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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불량일기

80년 5월 광주의 풍경-10

임상훈(시몬) 2013-05-22 01:42:37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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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의 풍경-10

어제(25일) 당신은 서울에서 온 편지를 읽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대주교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군의 교통통제로 편지가 전달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서울의 한 군종신부가 직접 들고 광주로 왔습니다.


검열이 심한 터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지는 않았습니다.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크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평화적으로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구호성금 1,000만원도 담겨 있었습니다.

 

추기경의 편지가 힘이 됐지만, 광주의 상황은 당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광주는 완전히 봉쇄되고, 고립됐습니다. 외부에서는 광주 소식을 모릅니다.

계엄군은 곧 공세를 취할 거라며 압박합니다. 정부는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몹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시민들이 느끼는 고립감과 공포심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어제 광주로 내려온 최규하 대통령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온 이유는 평화적 사태수습이 아니라, 소탕작전에 대한 격려였습니다.

 

시민들이 더 이상 국내에서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도청은 25일 이후 항쟁파와 수습파의 대립이 치열했습니다.

 

수습파의 무기 회수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민군의 수는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항쟁파는 무기를 다시 나눠주고, 시민군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도청 안에서는 둘 사이의 고함과 위협이 살벌하게 오갔습니다.


계엄군도 도청 내의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제 오전 계엄군 첩자로 의심받던 청년이 북한군 독침에 맞았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병원에 끌고 가니 의사가 웃었습니다. 그는 도망쳤습니다.

다음날 방송에서는 “도청에서 빨갱이에 의한 독침 사건이 발생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독침사건 보도는 도청과 시내의 분위기를 더욱 다운시켰습니다.

며칠새 비도 내렸고, 매일 갖는 시민궐기대회의 참여 시민 수는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오늘(26일) 새벽 5시 반, 계엄군의 무력진압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탱크를 앞세운 20사단 병력이 광주시내를 향해 진군해 들어왔습니다.

시민들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계엄군이 노렸던 바일 겁니다.


이 소식을 듣고, 수습위에 참여한 재야인사들은 방패가 되기로 결의했습니다.

재야인사 17명과 함께 금남로에 일렬횡대로 섰습니다. 당신도 그 뒤에 섰습니다.

 

약 4km 가량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당신은 문득 '칼레의 시민'을 떠올렸습니다.

 

오전 9시경, '죽음의 행진'은 탱크 앞에서야 멈췄습니다.

 

양쪽 인도에는 착검한 계엄군이 실탄을 장전하고 서있었습니다.

양측 빌딩 2층과 옥상에는 군인들이 기관총을 내걸고 시민을 향해 발포태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세단이 나타났습니다. 별 2개를 단 장군이 부관들을 대동하고 나왔습니다.

그는 이 상황이 부끄러운지 계엄사령부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습니다.

 

행진 중 대변인으로 선택된 김성용 신부가 말했습니다.

 

"군이 어젯밤 위치에 후퇴하지 않는 한 갈 수 없다."

 

결국 탱크는 소음을 내면서 물러났습니다. 시민들의 환호가 들렸습니다.

 

당신은 이제 도청을 향해 되돌아 갑니다. 

탱크는 돌려보냈지만, 올 때보다 당신의 어깨는 더 처졌습니다.

 

1980년 5월 26일 아침, 한 성직자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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