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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리뷰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게임, ‘할로우 홈’

한정 데모 버전 체험기

방승언(톤톤) 2024-09-04 10:08:08
2년 하고도 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지속한 기간이다. 에너지 패권을 쥔 대국과 서방 세계의 수 년간 갈등에 영향을 안 받은 국가를 찾기가 더 힘들겠지만, 언제나 망각은 우리의 타고난 권리다. 한 때 모두의 가슴을 내려앉혔던 전쟁은 이제 오래 전 들은 8촌 어른의 부고 만큼 흐릿하다. 그런 일이 있었더랬지, 안타깝기도 해라. 벌써 2년이 넘었다고?

전쟁 밖의 대부분이 열심히 전쟁을 잊는 동안, 그 복판을 살아야 했던 누군가는 동족을 덮친 참상을 그러모아 게임 한 편을 내기로 했다. 2025년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할로우 홈>은 우크라이나 개발사 트위게임즈가 개발 중인 실화 바탕의 아이소메트릭 어드벤처/RPG 타이틀이다. 마리우폴 포위공격을 겪은 현지인들의 사연을 바탕으로 게임은 만들어졌다.

게임스컴 2024에 출품한 한정판 데모 버전을 개발사로부터 제공받아 체험했다. 작품은 차가운 직설로 우크라이나가 겪은/겪고 있는 현실을 그리지만 다큐가 아닌 게임으로서의 자각, 전시가 아닌 체험으로서의 정체성에 타협 없이 분명한 태도다.



# 깊이 있는 비선형적 RPG

이야기는 의사 어머니와 군인 아버지를 둔 소년 ‘막심’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제작진에 따르면 게임은 <디스코 엘리시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RPG와 어드벤처가 혼합된, 텍스트 의존성이 높은 게임 메카닉에서 그 영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을 비롯한 장르 내 다른 여러 게임)과 마찬가지로, 게임 중에 만나는 사건들은 비선형적 구조를 띠고 있으며 그 해결 루트에 따라 주인공과 인물들의 상황 및 상호 관계가 변할 수 있다.

주인공 내면의 자아들이 각자 별개 인물들처럼 상호작용하며 이야기를 이끄는 <디스코 엘리시움> 특유의 메커니즘까지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다. 다만 주인공 막심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상황 대처의 방향이나 가능성이 결정되는 구조에서는 두 게임의 공통점을 느낄 만하다.

막심에게는 사회성, 감성, 주의력, 부정직, 사고력, 자신감, 손재주, 운동능력 등 총 8개 ‘스킬’의 주어진다. 캐릭터 레벨은 존재하지 않으며 퀘스트에서 얻은 경험치를 각 스킬에 직접 투자해 스킬 레벨을 높이는 방식을 따른다.


퀘스트 수행 시 주어지는 행동/대사 선택지 중 일부는 어울리는 스킬 레벨을 갖춰야만 선택할 수 있다. 가령, 약국 앞에 늘어선 대기줄을 제치고 인슐린을 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막심은 어른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동정을 살 수도 있다. 이때 각각의 선택지는 2단계 이상의 ‘부정직’ 혹은 ‘감성’ 레벨을 요구한다.

스킬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과거 선택, 보유한 정보나 아이템, 그리고 NPC들과의 관계에 따라서도 퀘스트 수행 방식은 모두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을의 걸인이 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도와주었다면, 나중에 해당 인물로부터 중요한 고철을 공짜로 얻어낼 수 있다.


플레이어가 유의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 메커니즘은 ‘액션 포인트’(AP)와 ‘결의’(Resolve)다. AP는 매일 총 10점이 주어지며, 특정 선택지들은 AP를 일정량만큼 요구한다. 따라서 하루 중 맞닥뜨리는 사건 중 무엇에 중점을 두고 AP를 배분할 것인지 또한 본편에서 중요한 전략적 고려 사항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결의’는 살아남고자 하는 막심의 의지를 의미하며, 부정적 사건을 겪을 때 소모된다. 해당 수치가 0까지 감소할 경우 ‘게임 오버’되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관리하는 것 또한 본편 게임플레이에 긴장을 부여하는 핵심 메카닉으로 예상된다.



# 먹먹한 현실성으로 가득한 작품

주인공 막심은 2014년 돈바스 전쟁에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사는 옆집 소녀 ‘비카’와 단짝으로 지낸다. 비카와 함께 학교를 빼먹고 동네 오락실을 찾는 평범한(?) 일상으로 게임은 시작한다.

본격적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인 1일차 구간의 게임플레이에서도 <할로우 홈>이 전달하려는 현장감은 형성된다. 이것은 개성 뚜렷한 인물 묘사에 기대는 바가 크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숙한 독서광 비카, 교양있고 자상한 수위 올렉시, ‘상남자’ 전직 군인 코스티아닌 등 여러 인물이 양감 있게 등장한다.


엄밀히 따져 이들은 그 설정에서 다소의 전형성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각자 구체적인 배경과 뚜렷한 주관을 지닌 채 생동하는 인물로 그려져, 향후 이야기 전개에 따른 상호 간 다이내믹과 각자의 행동/태도 변화에 호기심을 갖게끔 한다.

연출적 다채로움도 채워 넣었다. 게임 안에서 하루가 지날 때마다 등장하는 일러스트와 상황 설명, 스토리에 맞춰 마련된 별도의 캐릭터 애니메이션, 간헐적 미니게임 등이 동원되어 플레이에 꾸준한 흥미를 유발한다. 게임이 다룰 충격적 하루하루를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연출적 장치가 될 듯하다.



# 유년기의 끝

이와 함께 몰입감을 강화하는 것은 시종일관 문학적 터치를 잃지 않는 텍스트다. 특히 모두가 반신반의하던 침공이 정말 벌어지고 마는 2일차를 기점으로, 주인공 막심의 내면 묘사에서 이 지점이 두드러진다.

어린 주인공에게서 일상을 박탈하고 시련을 안기는 유형의 성장물에서는 흔히 독자를 위한 정서적 ‘적응 기간’을 따로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 완충을 <할로우 홈>은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소꿉친구와의 작은 일탈에 행복해하던 소년이 하루아침에 현실적 생존주의자 ‘청년’으로 탈바꿈하는 급진적 전개는 다소 당혹스럽지만 그 의외성을 통해 픽션과 대비되는 섬뜩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게임은 ‘엄마의 귀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란 주인공의 아동적 희망까지 모순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안타까움을 극대화한다. 이처럼 게임은 비극의 단순 나열에 그치는 대신 문학적 역량을 동원해 비극, 좌절, 충격의 정서를 강화한다.

게임의 풀 버전에 기대를 갖게 만드는 또 하나의 결정적 요소는 퀘스트 내러티브의 현실성과 깊이다. 공습 당일 엄마의 전화를 받은 막심이 조언에 따라 가장 먼저 취하는 행동은 화장실로 가 욕조에 물을 받고, 그 곁에 잠자리까지 마련하는 것이다.


전자는 물 공급이 끊기는 상황에 대비하는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가 않다. 이것은 ‘최소 두 개의 벽’ 안쪽에 잠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전시 생존 수칙에 의한 것이다. 공습으로 외벽이 깨질 경우 벽의 잔해를 ‘두 번째 벽’이 막아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임은 진짜 전쟁을 겪지 않고서는 쉽게 상상해내기 힘든 디테일을 통해 유저를 곳곳에서 먹먹하게 만든다. 개발진이 우크라이나의 실제 전쟁 피해자들로부터 사연을 수집하고 재구성해 퀘스트를 만들었다고 알려진 만큼, 본편에서도 <할로우 홈>은 우리 모두 알아야 할 전쟁의 현주소를 절절하게 전해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