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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불량일기

80년 5월 광주의 풍경-4

임상훈(시몬) 2013-05-11 22:02:28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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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의 풍경-4

당신은 신문사 사회부 기자입니다.

밤새 당신은 전남도청 옥상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도청을 등지고 시위대와 대치 중입니다.

좌우 도로에서도 수만 명의 시민들이 조여오는 느낌이 듭니다.


며칠 동안 거칠 것 없던 계엄군의 기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차량시위대와 수십만 명의 시위 규모에 놀라, 겁을 먹고 긴장한 모습입니다.

연일 시위진압에 동원돼 기진맥진한 것 같기도 합니다.


반면 시위대의 기세는 장엄한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군중들의 아리랑 가락을 들으니, 묘한 전율이 느껴집니다.

당신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나옵니다.  


아리랑 가락이 당신의 심란한 처지를 자극한 모양입니다.


며칠 전 당신은 상상도 못했던 너무나 엄청난 광경을 봤습니다.

콩을 땅바닥에 뿌려 사방으로 튀기는 것 같은 모양새였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그렇게 사방으로 흩어져 사람을 공격했습니다.

 

대검을 휘두르는 폭행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젊은 여성을 향한 행위는 정말 끔찍했습니다. 

거의  나체 상태로 만들고, 특정 부위만 집중적으로 가격했습니다.


만행, 폭거, 무차별 공격 같은 표현은 너무 밋밋했습니다.

백주겁탈, 성도착적 무력진압 같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결국 당신이 서울로 송고한 기사의 첫 마디는 이랬습니다.

 

“인간사냥이 시작됐다.”


당신도 잘 압니다. 그 기사가 나갈 수 없다는 것을.

12월 12일 이후 보안사(사령관 전두환) 군인들이 모든 매체에 상주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매체도 18일 이후 광주의 참상을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취재기자에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제(20일) 저녁 9시쯤 MBC 방송국 화재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어제 오후 당신 취재차량 옆구리에도 돌이 날아왔습니다.


당신은 상황을 몰라주는 서운함보다, 소식을 전할 수 없는 미안함에 참담합니다.

세상이 모르니, 사태가 더욱 아찔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어제 밤 광주역의 발포와, 자정 무렵 조선대 정문 수류탄 투척.

정보과 형사들이 전해준 소식은 당신을 더욱 참혹스럽게 합니다.

 

새벽 2시 18분 무렵에는 시외전화도 두절됐습니다.

광주는 외부와 끊겼습니다. 본사에 상황을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언젠가를 위해 기록을 남기는 일 뿐입니다.

 

 

[취재수첩: 5월 21일 광주 전남도청 앞]

 

밤새 시민들은 애국가와 아리랑, 우리의 소원, 진짜 사나이 등을 부름.

 

계엄군도 1~2시간씩 교대로 쪽잠을 자며 시위대와 대치 중.

 


오전 6시 30분, 광주역 방면에서 태극기로 덮힌 손수레 두 개 도착함. 수천 명 따라옴.

새벽에 광주역에서 발견된 시체 두 구라고 함. 많은 시민들 놀라고 분노하는 분위기.

시민들 수레를 시위대 맨 앞에 세움. "전두환을 처단하라"라는 함성 들림. 연좌농성 시작.

 

 

오전 9시 무렵, 아시아자동차 공장 등에서 도시형 장갑차, 대형버스 50여대 도착.

대형 버스들이 시민들을 태우고 도착. 그 뒤로 오토바이와 자전거 행렬 따라옴.

 

오전 10시 10분 전, 현재 이 일대 인원 10만~20만 명으로 추산.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 계속 옴.

남녀노소 광주 시민들이 다 이 곳에 모인 것 같음. 광주역 등에서 계엄군 철수하며 이쪽으로 오는 듯.

 

 

몇몇 시민 30미터 앞에서 대치 중인 공수부대 지휘관쪽으로 다가가 외침.

 

“동족으로서 이렇게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느냐!”

“공수부대는 당장 광주를 떠나라!”


어젯밤 이후 공손한 말투로 바뀐 대대장 답변.

 

“우리는 일선 대대장이라 부대의 철수를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원한다면 장형태 전남지사와 면담을 주선하겠습니다.”

 

오전 10시, 시민 대표 3명 도청으로 들어옴.

광주사태 이후 최초의 시위대와 정부기관의 협상.

 

시민 대표, 도지사에게 5개의 요구사항을 전달.

 

1) 유형사태에 대한 도지사 및 당국의 공개사과

2) 연행된 학생, 시민의 전원석방과 입원 중인 부상자의 소재와 생사 확인

3) 21일 정오까지 광주시 일원에서 공수부대 철수

4) 전남/북 계엄분소장과의 협상 주선

5) 이런 문제들에 대해 도지사가 직접 시민들 앞에 나와서 설명할 것


도지사, “요구사항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

 

오전 10시 10분, 분수대 뒤쪽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실탄이 지급되고 있음.

오전 10시 15분, 실탄을 받은 군인들이 전방으로 배치.


시위대, 도지사가 도청 앞 마이크 앞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

도지사, 나가지 않음. 계엄사령관 등에게 연락하고 있지만 잘 안 되는 듯함.

 

오전 10시 50분, 도지사 경찰 헬기 타고 금남로 상공에 올라가 방송.

“공수부대 병력을 철수시킬 테니 광주시민들은 질서를 지켜달라.”


시민들, 도지사 안 나오자 불만 터뜨림.

큰 움직임 없음. 공수부대 철수시키겠다는 말에 기대 거는 듯.

정오시까지 시위대 큰 움직임 없음. 계속 노래 부름.

 

계엄군, 장갑차 앞에 세우고 그 뒤에 20대 횡렬로 포진.

헬기, 이착륙하며 도청 주요 서류 실어나름.

 

 

정오 지나고 나서, 시위대 쪽이 다시 웅성거리고 움직이기 시작.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 거리 30미터에서 10미터로 줄어듦.


오후 1시 10분 전, 시위대 장갑차 한 대, 계엄군 저지선 쪽으로 툭 튀어나와 오른쪽으로 빠져나감.

이 장갑차의 출현에 저지선 순식간에 무너짐. 공수부대원들 도청 쪽으로 도주하며  뒤엉킴.

뒤쪽에 있던 부대원 한 명이 넘어짐. 계엄군 장갑차가 퇴각하면서 그 위를 덮침. 사망함...


저지선이 무너지자 시위대 트럭과 버스들 도청 앞으로 전진을 시작.

오후 12시 58분, 버스 한 대 계엄군 쪽으로 접근.

일부 병력 사격. 운전사 즉사. 버스 도청 옆에 쳐박힘.

 

오후 1시 정각 도청 쪽에서 애국가 방송과 총소리 터져나옴.

 

계엄군 엎드려쏴 사격 시작. 시민들 향해 일제 사격.

도로 중심 장갑차에서 캘리버 50 기관총 불 뿜음. 

주변 높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 시위대 선두 조준사격.


아비규환.

오후 1시 10분, 사격중지 명령이 메가폰에서 들려옴.

 

 

금남로 피바다됨...

 

시민들 급히 후퇴. 금남로 순식간에 텅 빔. 시체의 핏자국과 부상자들 앓는 소리만.

일부 시민 부상자를 구하러 뛰어나옴. 저격병들 조준사격에 쓰러짐. 적막감.


오후 1시 30분 무렵 장갑차 한대 텅 빈 금남로를 가로 지르며 계엄군 쪽으로 달려옴.

 

상의를 벗고, 이마에 흰 띠를 두른 청년이 차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절규. “광주 만세.”

모든 시선이 그 쪽을 향함. 총소리와 함께 청년의 몸은 툭 꺾임. 장갑차는 오른쪽으로 빠져나감.


오후 1시 40분 무렵, 5~6명의 청년, 태극기를 흔들며 금남로 쪽에서 걸어나오며 외침.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공수부대 물러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잠시 후 모두 피를 쏟고 쓰러짐. 

 

옥상 저격수들, 주변 건물 창으로 이 광경을 내다보는 사람들에게도 총격 가함.

 


눈깜짝할 사이였습니다. 당신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을 쉴새 없이 메모하고 있습니다.

지난 며칠 간의 끔찍한 장면보다 더 잔혹한 1시간에 당신 몸은 바르르 떨려옵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2시, 당신의 취재수첩 위로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simon


※ 30여 년이 흐른 뒤, 당신은 계엄사령부의 '계엄상황일지'와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의 '작전상황일지' 및 '작전일지', 특전사의 '전투상보', 31사단의 '전투상보'를 확인해봤습니다. 이날 집단 발포에 따른 시민 사망 보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군부가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으로 보고 집단적으로 삭제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계엄상황일지를 작성하려면 반드시 일련번호를 써야 합니다. 5월 17일 일련번호는 2282번으로 끝났지만, 5월 18일은 2286번으로 시작했습니다. 19일, 20일, 21일, 23일, 25일자에도 일련번호가 사라진 것이 보입니다. 5월 18일부터 25일까지 총 19개의 일련번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취재하던 중, 1988년 5월 국방부가 '511연구위원회'라는 조직을 비밀리에 만들어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여소야대로 바뀐 13대 국회에서 5.18 진상규명 요구가 커질 것을 대비했던 겁니다. 511연구위원회에는 국방부 외에 합동참모본부, 보안사령부, 육군본부, 한국구방연구원이 참여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2달 뒤 '511상설대책위원회'로 확대, 개편됐습니다. 대책위는 계엄상황일지, 부대 상황일지를 분석, 평가하고 보안대책을 강구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청문회 시기, 대책위가 군 관련 자료를 국회에 넘기기 전 민감한 내용을 삭제, 은폐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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