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밸브는 리스트 하나를 공개했습니다. 자체 운영하는 온라인 게임 데모 축제 ‘스팀 넥스트 페스트’에서 가장 많이 플레이된 작품 리스트입니다. 50개 게임이 이름을 올렸는데, 기자가 찾던 이름은 아쉽게도 없었습니다. 크래프톤 산하 플라이웨이 게임즈의 <왈츠앤잼>입니다.
<왈츠앤잼>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국내 업계에서 보기 드문 유형의 게임이란 점도 그중 하나입니다. <왈츠앤잼>은 RPG 요소를 지닌 탑다운 어드벤처 정도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해외에서는 <젤다> 시리즈의 영원불변하는 영향력 아래 <튜닉>, <데스도어> 등 그 명맥을 잇는 수작들이 종종 나와 주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국내로 한정하면 해당하는 작품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작 노하우 확보가 어려웠을 텐데 그래도 도전했다는 점에서 이미 ‘호감 스택’이 쌓였습니다. 실제 체험은 어땠는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데모 버전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산뜻한 전개를 위함인지 <왈츠앤잼>의 스토리는 장황한 도입부를 생략한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아마도 저승인 듯한 장소에서, 아무래도 꼬마 유령인 듯한 주인공 ‘왈츠’가 관을 열고 깨어나면서 게임은 바로 시작됩니다.
게임의 스토리는 이후로도 노골적 설명 없이 세계관과 인물들을 얼핏얼핏 드러나는 식으로만 전개됩니다. 이러한 전개를 통해서도 짐작해볼 만한 사실은 꽤 많습니다. 플레이어는 왈츠가 ‘업타운’, ‘언더타운’ 등 저승의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 ‘티켓’을 모아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아마도 이야기를 더 진행하면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네온 간판, 아케이드 게임기 같은 현대적 요소가 주저 없이 등장하는 저승의 비주얼은 매력적입니다. 현실의 익숙한 사물이나 동물들을 참고해 만들어진 여러 귀여운 오브젝트와 캐릭터는 세계관의 윤곽을 대강 그려보게 해줍니다.
다만 <왈츠앤잼>의 월드 전반은 적잖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흡인력을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아마도 <왈츠앤잼>‘에서만’ 볼 수 있는 유니크한 요소가 적기 때문인 듯한데, 이것은 후술할 게임 자체의 약점과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왈츠가 죽으면 먼저 가 있던 잼이 마중을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왈츠앤잼>은 전투 외에도 월드를 탐사하면서 새로운 콘텐츠를 계속 발견하는 어드벤처 요소, 그리고 맵 기믹을 통해 이동을 고심하게 만드는 플랫포머적 요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 요소 전체를 관통하여 갖춰져야 할 미덕을 꼽자면 깔끔한 조작감일 텐데, <왈츠앤잼>은 관련하여 아쉬움이 거의 없습니다. 왈츠는 플레이어 의도에 맞춰 정확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시야·동작·상호작용의 정렬이 맞지 않는 등의 초보적 실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게임의 뛰어난 기본기는 레벨 디자인에서도 자주 확인됩니다. 데모 분량에서 만난 퍼즐과 플랫포머 메카닉은 모두 약간 싱거운 느낌을 주지만, 그래도 해결(통과)했다는 사실을 기뻐하기엔 충분한 수준의 절묘한 난이도적 절충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대중성을 크게 고려한 듯한 힘조절입니다.
전투에서는 귀여워 보이는 비주얼 뒤에 숨겨진 깊이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우선 <왈츠앤잼>의 적들은 그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각자 원거리 공격, 돌진 공격, 폭발성 범위 공격 등으로 행동 패턴과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이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상대해보면 버튼 몇 번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약해서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전투 콘텐츠가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게임은 적 유닛 하나하나의 강력함보다는 이들의 전략적 배치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노란 대포 형태의 적은 아주 느린 연사속도로 투사체를 발사해 그 자체로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에 여러 기가 나와 포위하거나 좁은 골목을 틀어막는 식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충분한 도전거리가 되어줍니다.
여기에 임시 발판, 집라인 등 특수한 맵 기믹도 전장에 더해지면서 순간적으로 빠른 사고를 요하는 전투 시나리오가 생각보다 많이 펼쳐집니다. 특히 주인공을 특정 공간에 기습적으로 가둔 뒤 다수의 적과 맵 기믹을 동시에 출현시켜 위기에 몰아넣는 전개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건 일종의 ‘미니 보스전’ 느낌도 줍니다. 덕분에 적 종류가 적은 편인데도 데모 플레이 내내 지루함을 느낄 새는 없었습니다.
다만 전투의 절대적 난이도는 앞서 이야기한 퍼즐, 플랫포머 콘텐츠와 마찬가지로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 더욱더 어려운 모험을 원하는 유저라면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대신 한층 복잡한 패턴을 지닌 보스전이 난이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줄 만합니다. 또한, 데모 분량을 지나면 게임이 훨씬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왈츠앤잼> 데모에는 장난감 칼과 용수철 주먹 등 두 가지 무기 겸 도구들이 등장하는데 이 둘에서 파생되는 콘텐츠의 유형이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전반적인 메카닉적 풍성함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칼과 주먹은 작동 방식부터 역할까지 크게 다릅니다. 먼저 장난감 칼은 기본적인 연속공격 능력에 더불어 적의 투사체를 칼로 쳐 되돌려보내는 일종의 ‘패링’을 할 수 있습니다. 용수철 주먹은 오브젝트나 적을 공격해 멀리 밀어내거나 오브젝트를 날려 적을 기절시키는 역할인데, 이를 적극 활용하면 일부 전투는 훨씬 더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칼과 주먹은 모두 길 찾기 퍼즐에서도 별도의 쓰임새를 발휘합니다. 칼은 간단한 장애물을 제거해 통과할 수 있게 해주고, 주먹은 발판이나 기타 장치를 움직여 갈 수 없던 장소에 도달하게 해주는 식입니다.
UI로 미루어 볼 때, <왈츠앤잼> 본편에는 칼과 주먹 외에도 다양한 도구와 무기가 더 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각자가 탐험과 전투 양면에서 어떤 활약을 보이게 될지,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퍼즐이나 전투의 양상은 또 얼마나 다양할지 기대가 모입니다.
이것은 데모에서 보여준 콘텐츠가 이미 충분했기 때문에 걸어볼 수 있는 기대입니다. 새 무기의 획득 시점을 고려해 해당 도구의 메카닉에 어울리는 흥미로운 전투 시나리오와 퍼즐, 새로운 적 유형 등이 고른 호흡으로 배치되어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처럼 많은 매력을 가진 게임이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왈츠앤잼>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미려하고 귀엽습니다. 그러나 다소 독창성이 떨어집니다. 대중적 친숙함으로 다가가려는 의도인 듯합니다. 흰 천을 뒤집어쓴 꼬마 유령 ‘왈츠’의 전형적 디자인(머리에 우뚝 솟은 금속성 고리가 그 쓰임새를 궁금하게 만들기는 합니다만)을 상징적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게임플레이에서도 같은 감상이 재현된다는 것입니다. 어디 하나 모자란 구석 하나 없을 뿐더러 심지어는 콘텐츠의 정교함에 종종 감탄이 나오기도 하지만, 다른 여러 게임을 제쳐둔 채 <왈츠앤잼>을 플레이해야 할 결정적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난 곳' 없이 지나치게 유순한 게임 기획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헬다이버스 2>의 에로우헤드를 비롯해 서구권 개발사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모토 중 '모두를 위한 게임은 누구를 위한 게임도 아니'라는 표현이 있는데, 어쩌면 <왈츠앤잼>은 이때의 '모두를 위한 게임'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문에 예시로 들었던 <데스도어>나 <튜닉> 같은 게임과 비교하면 더 명확히 짚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데스도어>와 <튜닉>은 정교한 레벨디자인, 만족스러운 조작감 등 완성도와 기본기 측면에서 <왈츠앤잼>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경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독보적 ‘날카로움'을 벼려두는 것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날카롭기 때문에 어떤 게이머들은 찔리고 베여 떠나갈지 모르지만, 그만큼 목표 소비자층을 파고드는 힘은 훨씬 강합니다.
먼저 <튜닉>은 ‘고전 액션 어드벤처에 바치는 헌사’로 종종 평가되는데, 이것은 고전 타이틀에 흔했던 '숨겨진 요소' 메카닉을 집착적으로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튜닉>을 제대로 즐기려면 매 순간을 평범하게 넘길 수 없고 항상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피곤하지만 그만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메카닉인 셈입니다. 한편 <데스 도어>의 경우 종종 <다크소울>에 비견하는 유저가 있을 만큼 어렵지만 짜릿한 전투가 특징입니다. '어려운 액션 게임'의 장단점은 부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들 게임과 비교했을 때, <왈츠앤잼>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아직 빠져들 만한 게임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귀엽기는 하나 캐릭터성을 느끼기는 힘든 두 주인공 왈츠와 잼도 이 지점에서 큰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과연 본편은 유저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치명적’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