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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리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리뷰] Lacuna - A Sci-Fi Noir Adventure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김승주(4랑해요) 2021-05-28 16:33:49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하루다. 해가 쨍쨍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내리고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우릴 반기곤 한다.
 
필자는 사내 유일 흡연자다. 기사에 담배 이야기를 쓰는 건 도의에 맞지 않겠지만, 솔직히 이런 날에는 방에 누워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을 하면서 담배 한 대 태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마침 스팀에서 눈길을 끄는 이미지가 있었다. 코트를 입은 남자가 빌딩 사이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한 게임의 일러스트였다.

해당 게임의 제목은 <라쿠나>였다. SF 세계관 속 형사가 되어 살인 사건의 진범을 쫓는다는 내용이다. 소개 문구도 의미심장했다. 고전 어드벤처 게임의 특징을 과감하게 버렸다. 이야기는 선택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며, 일단 결정하면 돌이킬 수 없다. 감이 왔다. 딱 찾고 있었던 게임이었다.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 고전 어드벤처의 특징을 버리다

 

주인공 '닐 콘래드'는 CDI(중앙수사본부)의 수사관이다.

 

누아르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형사의 특징이란 특징은 다 가지고 있다. 바바리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도시를 돌아다닌다. 성격은 시니컬하고 흡연자다. 별거 중인 아내가 있다.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달라지지만, 끔찍이 아끼는 딸도 있다. 수사관으로서 닐 콘래드는 외무부 장관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고 배후를 밝혀내야 한다.

 

<라쿠나>의 게임 플레이 화면. 도트 그래픽이 화려한 편은 아니지만, 건조한 게임 분위기를 살리는 데 부족함이 없다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는 문장에서 예측한 독자도 있을 듯 한데, <라쿠나>의 스토리는 당신의 선택에 따라서 다양한 갈래로 나뉜다. 한번 선택한 행동은 물릴 수 없다. 가끔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다. 그 선택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알 수 없다.

 

가령 닐은 용의자가 도주에 사용한 보트에서 증거를 찾기 위해 항구로 향했다. 하지만 관리인은 "수사해야 하는 보트의 일련번호를 알지 못하면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출입을 거절했다. 주인공은 하는 수 없이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한 노인이 있었고, 그는 다짜고짜 담배를 달라고 했다. 주인공이 순순히 담배를 건네자, 노인은 고맙다며 답례로 주인공이 찾는 보트의 번호를 알려 줬다.

 

항구로 들어가자, 다른 노인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주인공이 이유를 물으니 세금을 낼 돈이 없어 항구에서 쫓겨나기 직전이라고 한다. 노인은 자신이 내내 여기 앉아 있었으며, 자릿세를 대신 내어 주면 자신이 목격한 용의자의 생김새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닐이 자릿세를 대신 내어 주자, 노인은 닐이 찾는 용의자의 정보를 줬다. 바로 헤어스타일이 "OOO"라는 것(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가렸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적당히만 처리하고 바로 다음 장소로 향할 수 있다. 이들을 돕지 않고 단순히 용의자가 탑승했던 배만 조사하고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용의자의 배만 조사해선 헤어스타일을 알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게임은 "당신이 찾지 않은 정보가 있다"며 플레이어를 막거나, "이건 무조건 중요한 정보다"라며 강조하지 않는다.

 

한번 결정한 선택은 되돌릴 수 없다. <라쿠나>는 수동 저장을 지원하지 않는다

 

보트만 수사해선 용의자의 완전한 인상착의를 알기 힘들다

 

 

기존의 정답이 있는 선택(퍼즐일 수도)만을 하고 옳은 길만 따라가는 어드벤처 스타일의 게임과는 조금 다르다. <라쿠나>가 강조하는 점 중 하나는 고전 어드벤처 게임의 특징을 과감히 버렸다는 것. 이는 조작법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먼저 포인트 앤 클릭 대신, 플랫포머식 조작 방식을 선택했다. 추리 어드벤처 게임임에도 WASD를 눌러 캐릭터를 조작한다. 쉬프트를 누르면 빠르게 달릴 수도 있다.

 

기본적인 조작은 플랫포머 게임과 같다. 달리기 기능도 있어 답답할 일은 없다

 

편의성에도 공을 들였다. 이런 추리 게임에서는 증거를 획득할 수 있는, 상호작용 가능한 물체를 찾기 위해 배경을 눈 빠져라 쳐다봐야 할 때가 많다. 라쿠나는 상호작용 가능한 대상에 윤곽선을 부여한다. 이미 조사한 대상이면 회색, 중요한 대상이면 노란색 윤곽선으로 표시해 준다. 때문에 증거를 찾아 헤멜 일이 적다.

 

추리를 위한 시스템에도 신경썼다. 모든 대화 내용은 다시보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핵심 단서가 되는 문구는 노란색 표시로 강조되어 등장한다. 

중요한 문단은 노란색으로 강조 표시를 해 준다. 신경 쓰인다면 옵션에서 끌 수도 있다

  

올바른 추리를 위해선 세계관 이해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세세한 설정을 짜 놓지는 않았다. 
조금만 뉴스를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수준

 

그렇다고 핵심 문구만 보며 텍스트를 대충 넘겼다간 피를 볼 수 있다. 강조되지 않은 문장 속에도 핵심 정황이 담긴 경우가 있기 때문. 올바른 추리를 위해서는 텍스트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라쿠나>는 느긋하게 텍스트를 들여다보며 생각하기 좋아하는 플레이어를 위한 게임이다. 짧은 글과 요약에만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괴로울 수 있다.

 

추리는 크게 어렵지 않다. 중요한 추리를 할 때는 시간을 무한정 제공하며,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풀 수 있는 수준이다. 플레이어 오답을 유도하는 함정 선택지나 단서도 없어 게임 진행에 답답한 구간은 없었다.

 

추리는 문제지를 받아 올바른 답안을 제출하는 방식이다. 후반부에는 추리해야 할 문제가 4개 정도로 늘어나긴 한다

 

틀릴 수도 있지만, 틀리면 틀리는 대로 진행된다

 

중요한 시스템은 아니지만, 게임 내에서 흡연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라쿠나>와 비슷한 추리 어드벤처 게임 <진구지 사부로> 시리즈에 등장하는 대사. <진구지 사부로>에선 흡연이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시스템으로 등장한다. 반면 <라쿠나>에선 흡연이 큰 역할을 담당하진 않는다. 단지 캐릭터가 담배를 피우면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정도. 원한다면 담배를 끊고 비흡연자로 남을 수도 있다.

 

흡연을 하며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원한다면 담배를 끊을 수도 있다. 흡연 유무가 스토리 진행에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라, 그냥 자유롭게 선택하면 된다

 

 

# 힘 있는 스토리와 연출, 다만 회차 시스템은 아쉬워

 

어드벤처 게임이건, SF 누아르건 꽤 역사가 깊다. 이런 부류의 게임이나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라쿠나>는 다소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시니컬한 형사, 가족을 빌미로 한 협박, 대기업 횡포에 고통받는 시민들, 사건 뒤에 있는 거대 배후 세력까지...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연출과 각본이다. 플레이어를 어떻게 게임에 몰입시키고, 어떻게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냐에 따라 뻔한 플롯도 좋은 스토리가 될 수 있다.

다행히 <라쿠나>에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힘이 있다. 이야기가 다소 누그러질 때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고, 중요한 순간마다 시간제한 선택지를 주면서 플레이어의 판단을 시험한다. 오로지 게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출.

 

계속해서 발생하는 사건사고

 

고민되는 순간마다 시간제한 선택지가 나온다. 시간이 빡빡한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선택이 많아 1분이 1초처럼 느껴진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멀티 엔딩이 존재하고, 2회차를 권장하는 게임임에도 중간 지점부터 플레이하는 기능이 없다. 새로운 회차를 위해선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대화 스킵 기능도 없어 이미 봤던 대화를 처음부터 전부 봐야 하기도 한다. 

튜토리얼조차 손쉽게 넘길 수 없다. 튜토리얼과 메인 스토리가 연관성을 가져 마냥 불편하다고 주장할 수 없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부분에 대한 편의성을 놓친 것은 아쉽다.

 

회차 플레이를 위해 아예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점은 조금 괴로웠다. 스킵 기능도 없다

 

# 꿀꿀한 날씨에 딱 맞는 게임

 

<라쿠나>는 비 오는 날 하기 딱 적절한 게임이다. 마침 기사를 출고하는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다. 이런 꿀꿀한 날씨엔, 옆에 커피 한 잔 놓고 <라쿠나> 속 세상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플레이타임도 약 4시간에서 5시간 정도로 무리 없는 수준. 가격은 16,500원이다. 조금 비싼 돈 내고 장편 영화 한 편 본다고 생각하면 좋다. 

한글화도 깔끔하다. 게임 플레이 내내 오역이나 비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침 현 상황에 맞는 선한 일도 동시에 할 수 있다. <라쿠나>는 게임 OST를 동봉한 특별판을 파는데, 수익의 10%는 WHO(세계보건기구)가 주도하는 'Go Give One' 캠페인에 기부된다. 백신 수급을 어려워하는 국가에 도움을 주는 캠페인이라고 한다. 게임을 즐기면서 동시에 선행까지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 게임명: 라쿠나 (Lacuna – A Sci-Fi Noir Adventure)

- 장르: 추리 어드벤처 게임

- 개발사: 디지테일즈 인터렉티브

- 퍼블리셔: 이셈블 엔터테인먼트, 메이플라워엔터테인먼트

- 플랫폼: PC

- 출시일: 2021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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