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브의 스팀덱 출시 이후, 일부 얼리어답터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게이밍 UMPC 시장이 확장되고 있다. 이전까지 게이밍 UMPC가 보편화하지 못했던 이유로는 높은 가격과 고르지 못한 사용성 등이 꼽힌다. 스팀덱은 두 가지 지점에서 진일보를 이루고, 기존 스팀 플랫폼 유저들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게이머들이 새로운 제품군에 눈뜨게끔 했다.
스팀덱을 통해 카테고리의 시장성이 확인된 이후, 전통적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스팀덱과 비교해 프리미엄 성능으로 승부수를 띄운 데 주목할 만하다. 물론 가격 역시 더 높지만, 성능 상승 폭에 비해 가격 인상은 크지 않다는 평가. 또한 본격적 ‘게이밍 노트북’들과 비교하면 가성비가 절대 아쉽지 않은, 틈새를 노린 제품군으로 볼 수 있다.
레노버의 리전고(Legion Go) 역시 그러한 제품 중 하나다. 강력한 AMD 라이젠 Z1 익스트림 프로세서와 16GB7,500MHz LPDDR5X 온보드 메모리를 탑재하면서 스팀덱보다는 Asus의 ROG Ally와 비슷한 성능을 갖췄고, 동시에 최저가 109만 9,000원의 타협적 가격을 책정한 제품이다.
또한 QHD급 해상도, 최대 밝기 500nit, 8.8인치 IPS 디스플레이, 그리고 닌텐도 스위치와 비슷한 분리형 컨트롤러를 차용하면서 경쟁 제품과 차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사용 체감은 어떨까? 리전고의 강력한 스펙과 유니크한 메커니즘은 게임 경험을 유의미하게 증진시켜주는 요소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리전고를 실물로 확인할 때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제품의 순수한 크기다. 공식 정보에 따르면 컨트롤러를 부착한 상태에서 정확한 규격은 298.83mm x 131mm x 40.7mm에 달한다. 298mm x 117mm x 49mm인 스팀덱과 비교했을 때 가로 길이에서는 비슷하지만, 두께와 세로 길이는 짧지 않은 차이가 난다.
경쟁 기기 대비 더 분명한 물리적 격차는 무게에서 느낄 수 있다. 컨트롤러를 부착한 상태에서 무게는 854g이며, 컨트롤러를 분리한 본체만의 무게를 따져도 640g이다. 스팀덱 OLED(약 640g)나 ROG Ally(608g)에 비해 33%~40% 더 무거운 셈이다.
스팀덱 역시 처음 출시됐을 때에는 지나치게 크다는 반응이 나왔다. 리전고와 나란히 두면 작아 보인다.
실제 무게에 더하여 ‘체감 무게’를 한층 가중하는 요소도 있다. 다소 아쉬운 어고노믹스(인체공학) 디자인이다. 같은 무게의 제품이더라도 쥐는 방식이 편안하다면 고른 무게 분산으로 사용 피로감이 덜해지는 효과가 있다. 스팀덱과 ROG Ally가 호평받았던 지점이기도 하다.
반면 리전고는 컨트롤러 유닛 자체가 커서 손에 쥐었을 때의 부피감이 다소 부담스럽고, 손바닥이 닿는 부분이 곡면으로 디자인되어 있지 않아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부피, 무게, 설계에서 불리함을 가지고 있는 리전고. 그렇다면 휴대용 기기로서는 경쟁력이 부족한 것일까? ‘휴대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답변은 달라질 수 있다.
눈으로 보기에도 그립의 부피감이 다르다
미니 PC나 태블릿 PC와 같은 제품군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모든 ‘휴대용 기기’가 손에 직접 파지한 채 사용하는 상황만을 가정하고 설계되지는 않는다. MS의 서피스 시리즈처럼 손에 들었을 땐 태블릿, 데스크에 올려뒀을 때는 일체형 PC로 사용할 수 있는 이중적 설계를 지닌 제품군도 있다.
리전고 역시 이와 비슷한 제품 유형으로 여길 만하다. 컨트롤러 분리 메커니즘과 킥스탠드(받침대)를 도입, 본체를 데스크 위에 세워두고 원격으로 게임을 컨트롤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킥스탠드는 다양한 각도를 지지할 수 있는 프리스탑 힌지를 사용하고 있다.
거치 상태로 사용하면 리전고의 다소 부담스러운 무게와 크기에서 오는 단점은 상쇄되고, 반대로 8.8인치의 (비교적) 큰 화면에서 오는 장점은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휴대 모드와 거치 모드 중 어느 쪽을 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리전고의 물리적 편의성에 대한 평가는 서로 갈릴 것으로 보인다.
프리스탑 힌지를 사용해 원하는 각도로 세울 수 있다.
상술한 설계적 특징뿐만 아니라, 제품의 기타 특성과 성능을 볼 때도 리전고는 직접 손에 쥐는 기기보다는 ‘거치형 휴대용 PC’로서의 정체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하다.
이를 대표하는 기능으로 ‘FPS 모드’가 있다. 리전고의 우측 컨트롤러 하단에는 광학 센서와 함께 ‘FPS 모드’를 켜고 끌 수 있는 토글스위치가 달려 있다. 컨트롤러의 FPS 모드를 켠 뒤 제품에 동봉되는 받침대와 결합해 세우면, 일종의 버티컬 마우스로 사용할 수 있다.
우측 컨트롤러에는 엄지로 굴릴 수 있는 휠도 장착되어 있어 마우스의 기본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다. 원래 ‘백 버튼’ 역할이었던 두 개의 버튼도 이 상태에서는 사이드 버튼 역할을 한다.
사실 FPS 모드에 진입하지 않아도 우측의 트랙패드를 사용하면 마우스 커서 컨트롤이 가능하다. 하지만 FPS 모드 상태에서는 일반 마우스에 한층 더 가까운 사용성이 제공된다. 거치 상태에서의 메리트를 강화하는 메커니즘인 셈이다.
한편 리전고는 휴대용 PC에는 다소 ‘오버스펙’일 수 있는 디스플레이를 가지고 있다. 최대 QHD 해상도, 144hz 주사율 등의 디스플레이 사양은 사실 휴대용 기기보다는 데스크탑용 게이밍 모니터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실제로 이 사양을 리전고에서 온전히 누리는 것은 기술적 한계로 어렵다. 강력한 라이젠 Z1 익스트림 칩셋을 사용하는 등 비교적 높은 프로세싱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일부 데스크탑 PC에서도 구현하기 힘든 QHD 해상도 144 프레임을 이정도 기기에서 문제없이 구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QHD 해상도에서 트리플A 게임을 구동해 보면, 인게임 그래픽션을 중간 수준으로 맞췄을 때 30프레임을 밑도는 경우가 많아 쾌적한 플레이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 라데온의 업스케일링 기술 RSR(슈퍼 해상도)이 뒷받침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FSR과 달리 게임이 아닌 드라이버 수준에서 구현되는 기능으로, 인게임 해상도를 원하는 수준으로 낮춘 뒤 RSR을 켜면 자동으로 네이티브 해상도로 업스케일링 해준다.
RSR을 이용하면 이론적으로 퍼포먼스와 퀄리티를 동시에 챙길 수 있다. 다만 동류의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진짜’ 고해상도 그래픽과는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래픽의 디테일이 뭉개지고 전반적 비주얼이 흐릿해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또한 화면이 아주 크진 않은 만큼 그러한 차이가 눈에 매우 잘 들어오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기기의 높은 성능을 바탕으로 고퀄리티 그래픽을 60프레임 이상의 준수한 퍼포먼스로 즐길 수 있어 만족도가 크다. 특히 인게임 해상도를 바로 아래 단계인 1920 x 1200로 맞추고 RSR을 활용하면 화질 희생을 거의 체감하지 않은 채 쾌적한 게임 플레이가 가능했다.
인게임 해상도 1920 x1200, 기기 해상도 2560 x 1600 상태에서 RSR을 적용한 화면
휴대용 게임 기기에서 그래픽 성능과 함께 평가되어야 하는 필수 요소가 바로 배터리 지속 시간이다. 리전고의 배터리 용량은 49.2Wh로, ROG Ally Z1 익스트림(40Wh)보다 다소 높고, 스팀덱 OLED(50Wh)와 비슷한 수준이다.
리전고는 TDP(열 설계 전력) 설정과 OS 전원 설정을 통해 성능과 전력 소모 사이의 밸런스를 조절할 수 있다. 만약 이들 옵션을 성능 중심으로 설정하면 트리플A 기준으로 약 1시간 30분 정도를 플레이할 수 있다. 반대로 저전력 모드로 구동하면 같은 환경에서 약 3시간 정도 배터리가 지속된다.
그러나 전력 소모를 줄이면 그만큼 성능 제한도 커지기 때문에 고성능 기기로서의 본질적 메리트는 줄어들게 된다. 최저전력 모드로 설정하면 스팀덱과 비슷한 1280 x 800해상도로 그래픽을 설정해도 일부 게임에서 프레임이 30을 밑도는 현상이 확인됐다. 따라서 리전고의 매력을 만끽하려면 전원을 연결할 필요가 있다.
혹은 사용 상황에 맞춰 성능 조절 옵션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원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소 성능을 줄이고, 전원을 연결했을 때는 최대 퍼포먼스를 내도록 설정하는 방식으로 고점이 높은 기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보자.
성능과 절전 사이에서 조절할 수 있다.
이처럼 리전고는 강력한 기본 스펙과 성능 조절 옵션을 통해 다양한 유저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연한 기기다. 만만치 않은 무게나 다소 부족한 어고노믹스 디자인, 그리고 살짝 아쉬운 배터리 수명 등에서 오는 휴대기기로서의 아쉬움은 거치 모드로 전부 상쇄된다.
그런데 이런 확고한 장점들이 있는 반면, 리전고를 완성도 높은 ‘게이밍 기기’로 추천하기에는 다소 주저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그중 첫째는 우측 컨트롤러의 애매한 포지셔닝이다. 앞서 언급된 FPS 모드는 기존 핸드헬드 PC의 아쉬운 지점을 보완해주는 혁신적 기능이기는 하다. 더 나아가 DPI 조절이나 버튼 매핑 등의 맞춤 설정도 지원하고 있다.
다만 실제 사용해 보면 일반 PC의 키보드·마우스 조작 체계를 바로 대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우선 버티컬 마우스를 닮은 물리적 디자인의 한계가 있다. PC 게이머 대부분은 오랜 세월 수평적 마우스 디자인에 익숙해져 왔기에 축적된 ‘머슬 메모리’가 수직적 디자인의 리전고 마우스와 즉각 호환되기는 좀처럼 어렵다.
받침대 결합 상태의 우측 컨트롤러
또한, 시중의 버티컬 마우스는 손목의 방향이 바뀌었을 뿐, 파지법 자체는 일반 마우스와 비슷하다. 반면 조이스틱처럼 쥐어야 하는 리전고 컨트롤러는 사용감 측면에서 이질감이 조금 더 크다. 따라서 미세한 컨트롤로 승부가 갈리는 PvP 장르나 고난도 FPS를 PC에서처럼 즐기려면 상당한 숙달이 필요할 듯하다.
FPS모드의 또다른 문제점은 ‘키 매핑’의 복잡성이다. 리전고에는 FPS 모드를 위한 몇 가지 버튼 레이아웃 프리셋이 준비되어 있으나, 여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게임이 많지는 않고, 게임마다 최적의 조작성을 위한 개별 커스터마이징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게임패드와도 다르고, 키보드·마우스와도 다른 조작체계를 자신에 맞게 최적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기자의 경우 <오버워치>를 위해 키 할당에 약 40분가량을 소모했다. 키를 좌/우로 나누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사용 빈도에 따른 배치 우선도를 결정하는 일, 직관에 위배되는 배치를 수정하는 일, 버튼 두 개를 동시에 조작하는 상황을 고려하는 일 등은 모두 상당한 고민을 낳게 했다.
다만 이것은 레노버가 추후 더 많은 FPS 레이아웃 프로필을 제공한다면 완화될 수 있는 문제로 보인다. 또한, 우측 컨트롤러의 설계에 치명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결국 숙련을 거치고 나면 마우스로서의 활용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프리셋을 제공하지만 아직 매우 다양하지는 않다.
중앙 애플리케이션인 리전 스페이스의 완성도는 별도로 짚어볼 만한 사안이다.
리전 스페이스는 리전고에 설치된 모든 게임을 한눈에 살피고 기기 설정을 바꿀 수 있는 중앙 애플리케이션이다. 좌측 컨트롤러의 전용 바로가기 버튼을 누르면 실행되며, 이미 실행 중일 때에는 이 버튼을 눌러 게임과 리전 스페이스를 오갈 수 있다.
동일 기기인 ROG Ally, 더 나아가 스팀덱의 스팀OS 역시 출시 초기에는 '미완성'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마찬가지로 리전 스페이스도 아직은 보완할 구석이 많다. 첫째 문제는 반응성이다. 최초 구동에서부터 화면 전환, 버튼 반응 속도 등이 즉각적이지 못하다. 간혹 아예 전용 버튼에 반응하지 않기도 한다. 위에 언급한 <오버워치>의 매핑 작업이 조금 더 지연됐던 이유다.
전반적 UI 완성도 역시 보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동일한 섹션 안에서도 일부 버튼은 터치스크린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일부 버튼은 반드시 컨트롤러로 조작해 접근해야 하는 등 조작 일관성이 떨어졌다.
리전 스페이스 메인화면
그 외 개선되어야 할 문제를 꼽자면 몇 가지 더 있다. 전원을 연결한 상태에서 우측 트랙패드 조작시 커서가 빠르게 떨리듯 튀는 증상이 있다. 조이스틱의 데드존(조작해도 반응하지 않는 영역)이 지나치게 넓게 설정된 반면, 이를 소프트웨어적으로 조절하는 기능이 아직 없다(레노버는 해당 기능을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게임 중 다른 앱을 열었다가 돌아왔을 때, 컨트롤러 조작이 먹통이 되는 현상도 자주 일어난다. GPU 드라이버 문제인지 일부 게임에서는 해상도 오류가 일어나 화면이 잘리거나, 비교적 저사양 게임인 <앨런 웨이크 리마스터>가 7프레임으로 작동하는 현상도 발생했다.
# 그럼에도, ‘게임 잘 되는 휴대용 PC’ 찾는다면
이렇듯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다수 있지만, 관점에 따라서 리전고는 현재 상태로도 여전히 좋은 구매 선택지가 될 수 있다. UMPC로서의 뛰어난 범용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하면 고민 없이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다.
우선 스팀덱을 제외한 상당수의 UMPC처럼 리전고는 윈도우 11 OS를 사용하는 PC이다. 스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게이밍 플랫폼을 이용하는데 아무런 제한이 없다. 양질의 무료 게임이 쌓여있는 에픽게임즈 스토어를 그림의 떡처럼 바라볼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
윈도우즈 기반이기 때문에 같은 MS의 게임패스와 같은 구독서비스 사용도 지극히 간편하다. 또한 PC에 설치된 스팀 게임을 원격으로 플레이하는 '스팀 링크'를 이용하면 144hz 주사율이 빛을 발한다. 스팀링크는 최대 120프레임을 지원하고 있으므로 PC 사양이 충분하다면 리전고에서 최신 게임을 120의 고프레임으로 즐길 수 있다.
더 나아가, 컴팩트한 블루투스 키보드와 조합할 경우 리전고는 랩톱이나 태블릿PC 대용품으로 사용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특히 이렇게 게이밍 바깥의 활용 방법에 집중하면 특유의 범용성이 더욱 매력을 발하며 앞서 '오버스펙', 혹은 애매한 특징으로 생각됐던 피쳐들이 확연한 장점으로 탈바꿈한다.
예를들어 QHD로 OTT를 감상하거나, 8.8인치 화면에서 문서 작업 및 기타 업무를 보는 등의 사용환경을 가정하면 동급의 UMPC와 비교해 큰 만족을 제공할 만하다. 우측 컨트롤러의 FPS 모드 역시 당장 고난도 슈팅 게임을 하기엔 어려울지 몰라도 일상적인 마우스로 활용하기에는 '숙달'이 거의 필요 없다.
물론 이렇게 UMPC로서의 역할을 평가하다 보면, 휴대성이 더 좋거나 화면이 더 넓은 본격적 UMPC 및 태블릿 PC 제품들과 견주는 것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비교에서는 리전고의 강력한 게이밍 성능, 전용 소프트웨어, 탈부착 컨트롤러의 존재가 기기를 차별화해준다.
이렇듯 리전고는 순수 게임기로서의 사용 편의에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지만, 사용자의 접근에 따라 그 다양한 활용성을 끌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기기다. 가격대비 강력한 성능과 범용성에 끌리는 유저라면 구매를 고려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