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게임의 일부를 변형(modification)해 만든 유저 콘텐츠를 모드(mod)라고 부릅니다. 잘 알려져있듯 ‘모드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프랜차이즈로는 <엘더스크롤> 시리즈가 있습니다. 모딩을 폭넓게 지원해 많은 유저가 달려들었고 그 결과로 스탠드얼론 게임에 맞먹는 수준의 ‘대형 모드’들도 세상에 많이 나왔습니다.
<더 포가튼 시티>는 그중에서도 특히 명성이 높았던 모드입니다. 해외 게임 웹진이 별개의 게임처럼 따로 리뷰를 작성했고, 모드로서는 최초로 AWGIE Award(호주작가조합 시상식)에서 수상했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총 3백만 명이 다운로드 받는 등 대중적인 성공도 거뒀습니다.
그런 <더 포가튼 시티>가 최근 게임으로 출시됐습니다. <엘더스크롤> 세계관 기반이었던 설정을 현실 역사에 맞게 대폭 수정했고 대사량은 두 배가량으로 늘어난 독립된 게임입니다.
원작처럼 이 게임 또한 유저와 매체의 대대적 호평을 사고 있습니다. ‘스토리텔링의 걸작’이라는 찬사까지 보입니다. <스카이림>의 드웨머 문화를 배경으로 펼쳐졌던 이야기는 어떻게 각색되었을까요? 원작을 전혀 모르는 유저가 해도 재미있는 작품일까요? 직접 플레이해봤습니다.
*본 리뷰는 직·간접적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되도록 추상적·우회적으로 작성됐습니다.
현시대를 살고 있는 주인공이 이탈리아의 한 고대 유적 지하로 떨어지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추락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을 역행한 주인공은 기원후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로마의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지하에 만들어진 이 마을에는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모두 불가사의한 과정을 통해 이 마을에 오게 됐습니다. 다만 현대인인 주인공과 달리 모두 당대의 로마 시민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민들은 지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채 마을에 정착, 로마 보병군단 장교 출신인 마기스트라테(Magistrate·고대 로마의 판사 겸 행정관) ‘센티우스’의 관리 아래 로마의 법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의 삶을 통제하는 더 강력한 법은 따로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모든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절대적 규칙입니다. 주민들은 이를 ‘황금률’이라 부릅니다. 잘 알려진 ‘황금률’의 정의와 사뭇 다른데도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법칙’이 사실은 사람들을 말 그대로 황금으로 바꿔버리는 무서운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저주가 정말로 작동한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이 순순히 따르는 이유는 곳곳에 널린 인간 형태의 황금 조각상들 때문입니다. ‘예전 주민들’로 추정되는 이 조각상을 보며, 주민들은 황금률을 사실로 믿고 두려워합니다.
마기스트라테 센티우스는 주인공에게 자신이 일종의 계시를 받았다며, 마을에 곧 황금률을 어길 사람이 있으니 그를 반드시 찾아달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도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서요. 이에 주인공은 ‘수사’를 시작하고, 그 과정 중에 여러 놀라운 진실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게임은 초장부터 플레이어를 이렇듯 수많은 궁금증 속에 밀어 넣습니다. 이 마을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주민들은 어떻게 여기 오게 됐을까요? 황금률에서 규정하는 ‘죄’란 정확히 뭘까요? 황금률의 배후에는 어떤 존재 혹은 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요? 황금률을 어기려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전반적 게임플레이에 걸쳐 ‘미스터리’는 계속 더해지면서 이야기를 추동합니다. 인물 간 갈등이나 마을의 사건·사고에 얽힌 피상적인 것에서부터 황금률의 기원에 얽힌 심오한 것까지, 의문부호는 여러 층위에 걸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스터리를 난립시킨다고 ‘좋은 스토리텔링’이 완성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더 포가튼 시티>는 미스터리의 중한 단서를 적소에 등장시켜 이야기의 탄력과 서스펜스를 만들어 냅니다. 한편으로는 특정 인명, 사건, 표현을 틈틈이 드러내며 문제 해결에 다가섰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 ‘진짜 내막’과의 감질나는 간격을 적절히 유지하는 탁월한 거리감각을 보여줍니다.
<더 포가튼 시티>는 <스카이림>에서 시작된 게임이지만 장르적으로는 오픈월드 RPG보다 어드벤처에 가깝습니다. 캐릭터 성장 및 스킬 시스템이 없으며, 게임월드는 작고 폐쇄적입니다. 여러 캐릭터와 대화를 나누며 정보를 얻고, 숨겨진 요소 등을 찾으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핵심 게임플레이는 어드벤처 장르의 문법에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퀘스트 구조는 서양 RPG 특유의 ‘자유도’를 참고해 다각적으로 구성했습니다. 먼저 게임을 시작할 때 주인공 성별과 직업을 고를 수 있고, 이에 따라 몇몇 구간의 플레이가 달라집니다.
퀘스트는 '황금률 위반자'를 찾아내고 황금률 및 마을의 비밀을 파헤지는 메인 스토리, 그 과정 중에 마을사람들의 문제와 고민을 해결하는 서브 스토리로 구분됩니다. 해결법이 두 가지 이상인 퀘스트가 많고, 루트별로 다른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대화 중심 게임이지만 때에 따라 ‘물리력’이나 기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일부 퀘스트만 완료해도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엔딩이 여러 개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모든 퀘스트를 해결해 ‘진엔딩’에 도달해야 비로소 게임의 주제의식과 전체 그림을 파악할 수 있기에 되도록 진엔딩 플레이가 권장됩니다. 진엔딩으로 향해 가는 와중에 서브엔딩을 모두 감상하기도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퀘스트 시스템은 일반적 어드벤처 게임의 선형적 구조와 비교했을 때, 더 강한 상호작용으로 게임 월드를 향한 정서적 친밀도를 키우는 효과가 있습니다. 유저는 여러 퀘스트를 수행하며 작중의 마을을 조금 더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고,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사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내러티브의 감흥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게임 맨 마지막에는 오로지 이야기의 ‘감정적 완결’만을 위해 덧붙여진 일종의 후일담이 나오는데, 여기서 제작진이 정서적 연출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주인공은 고대 로마 시민들과의 대화에서 ‘연대책임’(collective punishment) 및 기타 도덕관념을 논하면서 일종의 가치관 충돌을 겪습니다. 이런 대화 내용은 냉정히 보면 필요 이상으로 장황해 유저들을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더 포가튼 시티>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밀도 높은 대화는 <더 포가튼 시티>의 특징이자 하이라이트입니다. 제작진은 게임 미디어의 스토리텔링에서 흔히 쓰이는 코덱스(기록물)나 컷신 등 요소를 거의 배제하고, 주인공과 NPC의 설전으로 게임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유저들에 질문을 던지는 꽤 어려운 선택을 했습니다.
(게임에 문서가 꽤 많이 나오지만, 대부분은 단순한 정보전달 용입니다. 문서 읽기에 구태여 시간을 쏟지 않길 바랐는지, UI에서 내용을 요약해줍니다)
특히 <더 포가튼 시티> 원작이나 <폴아웃> 등 일부 RPG에서처럼 대화만으로 ‘결판’낼 수 있는 퀘스트가 많고 여기에서 정교한 글쓰기 솜씨가 빛을 발합니다. NPC의 대사는 각자의 성향, 사상을 뚜렷하게 반영하며 화자의 입체적 내면을 드러내고, 동시에 인물과 줄거리에 깊이와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플레이어는 상대의 처지와 됨됨이, 사고방식을 모두 고려해 그들을 설복시켜야 합니다. 보통 3~4번 말을 주고받으면 끝나는 일반적 게임 대화 시퀀스와 달리, <더 포가튼 시티>의 대화는 마치 잘 짜인 보스전처럼 ‘공방’이 길게 오갑니다. 실제 대화처럼 신중히 말을 고르고, 예상치 못한 ‘반격’에도 적절히 대처해야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더 포가튼 시티>는 도덕률, 신앙의 의의, 인간 본성, 역사의 반복성 등 다소 거창한 화두를 던지는 게임입니다. 하지만 현학을 줄이고 담백하게 부딪혀 옴으로써 무거운 주제가 주는 특유의 부담감을 덜고, 생각할 거리를 풍부하게 안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총 10시간의 플레이 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는 힘을 지닌 ‘잘 빠진’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물입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먼저 비주얼 측면에서 가장 거슬리는 요소는 <스카이림>을 너무나 닮은 캐릭터 애니메이션입니다. 부자연스러운 표정, 갑작스러운 달리기, 뚝뚝 끊어지는 계단 오르기 등을 보고 있으면 10년 전의 <스카이림>으로 돌아온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텍스쳐, 광원 등 전반적 그래픽 퀄리티는 <스카이림>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기술적 측면 외에도, 전문가 조언을 받아 만들었다는 로마식 건축물, 복식, 집기들은 게임에 현실감과 보는 맛을 더해줍니다.
로마 문화와 고대 신앙 등에 기반한 이야기인 만큼, 관련된 배경지식이 많을수록 더 풍성한 감상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경우 게임의 핵심이 되는 비밀 중 하나를 금방 간파하게 돼 다소 맥이 풀려버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 더 잘 숨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단점은 <더 포가튼 시티>가 아직 한국어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공식 한국어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원작 모드와 같이 유저들에 의한 한국어 패치가 서둘러 만들어지길 희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