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그랬다. 비주얼 노벨은 더욱 그런 듯하다. 과거, 미래, 학교, 회사, 병원, 판타지, 현실, 그리고 '취향'까지... 유구한 역사를 거쳐오며 비주얼 노벨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는 다 나온 듯하다.
그중 비주얼 노벨 전문으로 정평이 난 테일즈샵은 튀는 시도를 계속하는 개발사다. 한국 소재 개발사라서 무작정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다. 테일즈샵은 2012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신작과 DLC를 발매하고 있으며 스팀, 스토브는 물론 스위치에도 적극 진출하는 한편, 미디어믹스와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인 곳이다.
이들의 최근 작품 <썸썸편의점> 또한 아이코닉한 게임인데, '편의점 알바'라는 콘셉트에 걸맞은 게임이면서도 장르적 재미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호감도, 호감도, 호감도
집안 사정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은 스마트폰 앱스토어를 탐방하던 중 정체불명의 앱을 다운받는다. 그 이름은 썸썸. 주변 인물들과의 연애 가능성을 퍼센티지로 나타내준다는 마법 같은 앱을 다운받고 난 뒤, 주인공은 어느 날 편의점에 찾아온 세 여인과 "이어질 수 있는지" 볼 수 있게 된다. 과연 주인공의 사랑은 누구를 향하게 될 것인가?
왼쪽부터 방예나, 아델라, 편수희.
현실에서 주변인과의 연애 가능성을 수치화되어 나타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쪽 장르'에서는 아주 만연한 기법으로 호감도 게이지를 통해 상대와 각을 잴 수 있다. <썸썸편의점>은 모든 '씬'을 보기 위해 허겁지겁 행동하기보다는, 여러 차례 플레이하며 재시작의 어드벤티지를 챙기면서 다각적으로 접근하길 권한다. (이 게임은 15세 이용가로 누군가 애타게 찾을 그런 씬은 없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시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해서 자신의 인생을 15분씩 끊어서 살았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럴 필요 없이 세이브와 로드, 스킵과 재도전을 반복하며 <썸썸편의점>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경우를 찾아 나가면 된다. '연결될 확률', 무조건 100%를 달성해야만 하는 그것은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나침반으로 기능한다. 여담이지만 결혼을 '생식기의 상호적 사용을 위한 두 사람의 동의'라고 정의하던 칸트는 몇 차례 구혼에도 불구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는다.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통해 만족감을 즐긴다면 <썸썸편의점>에서 수치화되어 깔끔하게 나타나는 호감도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게임의 존재 덕에 <순수이성비판>으로 서양철학사를 새로 정초한 칸트보다 고백과 사랑을 더 잘 알지도 모른다! (농담이다.)
전쟁통에도 사랑이 꽃핀다지 않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도 연애를 할 수 있다. 기자는 2015년에 영등포구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며 담배 이름을 못 알아듣는다고 취객한테 멱살이나 잡혔지만. 게임 속에서는 매장을 관리하면서도 '순해 보이는 후배 알바생, 외국인 가수 연습생, 뭔가 엉성해 보이는 경호원'과 건전한 교제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코시국' 전쟁통도 잠시 안녕!
마법의 어플 썸썸
# 무엇을 위한 경영인가?
<썸썸편의점>은 전작 <기적의 분식집>처럼 경영 + 연애 시뮬레이션이다.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솔로 엔딩을 보지 않기 위해) 플레이어는 편의점의 매출을 잘 관리하는 한편, 게임의 진전을 위해 매대를 업그레이드하고, ATM 같은 있을 법한 것부터 '금 자판기' 같은 비현실적인 자판기까지 설치할 수 있다. 그렇게 번 돈은 순전히 편의점과 그녀들과의 관계를 위해 사용된다.
경영 턴에서 간단한 퀘스트를 마치면, 개인 계좌에 있는 돈을 소비해서 세 명의 히로인 중 어떤 인물과 진도를 나갈지 삼자택일해서 비주얼노벨 턴으로 입장하는 구조. 게임이 후반부로 가다 보면 높은 호감도를 요구하곤 하는데, 이를 충족하지 못했다면 최대 수십만 원에 달하는 선물을 통해서 호감도를 올려야 한다. 역시 그 수십만 원은 개인 계좌에서 나간다.
<썸썸편의점>의 경영 시뮬레이션은 쉬운 편에 속한다. 진상 손님도 없고, 마이너스와 페널티 또한 특별히 없기 떄문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한다는 것은 결국 그녀(들)의 마음 공략이므로 재주가 좋다면 경영을 약간 소홀히 하고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프린세스 메이커>를 하면서 딸을 여왕이나 그리고 농부로 키울 수 있고, <졸업>을 하다가 사제 간의 아찔한 연애를 할 수도 있지만, <썸썸편의점>은 오직 '썸썸'을 위해 편의점을 경영하므로 긴장감이 드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테일즈샵 플레이어 층에게 소소한 웃음이 될 만한 요소나 벌어들이는 돈이 일반적인 편의점 수준을 벗어날 때 오는 재미도 아주 없진 않았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즐길 만했다.
# 썸썸편의점 시작하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
'어그로'이기도 하지만, <썸썸편의점>을 시작하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어디서 책 하나 읽고도 인생의 각오를 되새긴다는데, 10시간 정도 공들인 게임으로도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썸썸편의점>에서 가장 까다로운 인물 방예나는 주인공의 대시를 애써 거절한다. 회사 생활도 있고, 절친 편수희와의 관계도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트 내내 갈등하다가 주인공에게 미성숙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방예나는, 끝내 주인공을 사랑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사랑을 받으며 관계를 형성하기로 결정한다.
줄거리 내내 주인공을 거절하는 방예나는
주인공과 친구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에리히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미성숙한 사랑과 성숙한 사랑을 구분한다. 미성숙한 사랑은 상대가 필요해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고, 성숙한 사랑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방예나는 주인공과 친구들의 진심어린 태도에 성숙한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발전한다. 기자도 아무쪼록 그렇게 성숙하기로 다짐했다.
<썸썸편의점>은 현재 스토브에서 오는 8월 5일까지 30% 할인가인 10,500원에 판매 중이다. 세 인물의 엔딩 이후를 담은 DLC도 만나볼 수 있다.
스토브를 <로스트아크> 실행 머신 쯤으로 생각하던 분들은 한국어 풀보이스가 수록된 연애 시뮬레이션도 있으니 한 번쯤 편의점 경영을 빙자한 구애 활동에 나서보길 바란다. 때로 외로움은 게임을 통해 아주 탁월하게 대체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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