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레볼루션>은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연애 시뮬레이터다. 츠나마요 등 실제 모델이 출연해 연기했다. 츠나마요는 과거... 그 츠나마요가 맞다.
플레이어는 이들 모델과 가상세계에서 데이트를 하고 영상통화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다. VR 기기를 착용하면 360도로 모델과 주변 데이트 환경을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게임을 진지하게 플레이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게임을 할 때는 진지하게 임하는 게 중요하다. 이게 내 직업윤리다. 대충 하다가 말 거면 뭐하러 바이라인 달고 기사를 쓰나. 나는 <러브 레볼루션>에서 진지하게 대쉬를 받았고, 썸을 타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선택지를 골랐다. 그렇다. 인정하기 싫지만 <러브 레볼루션>은 꽤 설렜다. 그녀(들)은 내게 전화를 하고 카톡을 보내고 앙탈을 부리고 화도 낸다.
그녀(들)은 내게 어디 놀러 가자고 하고, 구두를 골라 달라고 하고, 식사 메뉴를 묻는다.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가 먼저 질문해 주기도 한다. 고작 양자택일 내지는 사지선다 답 안에서 나는 머리를 싸맸다. 짜고 치는, 답은 정해져 있는 판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어차피 감정이란 화학작용에 불과하다는 냉소를 한껏 주워 삼키고, 실패 없는 시뮬레이션에 빠져들었다.
어려울 게 없는 게임을 쭉쭉 밀다 보니 이야기가 퍽 재미있다. 위의 사진에 등장하는 '장여빈'이라는 캐릭터는 주인공의 과외 학생이었다. 이후 스무살이 되어 알콩달콩 관계를 다져나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클리셰 덩어리 시나리오에서 묘한 즐거움이 뿜어져 나온다. 개발사는 이런 장르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게이머가 현실에서 성기사, 마법사, 군주, 시장, 대통령, 사령관이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나도 게임 밖에서 그녀(들)과 잘 되기 어렵다. <러브 레볼루션>에 출연한 모델이 대단한 스타들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연애 시장에서 내 가치와 그간의 역사를 되짚어봤을 때 그 정도 계산은 선다. 옆자리 선배가 예전에 신입이었던 내게 해준 말이 있다. "게임 기자는 결혼정보회사 등급표의 맨 꼴찌"라고.
다른 회사의 선배 기자가 썼듯, 일반적으로 '예쁜 여자가 나한테 말을 걸 리가 없다'. 그런데 나한테 먼저 영상통화를 걸어오는 그녀(들)! 아무튼 당신이 라노베 주인공 같은 먼치킨이거나, 적어도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시간을 써가며 <러브 레볼루션>이 제공하는 가상 연애 경험을 만끽할 필요 없을 것이다. 말했듯 게임이 제공하는 경험은 클리셰의 범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브 레볼루션>의 뻔한 미연시 연출에서 윈도우의 어느 레지스트리 파일처럼 잠자던, 좋았던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그 편린은 럴커의 가시뼈처럼 튀어나와 스마트폰 액정을 보며 실실 쪼개던 나를 찌르고 갔다. 아, 나도 순정이 있었지, 맙소사, 판데믹과 사회적 거리 두기가 나를 미치게 만든 게 분명하다.
현실은 <러브 레볼루션>과 많이 다르다. "뭐 바뀐 거 없어?"라고 천진하게 묻는 그녀의 얼굴 옆으로 정답이 떠오르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잘못된 대답에 속상한 그녀를 달래기 위해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도 없다. 당연히 선형적이지도 않다. <러브 레볼루션>의 주인공은 다시 하면 된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다. 재화만 충분하다면 몇 번이고 시간을 돌려서 만점짜리 선택지를 고르면 되니까.
그렇게 <러브 레볼루션>은 스테이지가 진행될수록 깊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와 함께, 더 많은 재화 소비를 유도한다. '그녀와 더 진도를 나가려면 돈을 좀 쓰시죠, 선생님'이라는 솔직한 제안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기자는 아직 연애 시뮬레이션에 P2W 모델을 적용한 게임을 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
장범준은 노래했다. '사랑 때문에 노랠 연습하는 건 자연의 이치'라고. <러브 레볼루션>에서 사랑 비슷한 걸 해보려면 결제를 해야 했다. 이는 자연의 이치라도 되는 양 당연하게 제시됐다.
<러브 레볼루션>에서 데이트를 하려면,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깨려면 해당 챕터마다 요구하는 스타일 점수를 달성해야 한다. 뒤로 갈수록 뽑기를 통해 고등급의 패션 아이템을 맞춰 게임이 요구하는 스타일 점수를 올려야 한다. 이 아이템은 5개의 분류가 있고, 등급이 있고, 강화할 수 있으며, 다른 시나리오와 공유되지 않는다. 그런데 목표 점수는 뒤로 가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쯤 오면 배달 음식 시켜 먹자고 광고 시청을 유도하던 과거가 풋풋하게 느껴진다. 엔드 콘텐츠 지점에서 플레이어는 데이트에 입장하기 위해 3성 반지를 뽑아서 강화해야만 한다.
'러브'를 하려고 3성 반지를 맞춰야 한다니, 이 얼마나 차가운 상황인가. 더 많이 가져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는 메시지일까, 아니면 모바일 게임 산업의 '사정'일까? 생각하면서 3성 반지를 뽑으려고 끊임없이 터치를 눌렀지만, 허무하게 다이아(뽑기 재화)를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96%까지 온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3성 반지를 띄우지 않으면 결말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현자타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문득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정말 모르겠다. 나는 고민 끝에 그녀(들)을 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