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코에이의 고전 RPG <대항해시대 2>를 MMORPG로 재탄생시킨 게임이다. 발표와 함께 옛 향수를 간직한 게이머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개발은 한국의 모티프가 주도하고 있다. 모티프는 라인게임즈의 소속으로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의 이득규 디렉터가 이끌고 있다. 코에이테크모와의 두 번째 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게임은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 지난 1월 말 CBT를 개시했다. CBT 모집 방법 역시 화제가 됐는데, '항해 능력 검정 시험'에서 80점 이상을 받은 사람만 테스터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CBT 모집 방식이었다. 이득규 디렉터는 본지 인터뷰에서 "정형화된 세팅을 제공하기보다는 우리가 기대하는 플레이테스트의 결과를 기대하기" 위해서 허들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공개된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시리즈의 팬을 자부한 기자도 애를 먹었다. 이런 불편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다. 게임의 방향성이 '재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CBT 단계로 게임의 모든 것에 대해서 논하기에는 이르지만, 이러한 기획의도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에는 '양산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울 듯하다. 이 게임은 독특하고 난해하다. 이러한 특징은 과거 <대항해시대 온라인>이 그랬듯 독창적 재미를 줄 수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더 나은 결과물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CBT에서 느낀 감상을 정리해봤다.
기자가 체험한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재현에 초점이 맞춰진 게임이었다. 재현을 위한 시도는 여러 차원에서 구현됐다.
1. 원작 <대항해시대 2>
2. MMORPG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환경
3. 실제 지구 & 역사 속 대항해시대
1. 원작 <대항해시대 2>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제독이 되어 선단을 경영하는 게임이다. 조안 페레로, 카탈리나 에란초, 알 베자스 등 <대항해시대 2>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골라서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세 제독의 일대기는 원작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확인했다. 조안 페레로는 프레스터 존 왕국을 찾아 떠나기 위한 맷집을 기르고, 알 베자스는 시작부터 빚더미를 떠안는다.
원작의 일부 요소는 상황에 맞게 편집된다. 가령 조안 페레로의 일대기에서 황태자 알베르토의 행방 불명과 암살자 안토니오 칸과의 대결 구도는 굉장히 빨리 등장한다. CBT 체험 정도로는 그 뒤로 다른 줄거리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원작의 인물적, 서사적 요소의 큰 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다른 제독들의 연대기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한다.
HEX 타일에서 벌어지는 턴제 베이스 전투 역시 원작을 재현하면서 치명적인 문제점을 보완하는 데 초점을 맞춘 듯하다. <대항해시대 2>에서는 주인공에게 고급 장비를 맞춰준 뒤, 기함에 선원을 채워 상대편의 기함에 일기토를 걸어 승리하는 메타가 굉장히 유용했다. CBT의 <대항해시대 오리진>도 백병전의 효율이 포격전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시작부터 기함을 털어서 끝내버리지 않도록 몇몇 장치를 두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원군의 기함을 쓰러뜨리면 원군은 모두 퇴각하지만, 일반적인 적의 기함을 무너뜨려도 전투가 끝나지 않도록 설계됐다. 또 턴마다 조류의 변화에 따라 배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한편, 자동 전투보다 직접 조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커맨드를 선보이는 것을 어림잡아 볼 수 있다.
쾌속 플레이를 일일 몇 회 무료로 제공한다거나, 한 수 무르기 옵션이 존재하는 등 세부 요소에서는 디렉터의 전작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의 터치가 느껴진다. 제독과 항해사들의 각종 스킬을 깊이있게 실험해볼 시간은 없었지만, 레벨 업을 충분히 시켜준다면 캐릭터들의 스킬은 분명히 전황을 바꿀 정도로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보인다.
2. MMORPG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환경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앞선 MMORPG <대항해시대 온라인>을 상당 부분 참고했다. 3D 그래픽의 세계의 곳곳에 항구가 존재하는 월드는 <대항해시대 온라인>과 흡사하다. 제독의 연대기에서도 <대항해시대 온라인>에 대한 일종의 존중을 찾아볼 수 있는데, 조안 페레로가 처음 포르투에 입항하면 부관 롯코 알렘켈이 '해물피자' 이야기를 꺼낸다. 전작에서 조리 랭작을 할 때 포르투에서 밀을 밀가루로 바꾼 뒤, 치즈, 밀가루, 어육을 합쳐 해물피자를 만들었다.
두 게임 다 솔로잉이 쉽게 가능하며, 다른 플레이어와의 협업, 갈등에 따른 스트레스가 '비교적' 적은 MMORPG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게임에서 매시브(Massive)가 발휘되는 부분이라면 (1) 국적 간 동맹항 확보를 통한 관세 이득 (2) 유저 해적에 대한 스트레스 정도가 있을 것이다. CBT 단계에서는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않았고, "앞으로 이렇게 되겠구나"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동맹항 확보는 도시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어떤 국가가 가장 많은 돈을 냈는지 순위를 매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대항해시대 2>부터 이미 투자와 동맹항 요소는 있었지만, 여기에 매시브함을 더한 것은 <대항해시대 온라인>이었다.
지중해, 북해 지역을 떠나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동아프리카 연안 도시는 다이아몬드를 판매하고 있고, CBT에서는 이들 도시에서 관세 할인을 받기 위한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하게 나타났다. 모티프가 이러한 경쟁 환경을 전 세계적으로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면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보았던 역동적인 투자전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CBT에서 다른 유저를 공격하는 '유해'(유저 해적)이 몇몇 존재했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는 아니었다. 유저가 다른 유저를 쳐도 AI로 인식하고 전투를 진행했기 때문에 유해에게 특별한 메리트/디메리트는 없었다.
PvP는 실시간 턴이 아니었고, 유저와의 전투에서 패배한다고 해서 재화가 극단적으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유저가 다른 유저의 배를 나포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선박이 넘어가도 패배한 유저의 함대에서 배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복사'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CBT에서 더 큰 압박은 유해보다는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NPC의 강습이었다. CBT 기간 내내 모티프는 강습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는 피드백은 받았고, 그 확률은 몇 차례 줄어들었다.
3. 실제 지구 & 역사 속 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실제 지구의 환경과 당대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 게임이다. 실제 축척과 가까운 맵이 등장하며, 배가 갈 수 있는 최대 속도는 20노트(Kt)다. 조류의 흐름, 바다의 깊이, 풍속도 실제 빅데이터를 참조해 지구와 비슷하게 조성했으며, 일반 항해는 물론 해전 중에서도 이러한 조건이 계속해서 반영된다.
도시의 이름은 모두 당대 도시인의 호명에 따른다. 원작의 리스본은 리스보아로 나온다. 항해 시간이 누적되면서 더 많은 항구를 발견하게 되는데, 모두 원작보다는 당대의 표기를 한국어로 가져왔다. 이득규 디렉터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최대한 왜곡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일어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임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한 적 있다. 모티프는 아랍어처럼 자료가 부족한 언어는 한국외대 교수진의 자문까지 얻어가며 레퍼런스를 정리할 정도로 게임의 언어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재현에 공을 들였지만, 다중의 재현이 겹쳐지고 또 겹쳐지면서 굉장히 어렵게 느껴졌다. 실제 지구처럼 머나먼 바다를 따라 항해하다 보면 이스탄불은 코스탄티니예로 나오고, 해적들은 자꾸 선단을 노린다.
유저들의 거래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동하는 시세 때문에 지중해 안에서는 교역으로 돈이 잘 벌리지도 않는다. 원작의 일대기를 맛보기 위해선 레벨 업을 해야 하지만, 그 길을 찾기 쉽지 않다. 내파 시스템이나 입항 가능 레벨에 대해서도 게임이 뚜렷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잠깐만 정신을 놓으면 1노트의 속도로 돌아와야 했다.
이런 의도된 어려움을 작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먼 바다에 던져놓고 잠시 여유를 가지는 플레이 패턴을 기대했지만, CBT에서의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계속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봐야 했다. 유리한 매각처를 찾으려면 계속 시세를 체크해야 했고, 잊을 만하면 NPC의 강습이 걸려왔으며, 그 와중에 새 항구를 발견하면 들어가야 했다.
CBT 기간 중에는 매일 같이 재화를 퍼줬지만, 정식 론칭 이후에는 배에 물과 빵을 싣고, 선원을 고용하고 유지하는 각종 활동 비용을 부담하기가 꽤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비용은 비례해서 증가할 텐데 주점에서 높은 등급의 항해사를 만나고 내 편으로 만들기 쉽지 않았다. 특산품의 스택을 쌓아서 거래하는 방식이 유리하다는 것을 CBT 후반에 깨달았지만, 힘든 항해를 보상받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언어가 통하는 항해사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처럼 바디랭귀지를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지역의 항구에 입항하면 보급 말고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다. 그마저도 단순한 습득/미습득의 방식이 아니라 레벨이 있었기 때문에 도시 안에서 투자와 같은 고급 커맨드를 하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의 레벨이 높아야만 했다. 언어 1 레벨은 거의 바디랭귀지와 같은 수준의 효과만 준다.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 모험은 교역과 전투 사이에서 발견물 수집의 재미를 주는 콘텐츠로 연결 퀘스트나 촘촘한 스킬 트리 등을 통해 나타났지만, 이번 CBT에서는 거의 구현되지 않았다. 해안을 따라 배를 몰면서 정박하고 발견물을 모으는 정도였는데, 스릴이라던가 뭔가를 찾아냈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미 여러 테스터들이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다. 발견물의 일러스트는 마음에 들었지만, 스토리도 어려움도 없는 발견물 찾기는 공허하게 다가왔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대항해시대>의 플레이 감각을 확실하게 제공한다. 망망대해에 나서서 조금씩 강해지고, 경험이 쌓이는 그런 게임이다.
이득규 디렉터가 여러 차례 공언한 것처럼 고증에도 디테일한 신경을 쓴 모습이고, 그래픽이나 일러스트의 디테일은 굉장히 훌륭했다. MMORPG로서,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한 즐거운 피로감이 밀려든다. (문제는 이 게임이 모바일 베이스로 출시된다는 것인데, 이번 CBT에서 스팀 버전에 대한 체험은 없었기 때문에 훗날 평가할 일이다)
이 즐거운 피로감 뒤에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이를테면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정말 역사를 제대로 고증한 걸까? 홍어장수 문순득과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같은 함대 소속으로 지중해에서 배를 몰며 대포를 쏴도 괜찮은 걸까? 에도 막부의 첫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유료재화를 소비해서 S급 항해사로 뽑는 존재는 아니지 않을까? 배를 조선소에서 만들지 않고 유료재화를 통해서 뽑는 것은 합당한가?
결국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충실한 재현을 목표로 하는 게임이지만, 그러면서도 특정 지점에서는 '게임적 허용'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는 재미로 극복되는 수밖에 없는데, 지금 CBT에서 본 모습으로는 "오래 즐기기 재밌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서,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보려 한다.
모티프는 재현에 방향성을 두고 설계된 가상세계에서 유저들을 납득시킬 만한 라이브서비스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대항해시대>에 좋은 기억이 있는 사람이 제법 있고, 그들의 실제 구매력이 높은 편이라고 해서 자기 눈높이에 너무 높은, 또는 낮은 게임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테스터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서 "부끄럽지 않은" 결과물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