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네 명 이서 만든 인디게임이 스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인기의 주인공은 게임 <던그리드>. 각종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는 스트리머들이 앞다퉈 <던그리드>를 플레이했고, <던그리드>가 출시된 스팀에서는 2월 28일 '최고 인기 제품'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제작사 '팀호레이'는
<던그리드>의 장르를 ‘로그라이트’(Rogue-LITE)라고 정의했다. ‘로그라이크’장르의 요소를 넣었지만, 그보다 더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랜덤 던전,
아이템 랜덤드랍 등의 이유로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하는 로그라이크 게임은 아직 국내에는 생소한 장르다. 그러나 <아이작의 번제>, <다키스트 던전>, <엔터 더 건전>, <데드셀>같은 게임들이 스트리밍 등으로 유저들에게 알려져 차츰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어렵고 자극적인 로그라이크 게임과 ‘가볍게 플레이한다’는 말은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던그리드>는 ‘가벼운 로그라이크’를 표방했고, 실제로 인기를 얻고 있다. 로그라이크 게임이 뭐길래, 그리고 <던그리드>는 어떤 게임이길래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디스이즈게임 박수민 기자
#어렵고
자비 없는 만큼 화끈한 게임, 로그라이크
1980년 <로그>라는 게임이 등장했다. 그래픽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나 #같은 문자로 캐릭터와 몬스터, 던전을 표현했다. 매번 플레이 할 때 마다 맵이 바뀌었고, 몬스터의 배치나 아이템 드랍은 랜덤이었다. 도중에 저장 및 불러오기를 할 수 없었고, 캐릭터가 한번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로그>의 플레이 화면. S라고 쓰여 있는 것은 몬스터 ‘snake’를 뜻하고 @는 유저 캐릭터를 뜻한다
<로그>는 캐릭터를 더 강하게 성장시키는 것이 포인트인 RPG장르 게임이다. <로그>의 정신을 계승한 로그라이크 게임들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로그라이크 게임은 최근 흔하게 접할 수 있는 RPG장르 게임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로그라이크 게임을 ‘로그라이크 답게’만드는 요소는 바로 죽음에 따른 패널티에 있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던 온라인 MMORPG에서의 죽음을 생각해 보자. 경험치 하락 등의 패널티를 조금 받기는 하지만 레벨이나
장비 등은 대부분 유지된다. 장비 파손이나 화폐 손실, 스텟 패널티를 주는 경우도 있으나 모든 것을 잃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는 RPG에서의 죽음은, 기껏 해야 아이템 조금 잃는 것 뿐이다.
그러나 로그라이크 게임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면 강력한 패널티를 받게 된다. 이는 로그라이크 게임의 큰 특징 중 하나이며, 패널티는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 습득했던 아이템, 레벨, 진행도가 초기화되는 것. 유명 로그라이크 게임 <아이작의 번제>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런 로그라이크 게임의 특성 때문에,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여태까지 쌓아왔던 것들을 모두 잃게 된다. 성장이 초기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로그라이크 게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긴
호흡’의 성장을 할 수 없다. 긴 호흡의 성장에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특정 재료나 아이템, 혹은 스텟을 ‘쌓는다’는 개념인데, 로그라이크 게임에선 죽음에 대한 패널티 덕분에 성장에 필요한 것을 차곡차곡 쌓기 매우 힘들기 때문.
시작하자 마자 전설 아이템을 줄게. 뭐, 잘 해봐. 어차피 죽으면 끝이니까.
RPG는 어디까지나 ‘내 캐릭터를 강하게 성장시키는 것’이 포인트다. 이와 같은 성장의 초기화나 짧고 강렬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성장모델은 ‘로그라이크적’인 다른 요소(랜덤맵, 높은 난이도, 제한적인 저장 및 불러오기 등)와 결합해 유저로 하여금 높은 수준의 긴장감과 간절함을 느끼게 한다.
운이 좋아 좋은 장비를 착용하고 강해진 캐릭터가 한 순간의 실수로 죽게 된다면 그만큼 허망한 일도 없을 것이다. 몬스터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해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등줄기엔 식은땀이 흐르고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로그라이크 게임의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는 긴장감은 '죽음의 의미'가 다른 게임과 남다르기 때문인 셈이다.
#로그라이크
게임으로서의 <던그리드>
<던그리드>는 기본적으로 로그라이크 게임의 특성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유저는 용사로서, 의문의 던전이 모든 걸 빨아들여 폐허가 된 마을로 간다. 정체불명의 던전에 들어가 층층이 구성된 던전의 최하층까지 도달해 최종보스를 무찌르면 된다.
각 층에서 실질적으로 몬스터를 물리치고 아이템을 획득하는 방의 배치는 매번 던전에 들어갈 때 마다 달라진다. 방의 몬스터를 모두 사냥하면 일정확률로 상자가 등장하고, 상자를 열면 랜덤 장비를 얻을 수 있다.
같은 1층인데도 방의 배치가 다르다
장비 아이템은 무기와 보조장비, 악세서리로 구분되며 방어구류(갑옷류)는 악세서리에 포함돼 있다. 무기는 사거리, 무기 고유 스킬, 공격속도, 옵션 등으로 각 무기의 특색을 살렸다. 양손무기인 창은 리치가 길고 좁으며 대쉬공격력이 증가하고, 원거리 무기는 정해진 장탄수를 모두 소진하면 일정 시간의 장전 시간을 가지는 식.
"우리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만든 역작들, 숏소드라네!"
로그라이크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유저라면 방의 난이도도 제법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각 방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원거리공격, 기습, 기절 공격 등 다양한 방식의 공격을 하며 여러 종류의 몬스터가 나와 다양한 공격이 조합되면 유저 입장에서는 옥죄는 듯 한 압박감을 느낄 수도 있다.
던전은 3층씩 구분돼 필드를 형성하고 있다. 1층부터 3층까지는 ‘지하감옥’ 필드고, 4층부터 6층까지는 ‘혹한지대’ 필드인 식이다. 3층, 6층, 9층 등 3의 배수 층에서는 보스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 각
보스몬스터는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보스몬스터를 물리치면 다음 필드로 넘어갈 수 있고, 대량의
골드와 HP회복, 아이템 상자가 드랍된다.
<던그리드>의 초반 던전에서 난이도를 담당하고 있는 음표 유령(?)과 해골강아지
그러나 사실, <던그리드>는 난이도가 유난히 어려운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교하고 섬세한 도트그래픽과 제작자의 소소한 개그센스가 엿보이긴 하나, 그런 요소를 갖춘 로그라이크 게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가볍고 쉽기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로그’라이트’게임 <던그리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이 말을 빌려 <던그리드>를 설명한다면, 로그라이크는 죽어서 절망을 남기고 <던그리드>는 죽어서 ‘골드’를 남긴다고 할 수 있겠다.
<던그리드>는 다른 로그라이크 게임처럼 사망 시
모든 아이템을 몰수당하지만, 딱 한가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있다. 게임 내 화폐로 쓰이는 ‘골드’가 그것이다. 던전에서 획득한 골드를 무한정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용사
레벨이 1일때는 2000골드까지 가지고
갈 수 있고, 레벨이 오를 때 마다 100골드씩
추가돼 최대 레벨인 30레벨에는 5000골드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
던전 내에서 일시적으로 스텟을 올리는 음식의 가격이 1000골드~2000골드 정도의 가격이고 던전 내에서 랜덤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장비의 가격 또한 1000골드 안팎의 가격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5000골드는
많지 않은 금액이라고 생각되기 쉽다.
유저는 던전을 탐험하다가 특정 층에 도달하면 원래 마을에 있었던 NPC들을 구출할 수 있다. NPC를 구출했다면, 유저가 마을에 머물러 있을 때 ‘율포드’를 통해 구출한 NPC에 맞는 건물을 세울 수 있다. 이 때 골드가 사용된다.
건물의 종류는 훈련소, 상점, 대장장이, 제단, 의상실, 총기공방으로
총 6가지다. 각 건물에서는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건물의 특성에 맞는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훈련소에서는 레벨마다 1씩 받는 스킬포인트로 패시브 스킬을 찍을 수 있으며 상점에서는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골드로 미리 랜덤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는 식.
게임을 반복해서 플레이하고 건물이 하나 둘 늘어가면서, 유저는 죽음을 맞이해도 처음보다 더 앞서나간 출발선에서 게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용사가 던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던전 내에서의 성장은 단절되지만 마을을 통한 용사 자체의 성장은 단절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던그리드>는 컨트롤이
받쳐주지 않거나 던전 아이템 파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경우일지라도, 반복해서 플레이하다
보면 점점 더 좋은 조건에서 게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기존 로그라이크 게임보다 좀
더 손쉽게 높은 난이도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고, 이는 유저의 체감 난이도가 낮아지는 결과를
불러온다.
또한 건축 시스템은 기존 로그라이크 게임의 난이도를 높이는 요소 중 하나였던 ‘랜덤성’을
다소 줄일 수 있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상점에서 파는 아이템은 여전히 랜덤이고 대장장이가 제작해 주는 아이템도 여전히 랜덤인 등, 랜덤성이
살아있기는 하다. 그러나 확률에 의존하는 랜덤의 특성상 ‘한번
더 뽑을 수 있는 기회’의 의미는 랜덤성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다. 제단의 게이지를 채워 얻을
수 있는 전설 아이템의 종류는 랜덤이지만 ‘확정적’으로 전설아이템을 얻을 수 있고, 훈련소를 통해 올릴 수 있는 패시브 스킬은 유저의 입맛대로 정할 수 있으며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제단 시스템은 던전을 돌면서 파밍한 아이템이 다음 도전에 영향을 줄 수 있게 한다
<던그리드>가 너무 쉽고 로그라이크 같지 않다고 평가받는 이유로는 맵 구조의 반복이나 몬스터 공격 패턴의 단순함 등 여러 이유가 꼽힌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게임이 진행될수록 체감난이도가 낮아지는 이러한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던그리드>가 ‘쉬운
게임’ 이었기 때문에 로그라이크라는 다소 매니악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높은 난이도와 사망 시 겪는 깊은 좌절감 때문에 쉽사리 손 댈 수 없었던 로그라이크
장르의 진입장벽을 몇 푼의 골드를 통한 긴 호흡의 성장으로 낮춰냈고, 이는 곧 좋은 성적으로
드러났다.
제작사 ‘팀호레이’는 스팀에 등록된 <던그리드>의 소개란에 로그’라이트’게임 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들의 말마따나<던그리드>를 정통파 로그라이크 게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그라이크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던 가벼움이 <던그리드>안에서 섞임으로써 더 폭넓은 유저들이 로그라이크의 매력에 빠져 들 수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