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하루를 보낸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아내가 기다리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둘만의 시간을 보내던 중,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경찰이었다. 그는 별다른 취조 과정 없이 우릴 포박했고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세상은 내가 퇴근했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 나는 '시간에 갇혔다.'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의 신작 어드벤쳐 게임 <12분>의 기본 구조입니다. 몰입감 높은 스토리를 원하는 유저들에겐 거부할 수 없는 포인트죠. 게다가 게임 속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는 제임스 맥어보이, 윌렘 데포와 같은 유명 배우들이 연기했습니다. <12분>이 출시 전부터 엄청난 기대를 받았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게임은 다소 엇갈린 평가에 직면했습니다. 흥미롭다는 의견도 있지만, 불편함을 지적하는 이도 적지 않거든요. 과연 <12분>은 어떤 게임이기에 이토록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걸까요? 진한 아메리카노보다 더욱 씁쓸했던 <12분>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 디스이즈게임 이형철 기자
- 게임명: 12분(Twelve Minutes)
- 장르: 어드벤쳐
- 개발사: 루이스 안토니오(Luis Antonio)
- 퍼블리셔: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
- 플랫폼: 스팀, Xbox
- 출시일: 2021년 8월 20일
<12분>은 철저히 포인트 앤 클릭 장르의 기본에 충실한 게임입니다. 클릭을 통해 캐릭터를 움직이고 화면에 위치한 오브젝트를 활용, 올바른 이야기를 찾아가는 형태이기 때문이죠. <원숭이 섬의 비밀>이나 <그림 판당고> 등 동장르의 클래식으로 꼽히는 타이틀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배경 역시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한 부부의 집에 신원미상의 경찰이 난입하고, 그 과정에서 '타임 루프'에 갇힌 주인공을 다룬 게 전부니까요. 게다가 게임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인물 역시 앞서 언급된 주인공, 와이프, 경찰이 전부입니다. 상황에 따라 911 대원이나 '특정 인물'과 대화를 나눌 때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화'일 뿐, 직접적으로 마주할 일은 없습니다.
반면, 이를 풀어가는 과정은 조금 다른 분위기입니다. 굉장히 복잡하고, 반복적인 구조가 펼쳐지기 때문이죠. <12분>은 개발자가 정해둔 '정답'으로 걸어가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임입니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나?' 혹은 '저 방법으로도 가능하겠는데?'와 같은 창의적 접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게임 중 만날 수 있는 특정 루프를 예로 들어봅시다. 여기서 게임이 원하는 '정답'은 아래와 같습니다.
경찰이 오기 전에 와이프에 수면제를 먹여 재운 뒤, 불이 꺼진 안방에 눕도록 유도한다. 주인공은 거실의 벽장에 숨어 경찰의 난입을 지켜본다. 집에 들어온 경찰은 고장난 안방의 스위치를 만지고 감전된다.
얼핏 봐도 꽤 복잡한 조건인데요, 여기서 유저들이 반드시 진행해야 할 과제(?)는 크게 두 개입니다.
경찰이 오기 전에 와이프에 수면제를 먹이는 것과 고장 난 스위치로 경찰을 유도하는 거죠. 다만, 이를 반복 과정 없이 한 방에 달성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수 차례 반복을 통해 스위치가 고장 났다는 점과 와이프에 수면제를 먹이는 방법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를 위해서는 또다시 수많은 타임 루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 합니다. 정말 운이 좋은 경우를 제외하면요.
시간 역시 유저들을 압박하는 요소입니다.
이를테면 게임 내에 등장하는 경찰은 특정 시간대가 되면 어김없이 대문을 두들깁니다. 그가 오기 전에 필요한 작업을 미리 해놓지 않으면 또다시 지독한 타임 루프에 갇히는 셈이죠. 별도의 스킵도 존재하지 않는 만큼, 누군가에겐 골칫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구성입니다.
만약 <12분>을 콘솔로 플레이할 경우 불편함은 더욱 가중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 게임은 포인트 앤 클릭 장르에 해당합니다. 콘솔로 커서를 옮기고 아이템을 드래그하는, 게임의 가장 기본이 되는 행동도 불편할 수밖에 없죠. 클릭 미스로 인해 다른 아이템을 잡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요. 시간제한이 있을뿐더러, 반복 요소도 적잖은 상황에서 조작까지 불편하다는 건 확실히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이쯤에서 <원숭이 섬의 비밀>과 <그림 판당고>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쳐 게임들을 돌아봅시다. 이들은 모두 화면을 클릭해 정해진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라가는 구조를 띱니다. 유저가 창의적으로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은 게임이었죠.
그럼에도 이들이 재미있는 명작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확실한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숭이 섬의 비밀>과 <그림 판당고>는 확실한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와 유머러스한 대화, 매력적인 세계관을 통해 같은 구간을 반복 수행해야 하는 유저들의 피로감을 달래줬습니다. 설령 퍼즐을 풀어가는 과정은 어려울지언정, 다른 매력이 넘쳐났던 겁니다.
반면 <12분>은 조금 다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놀랍고 몇몇 장면은 확실히 인상적이지만, 그 구조는 다소 불편하고 복잡했습니다. 같은 상황을 반복적으로 마주 해야 했고, 지금 보이는 게 엔딩인지 아니면 개발자가 원하는 루트를 맞추지 못해 처음으로 돌아간 건지조차 명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12분>은 앞서 언급한 타이틀에 비해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배경과 타임 루프라는 소재를 다루기에 특유의 구조를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2분>은 루카스 아츠의 타이틀과 달리 2021년에 출시된 '최신 게임'입니다.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불편함을 덜어줄 장치를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던 셈이죠.
퀀틱 드림에서 개발, 2018년 출시돼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떠올려봅시다. 당시 게임은 특정 구간에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거나 타 유저들의 선택을 확인할 수 있는 옵션 등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다소 불친절했던 <12분>을 떠올리면 굉장히 '친절한' 구조입니다.
물론, <12분>을 개발한 이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아마 그들은 '타임 루프'라는 설정상 이러한 장치를 추가하는 데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다른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 설정상 불러오기나 진행도 옵션 등은 자칫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타임 루프에 갇히는 답답함과 불편함'을 유저들로 하여금 직접 경험하게 하고, 하나의 콘텐츠로 승화하고자 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엔딩에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12분>은 앞서 언급한 '반복 과정'을 통해 플레이 내내 타임 루프의 답답함과 그 속에 갇힌 유저들의 불편함을 끝없이 자극합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고생 끝에 도달한 엔딩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특히 모든 정황이 밝혀지는 종반부는 다소 빈약하게 느껴졌죠.
이야기를 전개함에 있어 충격적인 반전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단서를 뿌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야기 초, 중반에 눈길을 사로잡는 몇몇 포인트를 흘려둠으로써 마주하는 이로 하여금 결말을 추측하게끔 만드는 과정이 요구되는 셈입니다.
<12분>은 이 부분에서 다소 빈약하고, 조금은 억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극소수의 단서만으로 종반부에서 갑작스레 전말을 공개하다 보니 몰입감이 떨어진 탓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너무 적다거나 과하게 숨겨져 있었다는 점도 못내 아쉽습니다. 실제로, 출시 하루 만에 게임을 클리어했다는 모 유저는 기자에게 "이걸 보려고 그 수많은 시간을 되감았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부분이 없는 건 아닙니다.
게임 전반에 깔린 성우들의 연기나 분위기는 몰입감을 끌어올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고, 모든 상황이 밝혀지는 종반부 연출 자체는 썩 괜찮았습니다. 트레일러와 연결된 게임의 엔딩 부분은 기자의 손바닥을 흥건히 적실 정도였으니까요. 해석의 여지를 남겼던 게임 로고 역시 인상 깊었습니다. 다소 불편하고 과했던 반복 과정에도 불구, 기자가 <12분>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기자에게 <12분>은 '아쉽고도 씁쓸한' 게임이었습니다. 타임 루프와 유명 배우라는 좋은 소재, 포인트 앤 클릭이라는 매력적인 장르를 활용했다는 건 긍정적이지만, 결과물은 조금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반면, 게임을 긍정적으로 보는 유저들은 <12분>의 '타임 루프'에 집중했습니다.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는 타임 루프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게임을 통해 이를 구현하고자 한 의도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에 박수를 보내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에 기준을 뒀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과 평가가 나올 수 있는 게임, <12분>이었습니다.
<12분>을 유통한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는 <저니>, <에디스 핀치의 유산>과 같은 타이틀을 통해 게임의 정의와 경계에 대한 고민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 바 있습니다. 오늘 소개한 <12분> 역시 그러한 고민과 도전의 일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이번 타이틀을 통해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가 어떠한 깨달음과 방향성을 얻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