤해 함께 즐길 수 있는 게 괜찮은 듯합니다. 그래서 요즘 부쩍 리큐어(합성주)에 관심이 갑니다. 캄파리와 미도리, 샤르트뢰즈과 베네딕틴 등을 집 앞의 몰트샵에서 공수할 계획이죠.
결과적으로 그 날의 스트레스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후유증 덕분에 올해는 친한 친구들과, 덜 지저분한 방에서, 제가 제조한 술을 마시며, 최근 읽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을 것 같으니까요. sim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