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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불량일기

80년 5월이 있기 전

임상훈(시몬) 2013-05-28 01:41:35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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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이 있기 전

세상에 어떤 일이 있으면, 거기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80년 광주’는 완전히 고립된 고도(孤島)였지만, 이 역시, 역사의 큰 맥락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80년 광주’에 대한 이해는 그 전후의 맥락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80년 광주’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1972년]

 

-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특별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날 국회는 해산됐고, 정당 및 정치 활동도 중지됐습니다. 또한 대통령 맘대로 통제할 수 있는 통일주체 국민회의가 대통령을 뽑도록 했습니다. 영구 집권이 가능해진 거죠.


10월 유신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한국적 민주주의’ 하에서는 3권(입법, 사법, 행정)은 대통령에게 있었습니다. “유신은 잘못됐어” 또는 “유신은 개정되어야 해”라고 친구에게 이야기한 게 들키면, 영장 없이 바로 체포됐습니다.

 


[1978년]

 

-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엄청난 금권, 관권을 동원했음에도 여당인 공화당이 31.7%를 얻었습니다. 반면 신민당은 그보다 1.1% 많은 32.8%를 획득했습니다. 유신체제에 위기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 12월 27일

유신체제를 비판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습니다. 국회의원 선거 결과가 유신정권에 유화책을 강요했습니다.

 


[1979년]

 

- 5월 29일

김대중 씨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씨를 지원해 총재에 당선시켰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 연합세력이 신민당 지도부를 장악한 것은 유신정권에게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안겨줬습니다.


- 8월 11일

신민당 사무실에서 폐업반대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기동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됐습니다. 진압작전  직후 YH무역 노조 집행위원인 김경숙 씨가 사망 직전 상태에서 발견됐고, 병원 이송 직후 숨을 거뒀습니다. 경찰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도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대변인은 몽둥이에 맞아 안면이 피투성이가 됐습니다. 신민당 소속의원 전원이 당사에서 항의농성에 돌입했습니다.


- 8월 13일

유신정권의 사주를 받은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에 대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했습니다.


- 9월 8일

서울민사지법은 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 10월 4일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 159명이 몰래 모여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결의안을 기습 처리해버렸습니다.


- 10월 13일

신민당 소속의원 전원과 통일당 의원 3명은 의원직을 총사퇴했습니다.

- 10월 16~20일

74년 이후 한 차례의 시위도 없던 부산대에서 16일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정문이 막힌 학생들은 남포동에서 다시 모였고, 시민들이 동참해 수만 명의 행렬이 일대를 휩쓸며 외쳤습니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밤새 11개의 파출소가 파괴됐습니다.


17일 부산대가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동아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합류했습니다.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긴급투입된 3공수여단의 거친 진압으로 시위는 수그러들었습니다.

18일 마산의 경남대생 1,000여 명이 교내 시위를 벌인 다음 시내로 진출했습니다. 파출소, 공화당 사무실, 법원, MBC 등 19개 공공건물을 공격했습니다. 시위는 19일 밤까지 계속 이어졌지만, 1,500명의 무장군인이 마산 시내에 투입되고, 20일 위수령이 발동됨으로써 나흘 간의 부마항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고 숨졌습니다.


박정희의 심복인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직접 확인한 뒤, 중앙정보부 총책답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습니다. 부분적인 민주화 조치를 취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민중의 저항을 무마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강경파인 차지철은 자국 양민 200만 명을 살해한 캄보디아를 예로 들며 강경 진압을 주장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발포명령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김재규는 이를 막기 위해 ‘거사’를 거행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날 밤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의 명령에 따라 체포됐습니다. 궁정동 현장에 있던 김계원 비서실장도 이후 구속됐습니다. 다음 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됐고,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정권이었습니다. 이를 지탱하는 핵심 권력기관은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차지철의 경호실, 김계원의 비서실이었습니다. 10.26은 대통령의 목숨은 물론, 공식적인 군사정권의 핵심조직을 한꺼번에 정지시켜버렸습니다.


- 11월 6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날 10.26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최초로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안사는 군대의 정보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핵심 권력기관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특무대와 현재의 기무사에 해당하는 조직입니다.

 


전두환은 ‘하나회’라는 육군 내 사조직의 수장이었습니다. 주로 경상도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하나회는 박정희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해온 절대 복종의 조직이었습니다. 선후배 간의 추천 등으로 군대 요직을 독점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중앙정보부, 경호실 등의 권력기관이 수장을 잃고 힘을 못 쓸 때, 조직에 충성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군내 조직이었습니다. ‘신군부’라는 표현은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그들을 비호했던 선배 장성들을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반란군이 무력으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계엄령 하 최고 권력자는 계엄사령관 정승화였습니다. 그는 유신헌법의 철폐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하나회’를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전두환을 한직으로 보낼 작정이었습니다. 이에 전두환은 대통령과 국무장관의 승인도 없이 정승화를 체포했습니다.


이후 육군본부 측 장성들과 반란군 사이에 무력 충돌 직전 상황까지 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미군은 양 측에 새벽까지 군대를 이동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고, 육군본부는 이를 따랐습니다. 반면, 반란군은 군대를 움직여 육군본부 측을 제압해버렸습니다. 이후 신군부가 군대의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후 미국은 전두환 일파의 쿠데타를 방조했다는 비판을 봤게 됩니다.

 


[1980년]

 

- 2월 1일

전두환의 보안사 내 정보처가 복원됐고, 언론조종반이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언론조종반은 전두환을 King으로 만들기 위한 ‘K공작 계획’을 작성해 시행했습니다. 주요 매체 사장, 주필, 논설위원,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 94명을 접촉하여 회유공작을 진행했습니다. 전문지식인을 통해 시국안정을 강조하는 칼럼을 발표하게 했고, 독자투고란까지 조작했습니다.


보도검열단으로 하여금 민주개헌이나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야당, 재야 등에 대한 보도를 삭제하게 했습니다. 양 김 씨의 정치활동은 ‘구태의연한 정치작태’나 ‘대통령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묘사됐습니다. 월남패망이 끝없이 강조되며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경고가 보도매체 전면에 두드러졌습니다.


- 2월14일

육군본부는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 부대에 충정훈련을 지시했습니다. 공수부대는 이 때부터 모든 교육훈련을 포기하고 충전훈련만 집중적으로 시행했습니다. 대학과 시민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습니다.


- 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됐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은 법률상 다른 공직과 겸임이 불가능했지만, 누구도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전두환은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중정 서리가 됨으로써, 국무회의에 공식적으로 참가해 최규하 정부를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정보’와 ‘비자금’을 손에 쥐게 됐습니다. 중앙정보부는 공직자 등에 대한 막강한 정보력과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 자금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향후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중요한 기반 역할을 하게 됩니다.


- 5월15일

이날 오후 서울역에 10만 명에 육박하는 수의 학생들이 집결했습니다. 또한 지방 24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감행했습니다. 학생들은 ‘비상계엄 철폐’, ‘전두환 퇴진’, ‘유신잔당 타도’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K공작’ 탓에 정보가 부족한 시민들의 반응이 기대만큼 뜨겁지 않았고, 다른 사회운동의 지원도 없었습니다. 군의 출동 등을 염려한 총학생회 대표들의 토론 끝에 시위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 5월 16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 자극을 받은 야당과 공화당은 조만간 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습니다. 이로써 계엄사령관은 대통령과 바로 연결되고, 내각을 건너뛰어 직접 대통령을 통제할 수 있게 됐습니다.  


비상계엄확대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무회의를 소집했는데, 국무회의실로 가는 복도에는 착검한 칼을 든 무장군인들이 살벌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외부와 전화통화도 불가능했습니다. 비상계엄확대 선포안은 찬반토론 없이 8분만에 의결됐습니다.


김대중, 문익환, 고은 등 각계 민주인사를 체포했고, 김영삼 등 야당 주요 정치인은 가택 연금시켰습니다. 전국 주요 대학에는 공수부대를 출동시켰고, 학생회 간부들을 체포했습니다.


- 5월 18일

국회의원과 정당의 활동을 포함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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