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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불량일기

80년 5월 이후

임상훈(시몬) 2013-05-31 01:17:30
시몬 (임상훈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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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이후

‘80년 5월 광주’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해 10일 동안 있었던 일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1980년]

 

- 5월 27일

2만 여명의 군사로 광주를 진압한 날 오후, 국무회의실에서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이 의결됐습니다. 정부 부처와 장관의 권한을 모두 ‘국보위’가 가져가게 됐습니다.


- 5월 31일

국보위가 출범했습니다. 정부 내 모든 의사결정을 내렸던 상임위원회 위원 다수는 현역 장성들이었습니다. 위원장은 당연히 전두환.  국보위가 가동함으로써 전두환은 사실상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 6월 2일

광주에서 총칼을 썼던 장교들에게 논공행상을 했습니다. 신군부가 승전파티로 나눠가진 훈장들은 오늘날 그들의 학살만행 관여 정도를 입증하는 범죄의 징표로 남게 됐습니다.


- 7월 3일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수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김대중 일당과 불순분자의 조종에 의한 조직적 무장폭동’으로 모략했습니다. 진실은 왜곡됐습니다.


“22일 광주시는 치안부재의 무법천지가 계속되는 가운데... 약탈행위는 극에 달하였는데...”

“군은 끝까지 무익한 자극과 무고한 시민의 피해를 염려하여... 총 한 방 쏘지 않고 사태의 악화방지에 주력하였다.”


이 내용은 당일 방송과 다음날 신문을 통해 대서특필됐습니다.


-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일당 내란음모 사건’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국민 모두가 바라는 국가안보, 경제발전, 정치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김대중과 같은 사이비 정치인이나 혹은 ‘민주’의 가면을 쓴 적색요소는 법의 심판에 따라 정치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 7월 31일

<기자협회보> <‘뿌리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월간 중앙> 등 172개 정기간행물의 등록이 취소됐습니다.  비판적인 기사를 쓴 기자 700여 명의 명단을 각 언론사에 보내 그들의 펜을 빼앗았습니다.


- 8월 4일

국보위는 ‘사회악 일소를위한 특별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전국에서 행인을 검문하여 문신이나 전과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연행했습니다. 경찰들은 할당량에 따라 건수를 채워야 했습니다. 국보위는 10일 동안 영장도 절차도 없이 6만 755명을 체포했습니다.


이중 3만 9,742명이 합법적 절차 없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상상도 못할 비안간적 가혹행위에 시달렸습니다. 끌려간 이 중에는 정치인의 비서, 하나회를 수사했던 강창성 전 장성 등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삼청교육대 현장에서 52명, 후유증으로 397명이 사망했습니다. 2,678명이 정신장애 등 상해를 입었습니다.


- 8월 13일

상도동 자택에 연금당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총재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습니다. 10.26으로 군사정권의 주요 핵심기관들이 힘을 잃자, 대통령의 꿈을 키웠던 그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위법적 행위에 힘 한번도 못 쓰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습니다. 이후 2006년 사망 때까지 80년의 일에 대해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 8월 17일

김대중은 광주사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습니다.


- 8월 21일

군은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 다음날 전두환은 전역했습니다.


- 8월 27일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단독 출마했습니다. 총투표자 2,525명 가운데 기권 1명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9월 1일 취임했습니다. 마침내 10.26 이후 ‘세상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 9월 4일

광주를 방문한 전두환은 “앞으로 더 이상 광주사태는 거론 말고, 상처를 치유하자”고 말했습니다.


- 12월 9일

광주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82년]

 

- 3월 18일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83년]

 

- 3월 4일

광주 망월묘역에 안치된 5.18 희생자들의 묘지를 분산시키기 위한 이장 공작이 벌어졌습니다. 1,000만원을 받고 26기의 묘가 이장됐습니다.

 


[1985년]

 

- 5월 15일

광주항쟁 최초의 현장 보고서 <죽음을 너머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풀빛)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출판 전, 출판사 대표가 경찰에 체포되고, 인쇄를 마치고 제본 중이던 2만 부가 전량 압수당했습니다.  다행히, 미리 원고를 빼놓은 덕분에 마스터 인쇄기로 찍어서 세상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지만, 이 책의 복사본은 전국 대학가의 필독서가 됐습니다.


- 5월 23일

서울 5개 대학생 73명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72시간 동안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학생들은 주한 미국대사와 면담을 요구하며 광주 민중항쟁의 진상 규명과 전두환 군부독재에 대한 미국 지원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학생들의 미문화원 농성은 전략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한국 공권력의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충분한 시간 동안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또한 80년 5월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논의의 주제로 부각시켰습니다.


- 5월 30일

신민당은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결의안을 제출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흐름에 따라, 월간지들은 7월호부터 미 문화원 사태와 광주사태를 경쟁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

 

- 7월 3일

부천 성고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 10월 28일

'전국 반외세 박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 결성식을 위해 대학생 2,000여 명이 건국대에 모였습니다. 교내로 진입한 3,000여 명의 전경과 4일 동안 대치 끝에 1,525명이 연행됐고, 그 중 398명이 구속 기소됐습니다.

 

- 10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희대의 사기극인 '금강산댐 건설 추진계획'과 '평화의 댐 건설 모금행사'를 발표해 전날의 과잉진압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반공 쪽으로 유도했습니다.

 

 

[1987년]

 

- 1월 14일

서울대 박종철 군이 경찰의 물고문에 사망했습니다. 

 

-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개헌논의 중지 등을 포함한 '호헌조치'를 발표했습니다. 간접선거 방식으로 노태우에게 차기 대통령 직을 주겠다는 발상이었죠. 종교계 및 재야 각 단체에서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이 잇따라 발표되는 등 비난여론이 빗발쳤습니다.

 

- 5월 18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와 이의 은폐 사실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끈질긴 추적 끝에 드러났습니다. 국민은 충격과 분노에 떨었습니다.

 

- 5월 27일

재야 및 야당 등을 포괄하는 범야권 연합조직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발족했습니다.

 

-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군이 시위 중 최루탄 파편에 맞았고, 다음달 6일 사망했습니다.

 

- 6월 10일

6월 항쟁(6월 10~29일)이 시작됐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축소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확산됐습니다. 국본은 이날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 규탄대회를 민주헌법 쟁취투쟁과 결합시켰습니다. 


6만여 경찰병력을 투입한 원천봉쇄에도, 전국 18개 도시에서 일제히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차량행렬은 경적을 울려 호응했고,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로 격려했습니다. 시청 1개소, 파출소 15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2개소 등 21개소의 공공시설물이 파손되고, 경찰 708명, 일반인 30명의 부상자(경찰 집계)가 발생했습니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는 밤 10시부터 6월 항쟁의 '태풍의 눈'이 된 '명동성당 점거농성'으로 이어졌습니다. 15일 해산 때까지 닷새 동안 농성이 계속됐고, 성당 밖에서는 연일 대학생들과 인근 사무직 노동자들의 지원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등 시국수습 8개 항(6.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988년]

 

- 11월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위한 광주특위 청문회가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2월 24일까지 총 17회 동안 진행됐습니다.



[2011년]

 

- 5월 25일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우리나라 일부 보수단체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펼쳐 국제적인 빈축을 샀습니다.

 

 

 

 

80년 5월 이후 세상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1. 미국에 대한 생각 변화

12.12와 5.18 등의 군대 이동에는 미국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는 미국의 동의 또는 방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미 문화원 방화나 점거, 운동권 내의 민족해방(NL) 진영의 탄생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2. 조직의 필요성 인식

광주는 완전히 고립됐습니다. 만약 당시 서울이나 부산 등에서도 시위가 있었다면, 2만 명 이상의 군대가 광주에 집중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재야 민주세력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인 활동이 가능한 조직의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같은 전국 단위의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3. 노동현장 투신

광주에서의 항쟁이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소외계층과 운수노동자 등의 참여 덕분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의 한계와 노동자, 농민 등의 단결이 필요성이 크게 부각됐습니다.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노동현장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4. 심리적 부채의식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도 있는데, 폭행이나 구속은 별것도 아닌 게 돼버린 거죠. 

 

많은 사람들이 '부채의식'을 가지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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