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불 밖은 위험해도 나가야 할 시간
10월 31일, 단계적 일상회복 '위드 코로나' 전날, '인싸들은 <오징어게임> 가면을 쓰고 이태원에 가고, 아싸들은 집에서 롤드컵을 본다'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세상에 대관절 '인싸'가 어딨고 '아싸'가 어딨단 말인가? 그보다도 롤드컵이 얼마나 재밌는데, 서양 귀신 잔치에 홀려서 이태원엘 간다고? 길거리에서 밤을 보낸다고? 위드 코로나는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왔다. 담원 기아 화이팅!
이제 남은 변명은 없다. 애석하게도 기지개를 켜고 밖에 좀 나갈 시간이 되었다. 이불 속에 누워서 일하던 재택근무의 날들도 이제는 안녕이다. 기자는 당장 이번 달 부산에 지스타 취재하러 가야 한다. 물론 판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야외 활동과 완전 '거리 두기' 하지 않았지만, '위드 코로나'는 마치 "그만 뒹굴거리고 집 밖으로 나가시오"라는 주문처럼 다가왔다.
서울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28.5%의 시민들이 동네 산책을 '새롭게 발견한 즐거움'으로 꼽았다. 실로 산책은 훌륭한 취미다. 제일 먼저 돈이 들지 않는다. 음주와 카오스 던전에 찌들었던 육신을 깨우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주변을 새롭게 바라보는 감각을 준다. 산책은 아주 사색적인 행위인데, 동서고금의 철학자들도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위드 코로나는 산책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위드 코로나는 산책부터...
# 산책을 하겠습니다. 근데 이제 AR 게임을 곁들인
사건이 있는 곳에 기자가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사건이 없으면 기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충격'과 '단독'을 난무하며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세상만사에 호들갑을 부리는 것도 나름의 전략이다. 하지만 '인사이트' 넘치는 정보 전달자들로 가득한 정보의 바다에서 그렇게 살아남으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관찰자에서 체험자로 시선 옮기기는 보다 좋은 전략이다. '머니투데이'에서 인기리에 연재 중인 '남기자의 체헐리즘'이 대표적이다. 인정하자. 우리에게는 타인의 생고생을 즐기는 묘한 심리가 있다. '디스이즈게임'이 쓴 기사로도 증명할 수 있다. HMD 보급 초창기에는 VR 게임을 하는 기자들이 허공에 사지를 휘적거리는 콘텐츠가 인기였다. 생전 처음으로 <다크소울>을 처음 하면서 고통받는 모습, 165만 원짜리 게임중독 클리닉 방문기, <링피트 어드벤처>를 플레이하고 파김치가 된 후기도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기자가 해보려는 산책은 진입 장벽이 매우 낮다. 기자 개인에게 산책은 위드 코로나를 향한 위대한 첫걸음이겠지만, 독자들에게 산책이란 마음만 먹으면 무한으로 즐길 수 있는 싱거운 행위일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 나온 AR 어드벤처 <피크민 블룸>을 하면서 산책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싱겁다고? 한 번만 봐주세요. 사건이 없다잖아요.
산책은 돈이 들지 않는다. 이 리뷰에도 돈이 들지 않았다.
# 본격 산책 장려 게임 <피크민 블룸>
<피크민 블룸>은 <포켓몬 고>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나이언틱과 닌텐도의 두 번째 합작이다. 근면성실한 산책을 권장하는 게임이다. 설정상 피크민은 작은 생명체인데 모종에서부터 자라나서 플레이어와 함께 도보 여행을 한다. 플레이어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를 소유한 상태로 걸으면 된다. 그러니까, 전혀 간단치 않다.
성장에 소요되는 경험치는 오직 걸음이다. 레벨을 올리려면 걸어야 한다. 피크민을 많이 모으려면, 걸으면 된다. 피크민 성장에 필요한 것도 걸음이다. 모종을 파밍하려면 걸어야 한다. 생장 속도를 부스트하는 기능도 있는데, 걷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전작처럼 구글 맵을 미러링한 게임 속 필드 위에서 모종을 모아서 심고 또 키우는 것이 전부다.
뿌리채소를 닮은 피크민들은 '정수'를 먹고 꽃을 생산하는데, 레벨을 올리면 피크민들을 파견 보내어 모종이나 정수를 수집할 있다. 물론 걸어서 말이다. 현재 이 게임의 엔드콘텐츠는 피크민에게 정수를 먹여 나오는 꽃을 길거리에 뿌리면서 AR 필드 뒤에 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번 작에도 역시 종교시설이나 기념비 등이 랜드마크로 등장한다. 그곳 주변을 오래 걸으면 하루 내내 큰 꽃을 피울 수 있다.
매일 21시에 하루의 일과를 정리해주는 '라이프로그'가 있는데, 특별한 장소를 방문했을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듯하다.
걸어서 성장하는 <피크민 블룸>. 이 게임에선 오직 걸어야 한다.
# 진정한 실력 게임
닥사(닥치고 사냥)? 이제는 '닥걸'이다. 과금의 시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실력 게임 아니던가? 그간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게임을 너무 많이 즐겨왔다. 기자는 오랜 버릇대로 견적을 뽑기 위해서 상점부터 열어봤다. 하지만 <피크민 블룸>에서 돈으로 걸음 수를 구매할 방법 같은 건 없다.
<피크민 블룸>은 돈과 시간의 방정식에 위치와 운동이라는 엄정한 변수를 추가시켰다. 닌텐도가 좋아하는 방식이다. 닌텐도는 좀처럼 게이머들을 가만 놔두지 않는 회사다. 그러면서도 닌텐도 방식대로, 걷지 않는다고 해서 엄청난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그냥 게임의 도전에 응하지 않는 플레이어가 아쉬울 뿐이다.
스마트폰을 쥐고 흔들면 걸음 수가 어뷰징되지만, 게임의 여러 체크포인트에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 실험차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서 걸어보니 걸음 수는 잡히지만 필드 위에 족적을 남기기는 어려웠다.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무슨 수를 써봐도 효율이 가장 좋았던 건 걷기였다. <포켓몬 고> 노하우가 어디 갔겠는가? <피크민 블룸>은 정직하게 그곳에 도달해야 성과를 볼 수 있는 게임이다.
그러나 <피크민 블룸>은 동시에 아주 허무한 게임이다. 랜드마크 위에 꽃 300송이를 심으면 필드 위에 큰 꽃이 피는데, 하루면 사라진다. '*** 님이 +8 강화에 성공하셨습니다'와 같은 요란한 멘트도 남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가 이 꽃을 피웠는지 알 수 없다. <피크민 블룸>은 다른 혈맹원을 무찔러 특정 구역의 '발아권' 따위를 독점하는 게임이 아니다.
<피크민 블룸>에서는 걸음 수를 판매하지 않는다. 제일 비싼 패키지가 꽃잎을 준다. 이건 그냥 열심히 걸으라는 거다.
지하철 탑승 중(오른쪽 사진)에는 도보가 잡히지 않는다. 왼쪽 사진처럼 그냥 걸어야 한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기자는 걸어다니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라는 유명한 시구를 떠올렸다. 고생 끝에 동네 사람들 모두가 볼 수 있게 꽃 한 송이를 피워올렸는데, 누구 작품인지 이름이 남지 않는다. 게임은 마치 이렇게 대답하는 듯했다. ― '꽃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산기슭 바위에서, 오락실에서, 심지어 문화유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게는 특정한 지경에 도달한 자신의 이름을 조각과 스코어보드, 낙서 등의 형식으로 남기려는 욕구가 있다. 그렇지만 영원하게 남는 꽃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또 꽃은 누가 자기를 피워주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피크민 블룸>에서는 혼자 걷든, 여럿이 걷든 오직 달성자만이 자기 기록을 알 뿐이다.
지나간 걸음은 지나간 걸음이다. 랜드마크 주변을 순례하듯 돌았던 정보만이 개인적인 데이터로 저장된다. 이름을 남기려는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인 마음이다. 게임은 '친구'가 아니라면 열어보기 어려운 플레이어의 DB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이 마음을 채워준다. 피크민들은 플레이어가 쉬고 있을 때 여행을 떠나 방문하지 못한 랜드마크의 엽서를 보내준다. 부가적인 기능인데 피크민이 대신 걸어주는 셈이다.
<피크민 블룸>은 허무한 부분은 허무한 대로 남겨두고, 플레이어의 개인적인 데이터는 알차게 채울 수 있는 게임이다. 하긴 초원 위에 꽃 한 송이를 누가 피웠는지가 그렇게 중요하랴? 오히려 하루면 지는 꽃이니 <포켓몬 고>에서 희귀 포켓몬 잡으려고 그랬듯 위험한 장소에 들락거리지 않고, 피울 마음이 드는 랜드마크에서만 움직이기 좋겠다.
고생 끝에 꽃을 피워도 누가 했다는 증거가 전혀 남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추억으로 남는 정도다.
까다로운 랜드마크를 공략하면 동선이 이렇게 꼬인다. 학교에 막혀서 충분한 부지를 걸을 수 없었다.
# 그렇게 29,463보를 걸었다
그렇게 온종일 29,463보를 걸었다.
기자는 <오징어게임>으로 뜨거운 쌍문동에 살고 있는데 4.19 민주묘지, 솔밭공원, 각종 시비(詩碑) 등 알고리듬이 '랜드마크'로 구분할 만한 장소가 서울 안에서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북한산 옆이라서 종교시설도 많은데 그렇다 보니 <포켓몬 고> 시절부터 사람들이 왕왕 원정 오던 동네다.
기자는 아주 우스운 짓을 했다. 차량과 횡단보도를 피해서 산을 탄 것이다. 랜드마크를 금방 먹을 수 있을 줄 알고 북한산 일대의 묘비, 시비, 표지판을 전부 먹으려고 했지만, 그 주변을 충분히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등산로는 좁아서 혼자서는 산 위에 꽃을 피울 수 없다. <피크민 블룸>은 고도에 따른 보너스를 주지 않기 때문에 사서 고생한 셈이 됐다. 산에서는 한 번 코스를 타기 시작하면 하산로가 나올 때까지 걸어야 한다.
덕분에 혼자서 단풍놀이 제대로 했다. 리버뷰 아파트 사는 사람들이 한강 유람선을 타지 않듯이, 기자도 북한산을 자주 찾지 않고 멀리서 구경만 하는 편인데 게임 리뷰하느라고 북한산 둘레길을 다 돌았다. 정작 게임 리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코스였지만, 아무렴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나?
화계사에서 하산해 지하철 4호선이 다니는 길을 따라 쭉 걸어서 한성대입구역에서 여정을 마쳤다. 둘레길을 타지 않았더라면 <피크민 블룸>에서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었겠지만, 생활에 활력소를 주는 수준의 게임을 작정하고 덤볐으니 첫날치고는 레벨을 꽤 많이 올렸다. 애플워치는 17.11km를 걸었다며 신기록 달성을 축하해주더니 이내 전철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기자의 심박수를 걱정해주었다. 역시 운동 좀 해야겠다.
11월 4일의 여정. 가운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산을 타는 것은 효율이 좋지 않다
탁 트이고 넓은 땅에 있는 랜드마크를 공략하는 게 안전하고 빠르다
대체 왜 산에 갔을까? 이래서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어? 오히려 좋아
낮에 나와서 밤까지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