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있어서 로그라이크와 여타 장르의 결정적 차이점을 대변해주는 말입니다. 로그라이크는 매번 게임 속 환경 요인이 달라집니다. 비슷한 조건에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결과는 매번 다릅니다. 매번 다른 환경 속에서 플레이어에게 가장 적합한 선택지가 뭐고, 변수는 무엇일지 계산하는 재미. 이것이야말로 로그라이크의 참 재미죠.
그럼에도 플레이어는 매번 같은 행동을 합니다. 어라? 앞서 말한 대로라면 같은 행동을 해선 안됩니다. 분명 매번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든 게임 장르인데 왜 그러는 걸까요?
효율 때문입니다. 게임 환경이 달라지는 점이 플레이어에게 “안정적인 스타팅”을 강요합니다. 다양한 변수에 맞춰가는 것보단, 이를 '버텨내는' 쪽이 더 쾌적하고 재밌게 플레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또한, 장르 특성상 언제든 부담 없이 게임을 다시 할 수 있어 재도전도 용이합니다. 가챠게임의 '리세마라'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이 ‘스타팅’을 맞추는 과정이 광기나 다름없습니다. 같은 행동을 계속하며 같은 결과를 기대하길 원하는 것, 이게 바로 로그라이크 유저가 지닌 광기입니다.
이 광기를 비틀어낸 로그라이크 게임이 있습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변수를 버텨내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플레이어 스스로 변수를 만들게 했습니다. 게임의 제목은 <루프 히어로>입니다. 3월 5일 발매 후, 출시 3일 만에 동접자 5만 명을 달성한 걸로도 입소문을 타고 있습니다.
<루프 히어로>는 여러모로 희한합니다. 첫 번째로 게임 장르가 너무 복잡합니다. 로그라이크인데 <슬레이 더 스파이어>처럼 덱 빌딩 요소가 들어가 있고, 방치형 게임처럼 플레이어의 조작도 최소화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문명>같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시설물 배치와 시너지도 계산해야 합니다.
다양한 장르가 섞였으나 플레이 방식은 단순합니다. 모험을 떠난 용사를 육성하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가 할 일은 장착한 장비를 바꿔주고, 레벨이 오를 때 스킬을 찍고, 모험을 계속하거나, 중단할지 정도 등이 전부입니다. 전투도 용사가 알아서 합니다. 회복 아이템 사용도 스스로 합니다. 게임 제목을 <아이들 히어로>로 출시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렇다고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역할이 가볍진 않습니다. 플레이어는 용사가 성장할 환경을 구성해야 합니다. 마을을 지어 용사가 퀘스트를 수행하게 만들거나, 던전을 설치해 험난한 전투와 강력한 아이템을 얻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선 여전히 방치형 게임 같긴 합니다.
하지만 <루프 히어로>와 방치형 게임의 차별점은 명확합니다.
첫 번째는 순환입니다. 게임에서 용사는 끝없이 순환하는 길을 여행하게 됩니다. 용사의 여정에 목적은 없습니다. 아래 게임 스크린샷처럼 용사가 여행할 길은 언제나 출발지로 돌아오게 됩니다. 샛길도 없고 길을 새롭게 만드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한번 생성된 길은 바뀌지 않습니다.
게임 속 모든 일은 용사가 길을 여행하며 발생합니다. 몬스터와 싸우거나, 마을을 지나며 퀘스트를 받는 행위 등 모든 행동은 길을 지나갈 때 이뤄집니다. 인게임 시간도 용사가 전투를 펼치거나 길을 여행할 때만 흘러갑니다. 인 게임 시간은 RPG의 턴 시스템과도 같습니다. 턴 흐름에 따라 공격을 진행하고 몬스터가 새롭게 등장하는 방식이죠.
길을 따라 여정을 반복하는 플레이 때문에 게임 방식이 독특합니다. 용사에겐 오직 전진뿐입니다. 매 게임 무작위로 형성된 길을 시계 방향으로 끝없이 돕니다. 후진이 불가능하니, 한 번 지나간 장소는 다음 순환 때 다시 방문하게 됩니다.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곳도, 험난한 전투가 펼쳐진 장소도 여정이 끝나면 다시 조우하게 됩니다.
길만 순환하는 게 아니라, 용사와 플레이어가 겪은 경험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셈입니다. 끝없는 여정은 플레이어 선택으로 스스로 끝내거나, 용사가 죽을 때만 멈춥니다. 같은 경험을 반복해야 하는 점은 <루프 히어로>만 지닌 차별점입니다. 끝이 없다는 점에서는 몇몇 방치형 게임 장르와 동일합니다. 하지만 방치형 게임에는 게임 속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적과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루프 히어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용사의 여정에는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죠.
게임에서 용사를 육성하는 방법은 전투에 있습니다. 몬스터와 전투가 끝나면 장비 혹은 카드를 획득합니다. 획득한 장비를 용사에게 장착해 더 강하게 만들거나, 카드를 사용해 필드를 다양한 환경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덱 빌딩입니다. 플레이어는 카드를 사용해 용사의 여정에 다양한 변수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카드는 크게 4종류가 있습니다. ▲길에 효과를 추가하는 환경 카드 ▲인접 타일에 영향을 끼치는 시설 카드 ▲용사에게 긍정적 효과를 주는 배경 카드 ▲시설물에 영향을 끼치는 카드가 존재합니다.
플레이어는 카드를 사용해 용사의 여정길을 직접 조정하게 됩니다. 카드는 전투에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루프 히어로>에 등장하는 카드는 여정길에 변화를 더하는 카드뿐입니다. 더 좋은 장비가 필요하다면 강한 적이 소환되는 시설물을, 회복이 필요하다면 회복 시설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덱 빌딩 게임의 특징 요소인 시너지도 잘 구현되어 있습니다. 인접한 시설물이 합쳐져 새로운 시설물이 되거나, 주변 시설물에 영향을 줘 새로운 환경 요소를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이에 따라 주어진 카드를 지금 즉시 사용해 효과를 볼지,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카드를 아껴둘지 생각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매 여정을 떠나기 전 덱 구성을 편집해 시너지를 위주로 갈지, 단순한 효과를 자주 사용할지 고민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물론 아끼면 똥이 된다고, 아껴둔 카드를 부리나케 사용하는 상황도 자주 일어납니다. 여러모로 덱 빌딩 장르의 특징이 잘 구현된 게임입니다.
이처럼 <루프 히어로>는 덱 빌딩 방식으로 독특한 게임 경험을 제공합니다. 방치형 게임들은 용사가 나아갈 길에 맞춰 육성합니다. 그러나 <루프 히어로>는 육성에 맞춰 용사가 나아갈 길을 꾸미게 됩니다. 이 차이점만으로도 게임 경험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루프 히어로>는 캐릭터를 방치할 뿐, 그렇다고 여정까지 방치하는 게임은 아니 거든요.
로그라이크 핵심은 '게임 구성 요소가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변수가 계속 바뀌는 데 있죠. 매 게임 변하는 게임 구성에 적응하고, 얼마만큼의 위험을 인내할 것인지야말로 로그라이크 게임이 주는 재미입니다.
대다수 로그라이크 게임은 이를 선택지와 '무작위 지형 생성'으로 구현합니다. 로그라이크 대표 게임인 <FTL>과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아예 다른 장르입니다. 그럼에도 두 게임 모두 선택지와 그에 따른 확률과 변수로 게임을 플레이하게 됩니다.
반면 <루프 히어로>에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 게임에도 무작위 지형 생성 시스템은 있지만 이는 카드를 어떻게 배치하냐에 영향을 줄 뿐입니다. 다른 로그라이크 게임이 변수를 무작위로 생성해 준다면, <루프 히어로>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변수를 찾아 나서게 만드는 게임입니다.
2021년, 로그라이크 붐이 꺼진 시점에 갑작스레 등장한 <루프 히어로>가 인기를 끌 수 있던 비결입니다. 기존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겪던 '광기'같은 행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운빨'이 없지는 않지만 다른 로그라이크에 비하면 없다시피 합니다. 운이 부족해 게임에 패배했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플레이어가 스스로 선택한 변수니 그에 따른 결과 역시 매우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플레이 경험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니, 다음 시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하는 것도 수월해집니다. 교훈을 받아들였다면 자연스레 다음 게임에 나서게 됩니다. 다른 로그라이크 게임이 '운빨'을 극대화해 리플레이성을 높였다면, 반대로 <루프 히어로>는 이를 최소화해 리플레이성을 높인 셈입니다.
로그라이크 운빨에 지친 플레이어에게 <루프 히어로>만한 게임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진 않습니다. 플레이어 개입이 최소화된 게임인 만큼 조금 지루하기도 합니다. 그래픽이 화려하지도 않고 극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일도 없습니다. 인 게임 시간 설정도 최대 2배속이 전부입니다. 듀얼 모니터로 켜두고 플레이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화면 하나를 켜두고 오랜 시간 하기에는 조금 지루한 감이 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