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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리뷰

'둠 이터널'은 어떻게 '둠 리부트'를 뛰어넘었나

[리뷰] 더 강력해진 '폭력의 악몽'과 뜬금없는 실존주의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김재석(우티) 2020-03-27 18:02:23

2020년 3월 20일은 대작이 쏟아진 날이다.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 나왔고, <전략적 팀 전투>의 모바일 버전이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보다 며칠 앞서 출시된 <인왕 2>도 '또 다른 맛의 <세키로>'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신작 풍년 속 기자의 관심사는 오직 단 하나였다. <둠 이터널>. 

 

* 주의: 본문에 삽입된 동영상과 스크린샷에는 잔인한 모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으니 읽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둠>(2016)의 살짝 아쉬웠던 귀환

2016년 <둠>이 베데스다의 품에서 재탄생했을 때 많은 이들이 걱정했다. 어떻게 빠르고 잔인한 <둠>의 게임성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게임의 개발은 이드 소프트웨어였지만, 존 로메로와 존 카맥 모두 회사를 떠난 상황. 팬들은 우려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게임은 <둠 3>보다 훨씬 빠른 템포와 과격함을 자랑했다. "이게 <둠>이다"라고 느낄 정도로 몰아치는 메탈 사운드도 그대로였다. 뿐만 아니라 <모탈 컴뱃>의 페이탈리티가 생각나는 글로리 킬과 기존의 설정을 길게 늘여놓은 <둠 3>보다 훨씬 독창적인 스토리 라인까지 가지고 있었다. 멀티플레이도 나름 인기를 끌었다.

 

<둠>(2016)은 성공했다. 메타크리틱 평론가 스코어 80점대, 유저 평점 8.5점대를 기록하며 시리즈의 화려한 재탄생을 알렸다.

 

<둠> (2016)

 

하지만 <둠>(2016)은 동세대 FPS 중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마침 같은 해 블리자드가 하이퍼 팀 슈터를 내놓았고(<오버워치>), 인피니티 워드도 가만있지 않았다. (<COD: 인피니트 워페어>). 이듬해 <플레이어언노운스 배틀그라운드>가 등장하면서 배틀로얄 붐까지 일었다.

 

<둠>(2016)은 시리즈의 '정신적 계승작'이라고 부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지만, <둠> 말고 할 게 너무 많은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 <둠 이터널>은 어떻게 <둠>을 뛰어넘었나

리부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둠 이터널>의 지상과제는 어떻게 전작(들)을 계승하면서도 <둠>(2016)의 아쉬운 점을 극복하느냐에 있었을 것이다. <둠 이터널>은 악마보다 악마 같은 둠 슬레이어의 난투극을 전작만큼 잘 보여주면서 전작엔 없었던 신무기를 장착했다.

 

신무기를 장착한 둠 슬레이어


(1) 찢고 죽여라: 더 강력해진 '악몽'

 

<둠 이터널>은 2016년 작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둠 슬레이어의 시그니처 무기라고 부를 수 있는 슈퍼 샷건 하나만 들고 '무쌍을 찍기'란 불가능하다. <둠 이터널>의 투기장 구간은 굉장히 어렵고 정신이 없다. 아, 이것이 무간지옥의 액션 쾌감인가? 

 

키보드를 하도 격렬하게 눌러대는 통에 땀이 날 정도였다. 회사에서 게임을 했는데 청축 키보드를 썼다간 욕을 먹었을 것이다. 적들의 웨이브를 다 막기 전에는, 몬스터의 눈깔을 뽑고 머리통을 짓누르는 잔인한 글로리 킬 장면에서나 아주 잠깐 손에 난 땀을 셔츠에 닦을 수 있을 뿐이다.​ 게임은 그 정도로 격렬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뭐가 뭐가 들었나?

 

전기톱으로 내 뇌를 열어보지 않았지만, 분명 아드레날린이 '뿜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낙사라는 위험 요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포트나이트>급 입체 기동을 하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먹고, 마찬가지로 파밍 요소인 잡몹들(Fodder)에서 추가 체력과 방어력을 뽑아먹고, 정신없이 총기를 바꿔줘야 한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는 약점 공략을 해줘야 하기 때문에 전장 상황에서 퍼즐을 풀듯 뿌려진 몬스터들을 파훼해야 한다. 이 '퍼즐'은 플레이어의 컨트롤과 설정한 난이도, 뿌려진 몬스터의 개체 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알아서 깨면 된다.

 

가령 <둠> 시리즈 역사와 전통의 귀여운 핑키를 잡을 때 투우를 하듯 돌진하는 핑키를 점프로 피해서 꼬리를 때려도 되고, 핑키가 오지 못하는 곳까지 멀리 피해서 저격을 해도 되고, 얼음 폭탄으로 얼린 다음에 깨버려도 된다. 

 

둠 슬레이어의 액션극은 좀 더 지능적이다

 

물론 <둠 이터널>의 전투는 <석양의 무법자>의 그 유명한 최종 결투씬이 아니라 <존 윅>의 액션씬과 같다. 눈치 보고 각재고 생각할 시간 없이 일단 보이는 대로 죽여야 한다. 전투 페이즈에서는 오직 홀로 무아지경의 경지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다 순간의 전략적 선택이 맞아들어갈 때 기분이 끝내준다. 

 

플레이 로직​은 <둠>(2016)이나 <둠 이터널>이나 같지만, 더 많은 옵션의 무기와 악마를 보여주면서 그 난이도/응용도는 전작보다 높아졌다. 한 단계 더 매워진 셈인데, 그래서 더 재밌다. 

 

그러면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A를 배우셨고, B를 배우셨으니 이 페이즈에서 A와 B를 응용하면 깰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해준다. 수많은 전투 옵션을 차근차근 학습시키고, 중간에 난이도를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다. 체크포인트도 섭섭하지 않게 ​준비되어있다. 그래서 <둠 이터널>은 잔인하지만 친절한 게임이다.

 

잔인하지만 친절한 게임이 있다?

 

조용히 내려가는 난이도

 

(2) 탐험하라: 아니 여기 플랫포머가?

 

한바탕 푸닥거리가 끝나면 '복도' 구간이다. 체력도 회복하고 한숨도 돌리고 무기 강화도 할 수 있지만 안심할 수 없다. 끝없는 살육이 끝나면 게임에 장애물 통과 구간이 등장한다. 치열한 전투가 끝나면 BGM이 바뀌면서 "다 죽이셨으면 이제 점프랑 벽 타기랑 길 찾기 잘 해보세요ㅎㅎ" 한다.

 

아무리 샷빨이 좋아도 길 찾기를 못하면 게임을 진전시킬 수 없다. 개발진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플랫포머 요소는 각종 커뮤니티는 물론 게임 웹진에서도 호불호가 갈렸다. 개인적으로 '내장의 숲'보다 힘들었던 건 '인내의 숲'이었다.

 

길 찾기는 귀찮지만 할 만하다

 

전투 페이즈와 마찬가지로 점진적으로 플레이를 적응시키기에 <둠 이터널>의 길 찾기&장애물 통과하기 요소가 극악의 난이도까진 아니었다. 하늘을 날고 벽타기를 하는 둠 슬레이어를 조종하는 감각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라도 된 것 같다. 해본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을 말 같지만, 날렵하게 날아서 묵직하게 달라붙는다.

 

다만 정신없이 총알을 날리고 톱질을 하다가 시간 제한 없는 사고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 '뇌절'이 온다. 가만히 서서 '저기서 철봉을 타서 2단 점프를 한 뒤 벽 타기를 한 뒤에 퍼즐을 맞춰서 다음 구간으로 간다'는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한 바탕 악마 살육을 벌인 뒤라 정신이 멍한데 말이다. 기자는 컨트롤도 훌륭하지 않은 편이라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이러한 요소는 <둠>(2016)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확실히 텐션이 끊긴다라는 느낌도 들지만, 퍼즐뿐 아니라 수집 요소까지 강조된 <둠 이터널>의 레벨 디자인은 게임의 공간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었다. 길 찾기가 필요없는 고속도로에 악마들만  깔린다면 도리어 밋밋했을 것이다. 이는 오리지날 <둠>이 맵을 미로처럼 비틀어서 탐험의 재미를 준 것과 일맥상통한다. 

 

킹받는 플랫포머 구간

"알아서 열어보세요 ㅎㅎ"

 

(3) '둠 유니버스'의 탄생

 

<둠 이터널>은 오리지날 시리즈와 2016년작 <둠>을 하나로 묶는 이야기를 완성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자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게임은 과거의 둠 슬레이어가 오늘날 어떻게 됐는지를 설명한다. 게임은 2016년까지 흩뿌려놓은 각종 이야기 소재들을 하나하나 묶어서 정열한다. 

 

둠 슬레이어는 예나 지금이나 '악마를 잡아 족친다'라는 아주 단순한 목적을 수행하지만 지구와 우주,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때문에 게임의 표정은 굉장히 다양하고, 만날 수 있는 악마도 전작보다 많아졌다. 게임은 결말부에서도 후속작에 대한 떡밥을 뿌리기 때문에 기대감을 높인다.

 

그리고 보스몹은 너무 어렵다

컷씬, 게이머가 직접 수집해야 하는 '스토리 정보', 그리고 후속작 떡밥이 존 카맥의 말*대로 부차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둠 이터널>에 존재하는 모든 설정 정보를 다 읽어보지 않았다. 이드 소프트웨어는 이러한 점을 선택적 요소로 남겨뒀다. "아, 모르겠고 다 죽여버릴 거야" 마인드로 게임을 접근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은 것이다. 

 

<둠 이터널>은 1990년대 고전 명작과 2016년의 살짝 아쉬웠던 부활 사이에 잃어버린 고리를 찾았다는 점에서 완벽한 정체성의 계승이다. <둠 이터널>의 스토리는 유전자적으로 옛것과 새것을 연결했기에 큰 의미가 있다고 평하고 싶다.

 

이걸 어느 세월에 다 읽어...

  

아직도 둠 슬레이어가 인간으로 보이니?

*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스토리와 같다. 거기 있었으면 하지만, 딱히 중요하지는 않다. (Story in a game is like a story in a porn movie. It's expected to be there, but it's not that important)

 


# 둠 슬레이어, 악마 앞에 선 단독자

 

<둠 이터널>은 아주 만족스럽다. 전투 구간 - 플랫포머 구간 - 스토리 구간이 아주 잘 어우러졌다. 게임은 높은 완성도를 가졌고 긴장과 이완이 함께 들어있다. 시끄럽고 난폭하게 정신을 쏙 빼놓는데 이것은 원작과 리부트작을 훌륭하게 계승했다는 증거다.

 

<둠 이터널>의 서사 구조는 선형적이지만, 게임의 액션을 설계하는 것은 온전히 내 마음이다. 플레이어는 자기를 옥죄는 상황에 좌절도 하고, 도취도 된다. 게임 안에서 둠 슬레이어를 도와주는 건 인공지능 VEGA 뿐인데, 그마저도 새뮤얼 헤이든의 계략이다. <둠 이터널>의 캠페인은 둠 슬레이어의 솔로 오디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일주일의 가혹한 플레이를 마치고 난 뒤에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떠올랐다. 키르케고르는 삶이란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는 것이라며, 진정한 자아의 모습은 '신 앞에 선 단독자'와 같다고 말했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세계관 대신에 주체적이면서 실천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뜻이다.

 

둠 슬레이어는 '악마 앞에 선 단독자'였다.​ <둠 이터널>의 주어진 상황은 주어진 상황이고, 플레이어는 그것을 주관적이고 개별적으로 마주해야 고난을 통과할 수 있다. 가이드, 난이도, 심지어 치트키도 있지만, 난이도와는 아무 상관 없는 플랫폼 구간에서 수없이 고통받았고 오롯이 내 힘으로 극복했다. 키르케고르와의 차이가 있다면, 둠 슬레이어는 자기 앞에 있는 존재를 냅다 죽여버린다는 점?

 

뿐만 아니라 노빅 왕도 둠 슬레이어에게 "오직 너 뿐", "너 하나에 불과하다"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이야말로 실존주의 아닐까?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고? 누가 그러는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