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탈기어 솔리드 5: 더 팬텀 페인>(이하 <팬텀 페인>)의 숨겨진 엔딩이 달성됐다. 게임 역사상 가장 어려운 엔딩 중 하나라 여겨진다. 게임은 2015년 9월에 발매됐지만, 숨겨진 엔딩을 보기 위해 5년의 세월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왜 이리 오래 걸렸어?”
달성 조건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엔딩은 <팬텀 페인> 멀티플레이어 전원 핵무장 보유량이 0일 때 발생한다. 모든 유저가 협동해도 어려운데, 몇몇 유저가 항상 방해를 해왔다. 핵무장을 없애려 노력하면 반대측에서는 핵을 생산하며 대응했다. 엔딩까지 걸린 5년은 ‘비핵화파’와 ‘핵확산파’의 자존심 싸움이라 할 수 있다.
다행히 ‘비핵화파’의 단결력이 더 강했다. 2015년 9월 1일부터 시작된 PS3판 <팬텀 페인> ‘비핵화 전쟁’은 2020년 7월 27일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아래는 종전(?) 순간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레딧 유저가 찍은 영상이다.
# 계륵보다 못한 아이템, 핵무장
핵무장은 멀티플레이에서 타 유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다. 자신보다 낮은 랭크 유저가 플레이어의 멀티플레이 기지(FOB)로 침입하는 일을 막아준다.
<팬텀 페인> 멀티플레이 구성을 보면 이론적으로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게임의 자원 시스템은 멀티플레이를 권장한다. 싱글플레이를 열심히 해도 멀티에서 한 탕 뛰는 소득이 훨씬 많다. 결국 타 플레이어 기지를 침투해 자원 및 NPC를 훔쳐 오는 일이 잦다. 따라서 핵무장은 자원을 지키는 좋은 보호수단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유저들은 핵을 <팬텀 페인> ‘최악의 아이템’이라 부른다. 실질적 이점도 없으면서 단점만 많은 골칫덩어리기 때문이다.
실효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게임에서 가장 많은 자원 투입량을 요구하며 실제 시간으로 하루가 걸린다. 자원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만드는데, 정작 만드느라 자원이 너무 많이 든다. 결국 핵을 만들 바에 기지나 장비 등을 강화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만들기는 까다로운데 훔치기는 너무나 쉽다. 출처: Weedle McHairybug
핵무장 효과를 무효화시키기도 쉽다. 더 높은 랭크거나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 된다. 이 조건은 너무 쉽다. 싱글플레이를 정상적으로 플레이하면 누구나 달성할 수 있다. 핵무장의 침입 억제 효과는 없다고 봐도 좋다. 유저가 멀티로 넘어가는 때는 싱글플레이를 어느 정도 진행한 후다.
보유 시 생기는 치명적 문제도 있다. 핵무장을 보유하는 순간부터 ‘핵 보유자 명단’에 등재된다. 그 순간부터 ▲핵을 훔치려는 유저 ▲자원이나 NPC를 약탈하려는 유저 ▲괴롭히려는 유저 등 온갖 유저들이 방문한다.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만들어 위험에 처하게 된다.
# 그런데도 핵을 만드는 이유는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은 비효율의 결정체지만 지금도 핵무장은 만들어지고 있다.
결정적 이유는 ‘엔딩 방해 트롤링’ 때문이다. 유저들은 비핵화 엔딩을 위해 몇 년간 노력해온 것을 알고 있다. 가령 2017년에는 일본 유저 주도로 PS4 버전에서 비핵화 운동이 있었다. 유저들은 힘썼으나 실패로 끝났다. 핵무장 268개가 폐기되는 동안 267개가 만들어졌다. ‘비핵화파’를 골탕 먹이려는 트롤러의 승리인 셈이다.
무려 5년간 이어져온 트롤링!
다른 이유는 자원 과시 때문이다. 핵무장은 소위 말하는 플렉스(FLEX)에 최적화된 콘텐츠다. 핵 보유자 명단에 올라 이목을 끄는 효과는 덤이다. 넘치는 자원과 타 플레이어를 막을 자신감을 과시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콘텐츠는 없다. 핵무장을 훔쳐 보유량을 과시하는 유저도 있다.
의외의 이유는 일부 유저가 엔딩을 모르기 때문이다. 유저 다수는 숨겨진 엔딩을 알고 있다. <팬텀 페인>은 장르가 난도 높고 마니악한 잠입 액션이다. 공략과 가이드를 위해 커뮤니티를 자주 이용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엔딩도 알게 된다. 그러나 세일 기간 때 유입된 유저들은 다르다. 게임에 재미를 붙이다 보니 얼떨결에, 혹은 도전과제 달성을 위해 만드는 경우가 흔하다.
#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해당 엔딩은 여러 악조건들(?)로 보기 까다롭다. 그렇지만 비핵화 엔딩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8년 2월 <팬텀 페인> PC판에서 뜬금없이 엔딩이 등장한 바가 있다.
갑작스런 엔딩에 모든 유저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7,200개 가깝던 핵무장이 하루아침에 0개로 바뀔 리 없기 때문이다.
<팬텀 페인>의 핵무장 개수를 보여주는 통계 사이트에는 여전히 7,200개였다. 일각에서는 운영사 ‘코나미가 게임을 잘못 건드린 게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메탈기어 솔리드> 공식 측은 “자세한 원인은 확인 중이지만 핵 보유량 0개가 되지는 않았다”고 답변했다.
유저 모두를 황당케한 사건의 원인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PC판이 가진 고질적 약점인 해킹과 버그로 인해 생긴 문제였다. 한 스팀 유저는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상위권 4~5위 위 유저의 핵 보유량이 정확히 2,147,483,647개다. 우연인 걸까? 코나미가 아니라 누가 혹은 뭔가 게임을 망친 것 같다. 핵 보유량 한계를 넘어버려서 핵이 없어진 것 같다.”
즉 몇몇 유저가 해킹을 하거나 버그를 활용했고, 그 결과 핵무장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버렸다. 욕심이 너무 과한 나머지 오버플로 현상이 발생했다는 결론이다.
흔히 사용되는 32비트에서 출력 가능한 최대 정수는 2,147,483,647(2^31-1)이다. 그런데 여기서 1을 더하는 순간 산술 오버플로가 발생해 수치는 -2,147,483,648이 되어버린다. 이로 인해 유저 핵 보유량 합산에 문제가 생겼고, 엔딩 조건이 달성되었다는 주장이다.
오버플로는 메모리 용량을 넘어선 값이 들어가 생기는 오류다. 데이터는 2진법으로 저장 및 계산된다. 이때 제일 앞에 오는 수는 양수와 음수를 구분한다. 그런데 2진법이 감당할 수 있는 수치를 넘어서면 양수와 음수를 구분하는 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산술 오버플로라 한다.
# 5년간의 기나긴 싸움
결국 정상적인 방법으로 엔딩이 달성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저들이 이 엔딩을 염원한 이유는 다양하다. ▲시리즈의 아버지 코지마 히데오가 숨겨둔 엔딩이라서 ▲코지마 히데오의 마지막 <메탈기어>라서 ▲ 시리즈의 핵심 메시지인 전쟁의 허무함과 평화의 소중함이 잘 드러나서 ▲숨겨진 엔딩을 꼭 정상적으로 보고 싶어서 등이다.
코지마 히데오 감독의 작품과 반전사상에 반한 수많은 사람들이 5년간 사투 끝에 맺은 결실이다. 이번 소식에 코지마 히데오는 별다른 언급을 안 하고 있지만, 그가 마음 속으로 뿌듯해하고 있으리라 추측해본다.
핵이 없는 세계도 잠시였다. 8월 5일 기준으로 PS3판에 남아있는 핵은 67개다. 기껏 없애놨더니 다시 늘어났다.
PC판에는 13,346개, PS4판에는 2,494개의 핵이 남아 있다. 타 플랫폼에서 승리는 아직 멀고도 먼 셈이다. (링크)
비핵화를 꿈꿔 모두가 노력했으나 누군가는 다시 핵을 만드는 이 상황. 게임이 현실 역사를 제대로 풍자하고 있는 모양새다. <메탈기어> 시리즈 감독 코지마 히데오가 여기까지 내다보고 기획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랬다면 이 엔딩은 게임 역사상 더없이 완벽한 개발자의 메시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