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적인 게임성을 자랑하던 특정 시리즈가 다른 게임에 ‘왕좌’를 내주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시티 빌더’ 장르의 시조 격인 <심시티>가 대표적 예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심시티>(2013년 작)는 기대하던 팬들에 많은 실망을 안겼다. 이런 팬 중 상당수가 이후 출시된 같은 장르의 <시티즈 스카이라인>으로 둥지를 옮겼다. <심시티>에 기대했던 높은 자유도와 넓은 스케일을 오히려 더 잘 살렸다는 이유다.
<심시티> 수준의 극적인 추락은 아니지만, <문명> 시리즈의 근래 행보 역시 ‘내리막길’에 가깝다. 2010년 작품인 <문명 V>가 비(非)게이머 사이에서도 회자될 정도로 많은 인기와 호평을 누렸던 반면 후속작 <문명: 비욘드 어스>와 <문명 6>는 각각 미적지근한 시장반응과 ‘나쁘지 않은’ 정도의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앰플리튜드 스튜디오의 <휴먼카인드>는 이렇듯 다소 힘이 빠진 <문명> 시리즈의 팬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충분한 게임이다. 개발사는 <문명>을 빼닮은 게임성을 홍보에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이에 팬들은 <휴먼카인드>가 <문명>의 대항마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그저 그런 ‘카피캣’에 그칠 것인지를 두고 큰 관심을 품어왔다.
직접 플레이해본 <휴먼카인드>는 상상 이상으로 <문명>과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추구하는 게임성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다가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휴먼카인드>만의 매력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 디스이즈게임 방승언 기자
많은 게이머가 예상했듯 <휴먼카인드>와 <문명>은 서로 아주 비슷하다. 선사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흐름에 따라 국가를 이끌면서 발전을 거듭, 다른 문명에 상대 우위를 점하고 승리한다는 기본 게임 목표가 우선 동일하다.
그러나 두 게임의 유사함은 세부 시스템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문명 5>와 <문명 6>를 플레이해 본 유저라면 <휴먼카인드>의 기본 구조에서 놀랄 정도의 익숙함을 느낄 수 있다. 유닛 관리 및 조작, 맵 형태 및 범례, 6각형 타일 구조, 도시 관리 시스템, 문명별 특성, 사치 자원, 전략 자원, 전투 방식, 외교, 테크트리, 사회제도 등등 대동소이한 요소가 매우 많다.
이런 유사성은 부분적으로는 장르 공통적 특징들이지만, 그 이상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문명> 플레이 경험이 있다면 이미 익숙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일부 ‘다른 점’만 익혀도 금방 능숙한 플레이가 가능해질 정도. 이 때문에 게임 초반에는 <문명>의 외전 혹은 후속작을 플레이하는 감각마저 느껴진다.
<휴먼카인드>의 맵은 게임 시작 시점에 적절한 크기와 형태의 여러 영역으로 구획되어 있다. 어떤 유닛이든 영역 안에 전초기지를 지을 수 있고, 이렇게 하면 영역을 차지하고, 추가 시설을 지어 영역 내 전략/사치 자원을 획득할 수 있다.
자원을 들여 전초기지를 도시로 승격시키면 도시 안팎으로 여러 건물과 ‘지구’를 지어서 더 세밀하게 국토를 관리하게 된다. 도시로부터는 산업(생산력), 식량, 안정도, 인구 등을 얻어 도시 자체와 국가 전반적인 관리·발전에 사용할 수 있다.
특정 도시에 다른 전초기지 및 도시를 병합시킬 수 있다. 이때 병합된 영역의 생산력 및 자원은 즉시 도시에 편입된다. 그러나 영역을 여러 개 병합하려면 상당량의 자원이 필요할뿐더러, 도시의 전체적 ‘안정도’가 떨어져 반란군 등 문제가 발생한다. 이 경우 필요에 따라 도시에 흡수시켰던 영토를 다시 전초기지로 격하시키거나 아예 포기하는 등의 유동적 선택이 가능하다.
이런 ‘영역 단위’ 영토 시스템은 속도감 있는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이웃국가의 구리 산지 타일을 빼앗기 위해서는, 그 영역 내의 전초기지나 도시 만을 공략하면 된다. 더 나아가 이웃 국가 간 영토가 서로 면하게 될 확률이 높아 자연스럽게 갈등이 자주 빚어지고, 이는 잦은 전투 및 전쟁으로 비화한다.
<휴먼카인드>의 분쟁 시스템은 적국에 대한 종합적 불만이 전쟁으로 번져나가는 국가 간 다툼을 비교적 유사하게 모사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게임 초반 지엽적이고 산발적인 전투를 더 많이 유도한다. 국지전이 무조건 국가 간 총력전으로 확전되지 않으며, 이 덕분(?)에 지역 이권을 얻기 위한 전투에 조금 더 ‘부담 없이’ 임하게 된다.
전투 유닛은 여러 개를 하나로 겹쳐 운용할 수 있다. 적 유닛과 만나 전투가 벌어지면 별도의 ‘라운드’로 구성된 전투 페이즈가 펼쳐진다. 이때 ‘직접 전투’를 선택하면 합쳐져 있던 유닛들을 타일 위에 배치한 뒤 전투를 시작한다. ‘자동 전투’를 선택하면 결과만 볼 수 있다.
이러한 국지 전투와 영토 관련 다툼은 모두 외교 탭에서 ‘불만’으로 누적된다. 이 ‘불만’이 하나씩 쌓일 때마다 적국에 금화나 영토 등을 ‘요구’할 권리가 생긴다. 적국은 이를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데, 아군의 요구가 수락되면 적의 ‘전쟁 지지도’가 오른다. 반대로 해결되지 않은 요구가 많이 쌓이면 내 문명의 전쟁 지지도가 턴마다 상승한다.
전쟁 지지도는 실제 전쟁이 벌어진 이후에는 일종의 자원처럼 작동한다. 싸움에서 후퇴하거나 전투에서 질 때마다 적의 ‘전쟁 지지도’는 조금씩 줄어든다. 지지도가 낮아질수록 항복해 올 확률은 높아지고, 0에 도달하면 무조건 항복한다.
이때, 아군이 보유한 전쟁 지지도 수치에 따라 적에게 요구할 수 있는 ‘전리품’의 수준도 달라지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 지지도를 잘 쌓고 유지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플레이어가 전투에만 매달릴 수 없도록, 현실적인 ‘제동’을 걸어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전투 유닛 생산에는 각 도시가 보유한 인구수가 반드시 투입되어야 하는데, 투입량이 적지 않고 인구 확보가 전반적으로 녹록지 않아, 국익에 꼭 필요한 사안이 아니라면 가능한 한 전투를 피하도록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휴먼카인드>의 게임 목표는 <문명>에서와 비슷하게 다른 문명의 우위에 서서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국민의 과학, 문화, 경제, 외교, 군사적 발전을 도모하고, 다른 문명에 맞서거나 때로 연합한다.
그러나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 중간 과정은 <문명>과 상당히 다르다. 특히 <휴먼카인드> 개발사가 자신들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내세우는 요소로 ‘문명 선택’ 시스템이 있다.
<문명>에서는 특정 문명으로 게임을 시작하면 해당 게임이 끝날 때까지 다른 문명으로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휴먼카인드>는 백지상태로 시작해 선사-고대-고전-중세-근세-산업-현대의 타임라인을 거치면서 시대별로 원하는 문명을 고르게 된다.
시대별 선택 가능 문명의 종류는 조금씩 달라진다. 조선 문명의 경우 근세 이후에야 나타나는 식이다. 한 번 고른 문명의 특성은 이후 다른 문명으로 전환하더라도 그대로 누적된다.
개발사는 이런 시스템 덕에 <휴먼카인드>가 다양한 게임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 계산에 의하면 가능한 조합의 수는 4,000가지가 넘는다. 즉 <문명>에 비교해 자유도 높고 다양한 게임플레이를 장점으로 내세운 셈이다.
그러나 각 문명 차이점이 주로 ‘수치적’ 영역에 집중돼 이런 매력이 반감된다. 문명별 특징은 대부분 ‘수치 보너스’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선택 문명에 따라 상황적 유불리가 갈릴 수는 있어도, 플레이 경험 자체가 개발사의 말처럼 획기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휴먼카인드>에서 ‘다음 시대’로 이행하려면 ‘시대의 별’을 획득해야 한다. 건설, 군사, 과학, 상업, 농업, 확장, 탐미의 7개 분야에서 각각 특정 업적을 달성하면 ‘시대의 별’을 하나씩 얻을 수 있다.
선사시대에는 1개, 다른 시대에는 총 7개 별을 획득했을 때 다음 시대로 넘어간다. 각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별의 개수가 총 3개로 한정되기 때문에, 최소한 3개 분야를 섭렵해야 시대 발전이 가능하다. 다음 시대가 되면 ‘시대의 별’ 개수는 초기화된다.
그런데 ‘시대의 별’의 역할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대의 별’ 획득 시 이 게임의 ‘승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명성 포인트’를 함께 얻는다. <휴먼카인드>에서는 게임 종료 시점에 ‘명성 포인트’를 가장 많이 보유한 문명이 승리한다.
게임 종료 시점은 다음 조건 중 하나가 충족되었을 때 찾아온다. ▲마지막 턴 도달 ▲기술 계통도(테크트리) 연구 완료 ▲다른 제국 전부 멸망 ▲남은 제국 모두 속국화 ▲화성 탐사대 파견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지구 환경 형성.
따라서 자신의 문명이 기술 계통도(테크트리) 상의 모든 기술을 가장 먼저 연구해냈거나, 다른 문명을 죄다 무력으로 정복하는 등의 상당한 과업을 이뤘다 하더라도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이때까지 명성 포인트를 충실히 모은 문명이 최종 승자다.
반면 ‘시대의 별’ 획득 방법은 단순한 편이다. ‘군사’ 분야의 별을 얻으려면 적 유닛을 많이 없애면 되고, ‘확장’ 분야의 별을 얻으려면 많은 영토를 획득하면 된다. 이처럼 ‘정량적 기준’을 내세운 데에는 장단점이 각각 존재한다.
먼저 장점은 ‘승리법’이 직관적으로 파악된다는 데 있다. 시대별로 자기 상황에 맞춰 얻을 수 있는 별의 종류를 파악하고 이에 맞춰 단기적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이 어렵지 않아 플레이의 체감 난이도와 진입장벽이 낮고, 성취감은 높아진다.
단점은 그만큼 플레이가 단조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안전한 ‘점수 따기’식 플레이로도 승리를 쟁취할 수 있고,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장기적, 종합적 전략을 세울 필요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또한, ‘선택과 집중’으로 특정 분야, 특정 시대에서의 우위를 포기하는 대신 최종 국면에서 역전을 노리는 식의 드라마틱한 전략 구사는 오히려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