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 문파, 연맹, 클랜에 들어가 다른 유저들과 노는 것은 재밌지만, 회사 다니는 것 같은 단체활동은 때로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새벽 3시에 칠 것이니 준비하라'는 '윗선'의 '명령'은 이게 나 좋자고 하는 게임인지 먹고 살기 위해 달려드는 사회생활인지 헷갈립니다. 같은 일원들끼리 공유하는 끈끈한 의리와, 마침내 바라던 바를 이루었을 때 쾌감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스트레스 없이 유유자적 홀로 놀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런 혼자서 편해지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 게임이 '사이버 분재'라고 불리우는 방치형 게임이겠죠.
저작권이 없고, 인지도가 높은 덕에 이제는 하나의 장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삼국지 SLG는 그러한 '혼자 놀기'와 거리가 아득히 멉니다. <삼국지 전략판>, <삼국지 M>에서는 천하통일을 걸고 연맹마다 온갖 중상모략이 난무했습니다. 대규모 연맹전쟁이야말로 삼국지 SLG의 진수입니다. <AFK 삼국지>처럼 방치형 삼국지를 표방하는 게임들도 이미 충분히 나왔지만, 내정과 점령으로 나의 세력을 키우는 재미는 상대적으로 덜합니다.
최근 출시한 <삼국지: 패왕>도 셀 수 없이 많은 '삼국지 SLG' 중 하나입니다. 이 게임 역시 '진수'는 대규모 연맹 결성을 통한 천하통일이지만, 굳이 그 소셜 네트워크의 길을 걷는 데 피곤함을 느끼는 유저들을 위한 솔로 모드가 꽤 길게 준비되어있습니다. 영지 관리에 해당하는 내정과 점령을 통한 세력 확장이 한 축으로 굴러가고, 다른 한 축은 '정벌'입니다.
<삼국지: 패왕>에서 플레이어는 가상의 군주를 만들어서 <삼국지연의>의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연의>의 중요한 장면마다 가상의 군주가 나타나 역사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는 콘셉트입니다. 그러니까 조조의 여포 축출 뒤에는, 관도대전에는 가상의 '내'가 있었다라는 기획이죠.
'정벌'에서는 플레이어 캐릭터를 직접 조작해 미니 던전을 크롤링하며 전투를 하면서 이야기를 보고 보상을 모을 수 있는데요. 협업 없는 싱글 콘텐츠인데 플레이 시간이 꽤 깁니다. 따라서 <삼국지: 패왕>은 동종 SLG에 비해서 스트레스 없이 나 혼자서 게임을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의 전투는 <삼국군영전>식 초현실적인 마법, 스킬이 어우러진 실시간 <토탈워> 전투 느낌입니다.
<삼국지: 패왕>은 나쁘지 않게 굴러가는 자동전투를 지원합니다. 그렇지만 '정벌'에서는 이를 꺼두고 직접 조작하는 맛이 꽤 괜찮습니다. 알아서 싸우는 전투가 아니라 커다란 이펙트의 스킬을 터뜨리고 전진해오는 방패병을 피해 기병을 돌려서 후위의 궁병을 강습하는 등의 요소를 시연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런 구성의 전투를 F2P 모바일 SLG에서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대륙의 통일을 위해서 달리는 데 무관심한 유저라면 솔로잉에 적당한 세력만 키우면서 '정벌'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삼국지: 패왕>의 솔로잉 옵션은 독특한 '숨구멍'으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솔로 던전 콘텐츠 '정벌'이 <삼국지: 패왕>만의 독특한 무기라면 멀티 SLG 부분은 '내정을 통한 발전 → 연맹 가입 → 연맹의 구성원으로 천하통일 도전'의 정석적인 모델을 구현했습니다.
아직은 <삼국지: 패왕>의 초창기이기 때문에 땅을 둘러싼 분쟁이 본격화된 느낌은 아니지만, 차차 시간이 가면 갈수록 플레이어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텔링이 형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부족전쟁>류 게임의 국룰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이미 공식 카페는 같이 게임을 할 사람을 모으는 목소리로 분주합니다. 앞으로 분명 지역의 이권을 놓고 RvR 전투가 발생할 텐데 이때 전투가 '자동 돌리고 지켜보는' 형태일지, 아니면 스킬 한 방에 역전극을 만드는 형태일지 궁금합니다.
일단 플레이어는 뽑기를 통해 좋은 장수를 뽑고, 훈련된 병사를 모아 힘을 불리고, 세력을 확장시켜 성 안팎으로 자원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내성 이외의 '식읍'은 일종의 '멀티'로 특별한 커맨드를 취하지 않아도 세금을 걷을 수 있습니다. 고급 식읍을 점령하면 태수를 임명해 더 많은 자원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여타 게임과 같이 필드에는 '도적'과 같은 NPC들이 존재해 장수를 위한 상위 장비를 파밍할 수 있습니다.
마냥 SSR급 장수를 뽑아서 도배하는 것보다는 장수간 상성을 잘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장수마다 통솔할 수 있는 병과가 정해져있기 때문에 좋은 등급의 장수들만 가지고 보병-궁병-기병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약간은 낮은 등급의 장수를 기용하더라도 균형을 잘 맞춘다면 높은 전투력을 가지고 전장에 설 수 있습니다. 또 장수별로 치료, 돌격과 같은 각자 다른 스킬을 가지고 있는데, 중요 상황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습니다.
<삼국지: 패왕>의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바로 현지화와 완성도입니다.
예를 들어 궁궐(제후 시대의 태수가 머무는 곳을 궁궐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어색합니다)에서 '정령'이라는 것을 반포할 수 있는데, '정치상의 명령'이겠지만, 산과 들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그것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이렇게 게임에는 어색한 한국어가 심심치 않게 드러나는데, 선이 굵고 화려한 중국산 그래픽과 더해지면서 몰입도가 떨어집니다.
또 이 게임의 정벌은 일러스트를 심하게 돌려쓰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코에이 <삼국지>에서 출발한 장비 일러스트를 가진 캐릭터가 일반 병사, 하후돈, 그리고 장비로 등장합니다. 이런 안타까운 만듦새는 착오의 영역에 가까워 보이는데, 사소한 부분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집중도를 떨어뜨려서 아쉬웠습니다.
이렇게 섬세한 마무리가 되지 않은 모습이야말로 이런 장르 게임의 고질병입니다. 게임이 <삼국지연의> 500주년 기념작을 표방하고 있다면, 광고를 잘 하는 것보다 게임의 완성도를 끌어올려서 '삼국지 아저씨'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삼국지: 패왕>은 그런 기대를 걸어볼 만큼 솔로잉의 맛이 독특한 게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