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대중문화를 이야기할 때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제외하기란 어렵다. <인디아나 존스> 이전에도 고고학 소재의 대중적 모험물은 많았고, 레퍼런스로 여겨지는 작품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세계적 인기와 상징성, 영향력 측면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솔로몬왕의 광산>, <잉카의 비밀> 같은 동일 테마의 선대 작품들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콤비는 서스펜스, 액션, 유머, 미스터리 등 모든 요소에서 당대의 표준을 뛰어넘는 종합 오락물을 만들어 냈다. 지성과 매력, 무력까지 겸비한 주인공 ‘인디아나’ 그 자신처럼 영화도 팔방미인이었던 셈이다. 시리즈가 무수한 ‘인디아나 키드’를 낳은 것도 당연한 순서였다.
그중 게임계에서 가장 큰 이름을 꼽자면 단연 베데스다 CEO ‘토드 하워드’이다. 시리즈 ‘광팬’을 자처하는 하워드는 원작에 충실한 AAA급 타이틀을 개발하겠노라 수년 전 선언했다. 그리고 12월 6일 오늘 그 결실인 <인디아나 존스: 그레이트 서클>(이하 <그레이트 서클>)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더 나아가 이번 작품은 대작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MS의 Xbox사업부, 그리고 <스타필드>의 실패로 입지가 좁아진 제니맥스(산하 베데스다)로서도 중요도가 매우 큰 타이틀이다. 과연 팬덤의 만족과 베데스다의 명예 회복을 한 번에 기대할 만한 작품일까? 베데스다의 도움으로 미리 게임을 제공받아 직접 확인해 봤다.
<그레이트 서클> 개발을 맡은 건 베데스다 산하 ‘머신게임즈 스튜디오’다. <울펜슈타인> 시리즈로 사랑받는 머신게임즈는 스웨덴에 위치해있으며, <스타필드>를 만든 미국의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와는 ‘한 지붕 두 가정’으로 직접 연관이 없다. 장르나 테마로 봐도 두 게임은 동일 선상에 놓고 견주기 어색할 만큼 상이한 타이틀이다.
그러나 개발 방향성 측면에서 공교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어 함께 언급할 만하다. 수천 개 행성 구현을 셀링 포인트로 내세웠던 <스타필드>는 그 막대한 공간을-현실에 충실하게도-대부분 덩그러니 비워두면서 빈축을 샀다. 그나마 행성 당 한두 개씩 놓여 있는 건물들의 레이아웃마저 일부 ‘복붙’한 사실이 알려지며 추가로 비판받았다.
<그레이트 서클>은 정반대의 노선을 따른다. 맵을 온통 채우고 있는 온갖 소품과 구조물은 그 다채로움을 가끔 감당하기 어렵게 느껴질 정도다. (프롤로그를 제외한) 첫 스테이지인 대학교 박물관 맵에서부터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스토리 진행에 중요한 전시품과 같은 요소들은 물론,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으면 확인하기 어려운 각종 인쇄물, 비품의 디테일까지 정성스레 구현한 모습은 게임의 전반적 지향점을 보여준다. 영화 원작을 게임 화면으로 옮겨놓기 위해 개발진은 1930년대의 시대상, 그리고 작중 지역별 문화와 환경까지 고려한 소품들을 환경에 가득 채워뒀다.
숨막히는 디테일을 내내 보여준다
‘무대’를 훑어봤으니 이제 ‘배우’들을 살필 차례다. 주연이 많이 바뀌었던 <007> 시리즈와 달리, ‘인디아나 존스’는 (그의 젊은 시절을 그린 스핀오프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해리슨 포드가 주연을 맡았다.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라는 공식이 어렵지 않게 성립하는 이런 상황에서 그의 디지털 재현은 개발진의 큰 숙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머신게임즈는 숙제를 놀라운 수준으로 해냈다. 배우 특유의 비죽거리는 미소와 느끼하지만 매력적인 표정을 정확히 묘사해 낸다. 얼굴이 잘 알려진 익숙한 인물의 재현일수록 닮지 않은 부분을 쉽게 짚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일치율은 소름 끼칠 정도다.
제작진의 또 다른 ‘신의 한 수’는 영미권 게임 성우계의 스타 ‘트로이 베이커’를 기용한 점이다. 그간 개성 강한 여러 인물을 연기해 온 그지만, 실존 인물의 개인어(idiolect)를 재현하는 솜씨까지 탁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소소한 기쁨이다. 웅얼거림이 심하면서도 전달은 확실한 포드 특유의 발음과 어투를 완벽하게 모사한다.
'아는 얼굴'인데도 어색함을 찾기가 어렵다
다른 인물들의 표현에서도 완성도가 높다. 크레딧을 보면 많은 실제 배우들이 리얼한 연출을 위해 목소리 연기와 모션 캡쳐에 동참한 것을 알 수 있다. 머신게임즈는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도 인물 연기를 집중적으로 활용해 ‘명장면’ 여러 개를 연출해 낸 전력이 있는데, 이번 게임에서도 그 장기를 또 발휘했다.
다른 게임에서라면 대사 몇 줄로 표현하고 넘길 법한 장면들에서도 전신을 사용하는 모션 연기가 동원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덕분에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고고학 미스터리’ 스토리라인이 더 명료하게 이해되는 효과가 있다.
표정 연기를 감상하는 맛이 있다
개발진에 따르면 <그레이트 서클>은 장르 구분상 ‘액션 어드벤처’로 구분되지만, 동종의 다른 게임들과 비교하면 ‘어드벤처’의 비중이 더 높다. 월드 구성으로 따지면 세미 오픈월드 게임으로 볼 수 있다. 스테이지별로 하나의 커다란 맵이 주어지며, 그 안에서 메인 미션과 서브 미션을 원하는 순서대로 즐기면 된다.
콘텐츠 전개는 실제로 어드벤처 메카닉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해결할 과제(미션)가 먼저 주어지면, 여러 장소를 들쑤시며 추리에 필요한 단서를 수집한 뒤, 모인 단서를 토대로 정답을 도출해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가 크고 작게 반복된다.
그 과정을 미스터리, 퍼즐, 이야기가 채운다. 인디아나가 추적하는 핵심 임무는 전 세계 주요 종교 유적을 일렬로 연결했을 때 지구상에 그려진다는 거대한 원, ‘그레이트 서클’의 비밀이다. 더 정확히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여기에 관심을 품은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고자 음모의 한가운데 뛰어든다.
'그레이트 서클'을 설명하는 인디아나. 빌린 립스틱으로 찍은 점들이 리얼해 인상깊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두 군국주의 세력을 상대하며 고대의 비밀을 파헤치려다 보면, 더 다양한 사건을 마주치는 게 자연스럽다. 실제로 인디아나 주변에는 납치된 고고학자, 바티칸 사제의 비밀 금고, 피라미드 발굴 현장에 침입한 도굴꾼 등의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하며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높이 살 만한 사실은 이들 콘텐츠 대부분이 단순한 ‘심부름’이나 ‘수집’ 형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각자는 모두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으며 앞서 이야기한 고퀄리티의 배우 연기 및 감각적 컷씬, 공들여 쓴 대사 등이 곁들여지며 하나하나 집중력 있게 펼쳐진다.
서브 콘텐츠마다 별도의 레벨 디자인 혹은 퍼즐 메카닉이 제공된다는 사실도 눈길을 끈다. 간단한 길 찾기에서부터 텍스트와 숫자를 이용한 수수께끼까지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매번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흥미를 유발하고 생각할 거리를 안길 정도는 된다.
작은 미션에도 수작업 콘텐츠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레이트 서클>에서 액션 메카닉은 주로 수단적인 역할을 한다. 꼭 들어가야만 하는 유적, 결정적 증거가 숨겨진 적들의 막사, 구출 대상이 있는 초소, 경비가 삼엄한 발굴터 등에서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을 곁으로 치워두는 데 활용된다.
원작의 액션 스타일에 맞춰, 전투는 총기를 최대한 배제한 채 주먹과 채찍, 그리고 잡동사니(?)들로 이뤄진다. 총기가 표준으로 자리 잡은 일인칭 액션 장르에서 이런 근접전 위주의 액션은 참고 사례가 적고 구현에도 여러 난점이 있다. 인디아나처럼 다양한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 설정이라면 전투의 다양성을 챙기기도 어렵다.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격투 시스템을 되도록 다각적으로 구성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막기, 회피, 강공격, 밀기, 걷어차 쓰러뜨리기 등의 육탄전 기술에 더해, 트레이드마크인 채찍으로 적의 무장을 해제하거나 균형을 무너뜨리는 등의 묘기를 구사할 수 있다. 주변의 사물을 손에 들고 직접 때리거나, 적에게 던져 맞추는 등의 기믹도 존재한다.
총기는 우스울 정도로 약하다. 최고 난도 기준에서 적들은 모두 슈퍼 군인이라도 되는 양 10발 가까이 되는 총을 맞아야 쓰러지곤 한다. 더 나아가 장전된 탄을 모두 쓰고 나면 ‘재장전’도 불가해 총을 버려야 한다. 적들에게서 총기를 비교적 쉽게 노획할 수 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밸런스겠지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적을 상대할 때 전투보다 유용한 것은 잠입이다. 적의 시야와 가청 범위를 피해 후방으로 접근한 뒤, 사물로 가격하면 대부분의 경우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잠입 메카닉은 정교하지 않아 긴장감이 떨어진다. 바로 뒤에서 아군이 얻어맞아 쓰러지는 소리에 반응하지 않거나, 보일 만한 거리에서 의심만 하고 넘어가는 적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일부 특수한 적은 기믹이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투 메커니즘은 다소 난해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적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거나 발판 아래로 떨어뜨리는 등의 환경적 요소를 자주 사용하게 유도하는 방식으로 전투의 다이나믹을 살리려고 했지만, 여전히 어색하고 부족한 느낌은 지우기 힘들다.
이런 디자인에는 ‘원작 존중’의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수긍할 구석은 있다. 인디아나가 전문 총잡이처럼 굴거나 지나치게 훌륭한 무도가로 활약한다면 당장 어색함을 느낄 만한 원작 팬은 많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원작의 테이스트를 살리려는 노력을 게임플레이에서 계속 만나게 된다. 주인공이 의외의 발견을 하거나 위기에 처하는 순간에 맞춰 불안하게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 선율, 썰렁하고 싱겁지만 왠지 정감 가는 농담들, 특별한 목적도 없는 인물 간의 투덕거림은 모두 <인디아나 존스> 원작, 더 나아가서는 당대의 영화 트렌드를 기분좋게 회상시킨다.
문제는 원작 존중의 노력이 게임 본연의 재미와 잘 어우러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게임 본연의 재미’란 유저가 자기 의지에 따라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인디아나 존스>는 전술한 전투뿐만 아니라 탐험, 캐릭터 육성, 그리고 가장 중요할 퍼즐 풀이 등 핵심 요소에서 유저에게 효능감 있는 자유도를 부여하는 데 실패한다.
가령 게임에는 ‘모험 포인트’를 모아 스킬을 획득하는 시스템이 있다. 이 ‘모험 포인트’는 서브 미션을 깨거나, 비밀 장소를 발견하거나, 유의미한 대상을 사진으로 찍는 등의 행위로 얻는다. 궁극적으로 ‘모험가’인 인디아나에게 잘 어울리는 낭만적 요소다.
하지만 이렇게 포인트를 모아 해금하는 스킬들은 정작 전투에 편중되어 있어 그 의미가 퇴색하는 기분이 든다. 유저 마음대로 캐릭터를 성장시킬 방법이 존재는 하지만, 정작 그 성장이 비중이 높은 ‘어드벤처’가 아닌 ‘액션’에 몰리면서 다소 김이 빠진다.
과반수 스킬이 전투 관련이어서 오히려 만족감이 덜하다
앞서 높이 평가한 원작/캐릭터 재현 역시 정작 플레이의 핵심인 ‘모험’과 ‘수수께끼’에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것도 단점이다. 여러 컷씬에서는 원작을 보는 듯한 재현율에 감탄이 나오지만, 유저가 주도권을 쥐고 능동적으로 플레이하는 영역에서는 같은 수준의 감동을 느끼기가 힘들다.
컷씬을 제외한 게임플레이에서 인디아나의 고고학 지식이 거의 발휘되지 못하는 점이 가장 아쉽다. 원작에서 그의 고고학 지식은 남들은 놓칠 단서들을 연결해 문제를 돌파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며, 그러한 과정에서 단순한 모험가가 아닌 ‘고고학 교수’ 인디아나의 특별한 매력이 빛난다.
게임에서 인디의 이런 모습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 스토리 전개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퍼즐 풀이와 같은 능동적 활동에서는 활용이 제한적이다. 인디아나가 고고학적 지식을 종종 읊조리는 대사는 있지만, 정작 그 지식이 결정적 단서로 쓰이지는 않는 것이다. 퍼즐들은 그보다는 ‘게임 문법’에 입각한 접근으로 해결 가능하게끔 디자인되어 있다.
인디아나가 지식을 자랑하는 장면은 꽤 많고, 그것이 스토리상 중요한 경우도 잦다.
그러나 유저가 직접 나서는 활동에서는 그런 지식이 활용되지 않는다. 사진의 퍼즐 역시 메카닉적으로는 흥미로웠지만, '고고학 모험가의 낭만'은 연출되지 않았다.
이처럼 <그레이트 서클>은 재미 창출과 원작 재현 양쪽에서 나름의 아쉬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먼저 게임 메카닉적으로는 액션 쾌감이나 성장 체감이 둔하다. 원작 재현의 측면에서는 인디아나의 ‘고고학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이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에 잘 갖다 붙지 못한 사실이 가장 큰 단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저 비판하고 외면하기엔 아까울 만하다. 40년 묵은 영화를 재현하는 동시에 현대적 게임 디자인을 고스란히 추구하기란 쉽지 않았을 작업이다. 그 난해한 절충의 끝에 몇가지 큰 균열이 발생하고 만 것을 얼마간 이해할 만하다.
그렇게 발생한 틈을 되도록 채워 넣기 위해, 개발진은 원작에서 튀어나온 듯한 주인공, 숨 막히는 디테일, 웅장한 스펙터클, 그리고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연출을 통해 감상하는 게임으로서의 가치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시청각적 만족감을 통해 다소 허술한 게임플레이적 아쉬움을 덮어 놓을 수 있는 유저라면, <그레이트 서클>을 즐길 수 있을 듯하다.
초점을 달리 한다면 즐길 방법이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