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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불량일기

80년 5월 광주의 풍경-7

임상훈(시몬) 2013-05-18 21:38:07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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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의 풍경-7

계엄군이 물러난 다음날(22일) 당신은 평소보다 일찍 도청에 출근했습니다.

도청 앞은 엉망입니다. 곳곳에 말라 붙은 핏자국, 실탄 자국, 벽에 처박힌 버스, 넘어진 공중전화 박스...


도청 1층, 총을 든 시민군들이 보입니다. 서무과를 ‘상황실’로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도청 2층,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시채 부지사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부지사는 광주 유지들과 각계 대표, 재야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참여를 요청했습니다.

정오 무렵, 15명으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수습위원들의 회의는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부지사와 친여 성향 유지들은 총기 반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재야인사들은 계엄당국의 사과가 선행돼야 무기가 회수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오후 1시 반에 계엄분소를 찾아가 협상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1층 상황실의 시민군은 수습대책위원회에 대해 못 마땅한 눈치였습니다.

전투본부를 만들어야지, 무엇을 수습한다는 것인가 하는 불만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재야인사가 소수고, 주로 여권에 가까운 사람으로 구성된 것도 불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2~3층으로 올라오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외곽지역에서 계엄군과 맞서고, 시내 치안을 돌보는데 더 신경을 썼습니다.

정치적 감각이나 전략 같은 것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당신은 1층 시민군에게 살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총을 들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시민군들은 간첩이나 계엄군 첩자에 대한 경계심도 팽배했습니다.


2~3층의 도청 공무원들과 1층의 시민군들.

긴장감과 함께 당신은 참 묘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그런 분위기가 불편했습니다. 도청 밖으로 나왔습니다.


금남로에는 벌써 10만 명의 시민이 나와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소식이 궁금한 시민들과,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찾는 시민들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광주로 내려온다는 소식에 기대를 갖고 나온 시민들도 많았습니다.


일부 시민들이 금남로의 말라붙은 핏자국을 씻고 있었습니다.

크레인이 불타버린 차량 끌어냈고, 각종 바리케이드의 흉한 잔해를 치웠습니다.

계엄군이 오전에 뿌린 전단 속 ‘폭도가 지배하는 도시’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인 당신은 몇 가지가 걱정됐습니다.

수많은 총기가 나와 있어, 은행이나 금은방 같은 곳의 치안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

외부와 교통, 통신이 완전히 끊겨, 생활 필수품의 공급이 불가능한 상황.

다행히 절도 사고는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이 ‘폭도’나 ‘치안부재’ 같은 소리에 화가 나, 더 엄격하게 질서를 지키는 것 같기도 하고,

한 집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인데, 그런 나쁜 짓을 할 생각조차 못 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가게들이 최대 판매량 조절로 생필품 부족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쌀집에서는 두 되 이하, 담배 가게는 한 사람에게 한 갑씩 하는 식으로 말이죠.

 

시민군은 외곽지역에 10개조의 경계병을 배치해 계엄군과 대치했습니다.

 

식사 때면 인근 지역 주부들과 다른 시민들이 김밥, 박카스 등을 갖다 줬습니다.

시민군은 차량에 1~78번까지 번호를 붙여 시민들의 교통을 돕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도청 안의 긴장된 상황과 달리 질서정연한 시내 모습에 무척 놀랐습니다.

 

오후에 각 병원의 시신들이 도청 분수대 앞으로 옮겨졌고, 시민들이 묵념을 했습니다.

연고가 확인된 시신은 도청 옆 상무대 체육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낌과 울부짖음이 들렸습니다.


도청 옥상에 조기가 게양됐고, 애국가가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집회가 이뤄졌습니다.

광주 지역 양대 폭력조직 대장이 나와, 치안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어, 계엄사와 협상을 마치고 온 수습위원들이 단상에 올라섰습니다.

‘유혈을 방지하고, 질서를 유지하자’는 수습위의 제안에 열렬한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하지만 ‘무기를 반납하고, 치안을 계엄사에 맡겨야 한다’고 이야기에는 시민들은 격분했습니다.

수습위원들은 시민들의 반발과 야유를 받자 연단에서 내려와 모두 피해버렸습니다.


당신은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습니다.

1층의 상황실은 조금 더 체계가 잡힌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민수습위원 중 교수들이 학생수습대책위를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민수습위원들은 계엄사와의 협상을, 학생수습위원들은 대민업무를 맡게 됐습니다.


그들의 위치는 1.5층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시민군과 시민수습대책위원들 사이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집단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장례, 총기회수, 차량통제, 질서회복, 의료 등의 부서를 설치했습니다.


이날 저녁 박충훈 총리는 방송에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광주는 치안 부재의 상태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해 군인에 발포했으나 군은 정부의 명령으로 발포를 못하고 있다.”


시민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당신도 실망했습니다.


1980년 5월 22일 밤, 한 공무원은 누가 진짜 ‘불순분자’일까 생각하며 잠에 들었습니다.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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