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ORPG <대항해시대 오리진>의 2차 CBT가 마무리됐습니다. <대항해시대> 발매 30주년 기념작으로 발표됐던 게임은 몇 차례 수정 과정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과연 이 게임은 <대항해시대> 발매 32주년을 맞이한 올해에는 나올 수 있을까요? 그보다도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요?
보름 가까이 <대항해시대 오리진>을 체험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 게임이 <대항해시대 온라인>이 주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잘 계승했다는 점입니다. 항해는 그 자체로 피곤한 일입니다. 그 피로가 이 게임에는 여실히 녹아있습니다. 먼 옛날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줄줄이 연결된 연속 퀘스트를 깨던 느낌이 되살아납니다.
이번 테스트에서는 자동 항해라던가 초반 구역 시세 조정을 1차 CBT보다 강하게 지원하면서 바다 위에 풀어놓고 마음대로 플레이하면 되는 듯한 샌드박스 형태를 가져가기 보다는 첫 번째로 선택한 제독의 연대기를 착실히 밟아가면서 초기 성장을 할 수 있는 구조를 가져갔습니다. 그래도 이 게임은, 시리즈의 전통을 잘 계승했기에, 무진장 피곤합니다. 자동화로는 극복되지 않는 피곤함이 있습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넓은 바다에서 교역으로 많은 돈을 벌고, 모험으로 희귀한 발견물을 얻고, 전투로 해적을 무찌르는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근본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의 근본은 항해로 이루어져있고, 원하는 지점까지 가기 위해서는 시간을 써야 합니다. 더 좋은 배를 뽑고, 더 좋은 돛을 올리고, 버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 게임에는 거속시(거리, 속력, 시간)의 엄정한 원칙이 작동합니다.
플레이어는 거속시 3개의 변수를 완전히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지구에 부는 바람과 온갖 해양사고까지 완전히 결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세라티 같은 슈퍼카를 뽑아도 출근길 강남대로에서는 다른 차들과 똑같은 신호를 받듯이, <대항해시대>에서는 아무리 좋은 배를 타고 다녀도 몰려드는 해적과 재해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기는 힘듭니다.
슈퍼카를 탄다면, 그만한 대우를 받기는 하겠죠. 슈퍼카를 몰고 비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게 안전하지 않듯이,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도 큰 배를 타면 강에서 활동하기 어렵습니다. 거속시의 질서는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도 엄청난 피로를 선사합니다. 이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교역 대박을 쳤을 때, 동맹항을 먹었을 때, 고랭크 발견물을 발견했을 때 재미는 꽤 쏠쏠합니다.
여담으로 <대항해시대 온라인>을 오래 즐겼던 입장에서 북해와 지중해를 이어주는 마차나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시키는 운하가 이번 작품에도 추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역품을 싣지 않는 전작의 기능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게임 안에서 요긴한 기능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겁니다.
이득규 디렉터는 인터뷰에서 <대항해시대 오리진>의 플레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플레이 패턴은 이렇다.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조금 만지다가, 사무실 출근할 때 한양으로 항해를 던져놓는 거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되면 한양에 도착해서 거래를 한다. 다시 리스보아로 던져놓고 오후 일과를 한다. 그리고 저녁에 밀도 있게 게임을 플레이하는 거다. 장거리 항해를 뛰는 데 내 인생의 시간을 많이 쓰지 않도록.
재해를 만났다, 공격 당했다, 항구에 도착했다 같은 요소들은 알림으로 울린다. 오프라인 항해가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스마트폰이나 PC에서 직접 플레이하면 항해 시간이 오프라인으로 가는 것보다 빠르다. 원래 45초 걸리는 게 오프라인으로는 1분 30초 걸리는 정도의 패널티는 존재한다.
21-01-22 TIG 인터뷰 중
안타깝게도 이번 CBT에서 이러한 플레이 패턴은 검증되지 못했습니다. 참여자의 크로스플레이를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인게임즈의 자체 플랫폼 플로어는 (<언디셈버>를 미리 만나보지 않은 입장에서) 아직 어색했고, 모바일은 디바이스의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PC로 게임을 체험한 사람들은 '언리얼' 크래시 리포트에 자주 노출됐고, 모바일을 선택한 테스터는 작은 화면으로 교역, 탐험, 전투 3요소를 챙겨야 했습니다. 알람은 울리지 않았고, 모바일에서 게임을 껐을 때 항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여러 변수가 있겠지만, 지중해에서 인도아 대륙까지 실제 시간으로 1시간 가까이 소요되는데요. 그 긴 시간 동안 유저가 할 수 있는 커맨드는 재해를 관리하거나, 항해가 길어질 것을 감수하면서 발견물을 찾거나, 해적의 급습에 대응하는 것뿐입니다. 전투에 걸리면 또 싸워 이기는 데 공을 들여야 합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의 항해는 PC에서 쳐다보고 있기 심심하고, 모바일에서는 배터리를 많이 먹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바로 크로스 플레이입니다. CBT 이후 발표된 공지사항에는 향후 크로스 플레이를 어떻게 지원하겠다는 구체적인 언급이 빠져있습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그 독창적인 게임성 때문에라도 크로스 플레이를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퇴근길에 스마트폰으로 함대를 리스보아로 출발시키고, 집에 가서 교역 결과를 체크하는 게임이 되려면 말이죠.
이번에도 <대항해시대 오리진> CBT는 대'나포'시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게임에 깊이있는 부분까지 맛보려 하다 보니 나포로 상위 배를 뺏어서 타고 다니는 게 '오피 메타'처럼 제시된 것이죠. 그 배를 갈아서 도면을 얻어서 경험치를 얻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점은 비교적 CBT 후반부에 공유된 팁입니다.
유저들이 레벨을 올린 뒤, 4티어 이상의 고성능 선박의 도면을 구하기 위해서 코펜하운 근처에 진을 치고 나포에 나섰습니다. 해적과 싸워 배를 포획하는 '나포'는 1차 CBT에서도 상위 랭크 배를 얻기 위한 필수 과제로 인식됐습니다. 이번에도 유저들은 고급 배 도면과 부품을 구하기 어려워했고 NPC의 배를 노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동해야 했습니다.
모티프는 CBT 이후 공지사항에서 "나포는 어디까지나 전투 보상의 일부로 잭팟 같은 보너스 요소로서 제공되었던 부분"이라며 "현재는 정상적인 선박 건조보다 나포를 중심으로 배를 습득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향후 "나포 선박의 성능 및 건조 재료 입수 확률 등 전체적인 요소를 재검토"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유저들은 '정석'대로 02시에 도구점에 가서 랜덤으로 등장하는 도면을 파밍해야만 하는 걸까요?
이번 CBT에서 보여지지 않은 거래소와 상회가 상위 선박 건조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여줄 카드로 등장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거래소는 플레이어간 잉여 자원을 교환하기 위한 공간으로, 설명에 의하면 "거래소 이용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성장이필요하며, 품목에 따라 최소 레벨이 다르게" 설정됐습니다. 제작진은 "이를 통해 지금보다 훨씬 용이하게 성장에 필요한 재료를 입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식 서비스에서 거래소가 생기면 나포나 도구점 순방에 대한 의존도는 내려갈 것으로 보입니다. 타 게임의 길드 개념으로 서로 부족한 자원을 만들 수 있는 '상회'를 통해서도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MMORPG 플레이 '짬'이 있다면, 거래소의 존재는 곧 '쌀먹' 가능성과 연결시키는 분들이 많겠죠? 안정적인 거래소를 지원은 게임 라이브서비스의 성패를 가를 만큼 중요한 사안이 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나와봐야 알겠지만, 특정 매물을 터무니 없는 가격에 거래하면서 유료 재화 이전을 지원하지 않게끔 거래 품목마다 평균가 밴드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테스트 기간 중, 밤 늦게까지 게임을 붙잡고 있다가 모든 것이 초기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적지 않은 허탈감이 들었습니다. 그간 게임기자로서 적지 않은 게임의 테스터로 선발되어 참여했지만, <대항해시대 오리진>은 들어가는 물리적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리셋에 대한 아쉬움이 특별히 컸습니다. '테스트는 테스트일 뿐'이라고 여기기엔, 이 게임은 꽤나 공이 많이 들어가는 게임이긴 합니다.
생각을 해봐도 이동 자체에 수십 분 단위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모바일게임은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많은 게임적 요소를 차용한 넷이즈의 <대항해의길> 뿐입니다. 그마저도 발주서를 발라서 이동 속도를 부스트하는 모델을 가지고 있죠. CBT에서 공개된 <대항해시대 오리진>의 항해속도 버프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따라서 <대항해시대 오리진>이 또 한 번 CBT를 한다는 것은 다른 MMORPG가 테스트를 한 번 더 하는 것과는 다른 무게감이 있는 듯합니다. 이 게임은 검증해야 할 요소가 아직 많지만, 잦은 테스트는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습니다. '조선 한 번 가보았으니 이제 그만', '조안 페레로 연대기 깼으니까 됐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잦은 테스트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장 OBT라도 열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그리 책임감있는 발언은 아닙니다. 유료로 결제하는 유저들이 발생하는 순간, 그들이 들인 재화 가치에 대한 존중을 해야 할 테니까요. 아무쪼록 라인게임즈와 모티프는 두문불출 끝에 1차 CBT 때보다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냈지만, 얼음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북극 항해처럼 어려운 여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시리즈의 팬으로서, 멋진 결과물을 내보이기를 기대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