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 ID/PW 찾기

시몬의 불량일기

80년 5월 광주의 풍경-3

임상훈(시몬) 2013-05-10 22:13:14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webzine/community/nboard/36/?n=43425 주소복사

80년 5월 광주의 풍경-3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죠. 각목이든 삽이든 연탄집게든 뭐든 들고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다들 나오세요. 얼른 나오세요. 우리 고장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남자는 의리입니다. 내 친구와 이웃이 개처럼 맞고 있는데,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합니까. 우리 친구들 다 같이 나가기로 했습니다. 같이 갑시다.

참담했습니다. 친구들이 개처럼 맞고,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데... 도망쳐 온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비참했습니다. 도저히 이렇게 숨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오니 마음은 편하네요. 

할아버지도 나가서 싸우라고 합디다. 왜경 때보다, 빨갱이들 내려왔을 때보다 더 악독한 공수부대는 우리나라 군대가 아니라고요. 할아버지도 가시겠다는데, 손자가 앉아있는 건 말이 안 되죠.

공수부대가 우리 부모 형제들을 학살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트럭을 몰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실상을 이야기해줬습니다. 사람들이 트럭에 다 탔습니다. 

칭찬을 받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저 악독한 놈들과 싸우는 것은 당연한데, 이렇게 인정받으니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사회에 무언가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안 나가면 비겁한 놈으로 찍힐 거예요. 공수부대가 정말 무서운데, 친구들에게 비겁한 놈으로 찍히는 것은 더 끔찍하거든요.

이제 나와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친구가 사람들이 엄청 많이 나왔다고 하대요. 10만 명도 넘게 모였으니 우리를 어떻게 못 할 거예요.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이 맞아서 죽어 나가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우리 반상회에서 의로운 일들 하는 젊은이들 주먹밥 만들어서 갖다 주기로 했어요.

시내에서 장사도 못 하겠고. 앞치마로 돌이라도 날라줘야죠. 우리 애들이 이렇게 계속 피 철철 흘리면서 처맞으면 안 되니까요.


 

당신이 20일 오후 시내 중심가에 서 있는 건 이런 이유들 중 하나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두렵습니다.

아침에 발견된 처참하게 찢겨진 시체 한 구. 공수부대의 화염방사기에 타 죽은 시민의 소식...


당신의 두려움을 녹인 것은 사람들의 체온이었습니다.

오후 들어 당신 주변은 사람들로 빽빽해졌으니까요.

당신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최루탄을 피하고, 눈물을 흘리고, 얼싸안고 있습니다.

 

황금동의 술집 아가씨들과 대인동 사창가 여자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하얀 한복 차림의 농민들이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출현하자, 절로 박수를 쳤습니다.

 

소형트럭에서는 카랑카랑한 여학생의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습니다.

"게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끝까지 싸워 우리 힘으로 광주를 지킵시다."

 

시위대의 맨 앞에는 각목을 든 청년들이 서 있습니다.

당신은 자전거와 리어카로 자갈을 앞으로 실어 날라주고 있습니다.

뒤쪽에서는 여자들이 최루탄에 견디라고 물수건과, 치약, 물을 나눠주고 있고요.


학생 한 명이 한 달 전 중정(중앙정보부) 부장이 된 전두환과 신군부의 음모에 대해 알려줬습니다.

며칠 전 김대중을 잡아갔다는 이야기도 처음 들었습니다.


운동권 노래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잘 못 따라했지만, 여러 번 하다 보니 부를 만합니다.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자고 합니다. 운동권 가요보다 애국가가 더 좋습니다.


아리랑을 부를 때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주변이 모두 울음바다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먼저 외칩니다. 사람들이 따라 합니다.


“우리를 다 죽여라!”

“우리 다 같이 죽읍시다!”


공수부대가 몰려와 난타질을 했지만,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은 결사적이었습니다.

오후 내내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스크럼을 짜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며 울고 있습니다.

방금 날아왔던 최루탄 가루 때문일 겁니다.

개처럼 맞고 대검에 찔리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생각나서일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과 싸우고 있는 당신의 처지가 서러워서일 겁니다.

 

함께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고마워서이기도 할 겁니다.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루 종일 싸웠더니, 힘도 좀 빠집니다. 

그 때 저 쪽에서 수많은 차량의 불빛이 밀려 들어옵니다.

당신은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공수부대 증원군이 온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외칩니다. “드디어 민주 기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대형 트럭과 버스들을 앞세우고 수백 대의 택시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차들은 전조등을 켜고, 빵빵빵 경적을 울리며 서서히 밀려 들어 왔습니다.


“만세!” 소리가 시내를 가득 채웠습니다.

당신은 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맞은 편 공수부대 쪽이 갑자기 분주해졌습니다.

길가의 공중전화 박스, 대형 화분 등을 부숴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당신 쪽에서 바리케이드를 쌓았지만, 이제 바뀌었습니다.


1980년 5월 20일 밤, 도청 앞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simon


최신목록 1 | 2 | 3 | 4 | 5 | 6 | 7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