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킹덤>이 인기였다. 좀비가 산 사람들 오장육부를 뜯어먹는 와중에 해외 시청자들은 배우들의 갓에 열광했다.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지금까지 이 K-역사-좀비물의 열기가 현재 진행형이라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튼 잘생긴 배우들이 갓을 쓰고 역사 속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인기가 좋다. 기자 같은 '정통 사극파'(주로 아저씨)들이 몇 년째 일본 NHK 사극의 고증이 얼마나 대단한지, KBS <태종 이방원>은 어떤지 떠드는 사이에 '갓' 신드롬은 도도하게 해외로 전파됐다.
그중 제일은 단연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케이퍼 무비나 스파게티 웨스턴에 가난한 조선 농민의 궐기 한 스푼을 첨가한 이 영화의 백미는 귀공자 조윤(강동원)이다. 자기 어깨보다 넓은 과잉된 갓을 쓰다가 칼질을 하는 모습은 기품이 흐르다 못해 넘쳐서 남자가 봐도 기가 막힌다. 이렇게까지 떠들었으니 사진 한 장 안 보고 갈 수 없다.
2022년,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갓' 조선(중의적으로 쓴 표현 맞다) 신드롬에 반응하였으니 이름하여 비주얼노벨 <수호신>이다.
<수호신>은 프랑스에 기반을 둔 인디게임 스튜디오 노모어 500(No More 500)이 만든 비주얼노벨이다. 무과에 급제한 선비 유리가 고향 양동(아마 경주 양동마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한다)으로 발령받아 정체 불명의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플레이어는 유리의 시점에서 7일에서 8일 동안 마을 사람들을 취조하고, 그 뒤에 드리운 미스터리를 해결해야 한다.
장르적 특성에 알맞게 플레이어는 가만히 앉아서 대화를 읽다가, 중요한 분기에 다달아서는 몇 가지 선택지만 고르면 된다. 마냥 유리를 도와주기만 하는 착한 김 대감은 유리를 전격적으로 지지해주고, '관상 사이언스'에 따라서 피하고 싶은 사또는 유리에게 수사의 전권을 맡겨놓고는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갓을 쓴 유리는 한양에서 정규 훈련을 받은 뒤 금의환향했지만, 고향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수호신>은 한국의 민담에서 영향을 받은 게임인데, 스포일러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제목 자체에서 언급되듯이 '수호신'이 등장한다. 그 수호신의 조언을 잘 듣고 사건의 맥을 짚다 보면, 그러니까 게임적으로 다회차 플레이를 하다 보면 '상상도 못한 정체'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수호신>에서 "범인은 바로 당신!"과 같은 짜릿한 추리의 카타르시스는 없다. 미스터리한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은 추리물이라기엔 비논리적인데 플레이어로 하여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구나'라는 무기력함까지 안겨준다. 유리는 수 건의 살해 현장에 찾아가지만 과학수사가 발달하기 이전 시대라 그런지, 상당히 허술하다. 주변 인물 취조 과정도 <베리드 스타즈>처럼 선택지에 따른 변화가 없이 밋밋하다.
도리어 <수호신>은 플레이어를 승려나 박수무당에게 안내하면서 비논리적인 전설 영역에서 이야기를 풀게 만든다. 그러나 알쏭달쏭의 깊이는 생각보다 얕다. 기자는 정체 불명의 여인이 영화 <곡성>의 '무명'만큼이나 플레이어들을 헷갈리게 만들거나 유리가 모함을 당하는 시나리오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수호신>은 프랑스 회사가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출중한 조선의 묘사를 보여주었다. 조선을 가지고 무례한 장난을 쳤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큰 부담 없이 즐기기에 좋았다.
한자 양(良)과 동(洞)을 오늘날 쓰는 것과 반대 순서대로 쓰는 것과 같은 디테일부터, 등장인물의 복장, 민담에 대한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충실하게 담겨있다. 이만하면 합격점을 줄 만하다. 크레딧에 한국인의 이름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개발사가 한국적 느낌을 묘사하기 위해서 따로 조언을 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도 모든 것을 '고증'했다고 하기엔 부족한 지점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리가 고향 양동으로 돌아와 친구들을 주막에 불러놓고 소박한 술자리를 가지는 장면이다. 여기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 윤복은 삼계탕을, 고아원 때부터 동고동락한 수아는 수정과를 주문한다.
농업진흥청에 따르면, 닭백숙에 인삼을 넣는 행위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야 발견된다. 또 계피나 생강이 들어간 수정과는 아주 귀한 궁중음식으로 반가(班家)에서도 먹기 쉽지 않던 음식인데, 주막에서 판매하는 것은 설정 오류에 가깝다. 또 <수호신>의 시공간적 배경이 조선의 영남이라면, 야심한 밤에 젊은 미혼 남녀가 주막 평상에서 술자리를 갖는 것도 그다지 일반적인 장면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수호신>은 '판타지'라던지 '대체 역사'의 방패 뒤에 숨어서 수용자로 하여금 공분을 사게 할 범주에 있지 않았다. 방영을 중단한, 어느 구마 의식 드라마에서 충녕대군이 교황청을 만나 월병에 피단을 먹는 장면처럼 말이다. 기자가 역사 고증 대법관은 당연코 아니며, 이 리뷰 또한 다분히 개인적 시선에서 쓰고 있지만, <수호신>에는 한국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이 곳곳에 묻어나서 응원하고 싶다.
19,500원의 정가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게임이 나올 때 팍팍 밀어줘야 나중에 미국의 서커 펀치가 소니의 도움을 받아 만든 <고스트 오브 쓰시마> 같은 게임이 나올 만한 토대가 다져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