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가치 조차 없는 ‘욱일 제국’
정보가 처음 공개됐을 때부터 <레드얼럿3>는 국내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바로 ‘연합’과 ‘소련’에 이어 3편에서 처음 등장하는 제3의 진영 ‘욱일 제국’(Empire of the Rising Sun)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을 모티브로 삼은 가상의 국가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욱일 승천기’와 비슷한 디자인의 문양을 심볼로 삼고 있습니다. 시나리오상으로도 연합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시작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죠. 이런 진영이 등장한다는 것은 게임이 자칫 ‘군국주의 미화’로 까지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왼쪽이 욱일 승천기, 오른쪽이 <레드얼럿3>에 등장하는 ‘욱일 제국’의 심볼마크.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욱일제국’의 등장은 일본 군국주의의 미화라고 보기 힘듭니다. 아니, 오히려 일본에 대한 풍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유닛들의 디자인(대표적으로 ‘유리코 오메가’)도 그렇지만, 욱일제국이 연합과 소련 시나리오에서 동네북으로 두들겨 맞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진지하게 EALA스튜디오가 ‘고도의 일본 안티’는 아닐지 의심스러워질 정도입니다.
물론 연합과 소련이 아닌, 욱일제국 시나리오 캠페인 중에는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머리에 살짝 힘줄 불거질 내용이 조금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욱일제국이 ‘일본’이 아닌 가상의 국가라는 점, 그리고 <레드얼럿>이라는 게임 시리즈의 분위기와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크게 신경 쓰이는 수준은 아닙니다. 충분히 즐기는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더군요.
욱일제국 영웅유닛 ‘유리코 오메가’의 원화 이미지. EALA는 일본안티??
애당초 <레드얼럿> 시리즈는 ‘미국’에서 만든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추종자들’(=소련)이 미국 본토를 탱크로 짓밟는가 하면, 다량의 폭탄으로 펜타곤(미국 국방성)을 박살낸다는 식의 내용이 거리낌 없이 등장하는 게임입니다. 심지어 시나리오 전개에 따라서는 온 세계가 빨갛고 빨간 공산당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만큼 ‘욱일 제국’의 등장 역시 그냥 인상 한번 찌푸려주거나 한바탕 웃어주면 끝날 문제입니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나 할까요? 장담컨데 만약 이 게임을 하고 일본 군국주의에 동경을 품는 마음이 생긴다면 당장 가까운 정신병원에 가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레드얼럿3> 소련군 캠페인 중의 한 장면. 자유의 여신상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레닌 상을 세웁니다. 게임 분위기 자체가 이러다 보니 오히려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다는 느낌.
참고로 욱일제국은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나올법한 디자인의 다양한 메카닉 유닛을 주요 특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진영에 비해 빠른 속도로 기지 확장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C&C3의 '완성 버전' |
자, 이제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죠. <레드얼럿3>는 지난해 발매된 <C&C3: 타이베리움 워> 이후 1년 6개월 만에 나온 작품입니다. <C&C3 확장팩: 케인의 분노>를 기준으로 하면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출시됐죠.
굉장히 빨리 나온 작품인 만큼 전체적으로 <레드얼럿3>는 <C&C3>의 ‘완성 버전’ 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면 <C&C3>와는 굉장히 많이 다릅니다. 그래픽 컨셉트만 봐도 그렇죠. <C&C3>가 더러운 외계광물로 인해 황폐화된 지구를 실감나게(암울하게) 표현한 반면, 이 게임은 ‘가상의 현대’를 북미 만화풍의 밝은 분위기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C&C3>에 없었던 ‘해상전’이 등장하고, <C&C 제너럴>에 있었던 ‘스킬 시스템’이 재등장하는 등 시스템적으로도 변화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전체적으로 <C&C3>와 크게 다른 점을 느끼기 힘듭니다. 그래픽의 ‘컨셉트’는 달라졌어도 ‘퀄리티’는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심지어 게임의 하드웨어 요구사항 조차 크게 다른 점이 없고, 시스템 역시 달라진 점들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무언가 ‘획기적으로’ 달라진 점은 없습니다.
<레드얼럿> 시리즈의 전통인 해상전이 다시 등장!
<C&C 제너럴>에 있었던 ‘제너럴 시스템’(스킬 시스템)도 ‘일급 비밀 무기’ 시스템으로 다시 부활했습니다.
게임성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컨텐츠가 다양해지고 <C&C3>와 색다른 느낌의 RTS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분명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무언가 <C&C3>에서 획기적으로 달라진, 엄청나게 발전된 게임의 모습을 기대했다고 하면 다소 실망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지난 1996년 출시된 <레드얼럿> 1편은 1995년 발매된 <C&C> 1편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지만, 더욱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기 때문에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레드얼럿3> 역시 그때와 비슷하다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외전’이라는 거죠.
<C&C3>를 해봤다면 그냥 그 때의 그 느낌으로 게임 즐겨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딱 <C&C3> 외전이라는 느낌.
‘싱글’ 플레이가 아니다! 2인1조 시나리오 켐페인 |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얼럿3>에는 기존 <C&C>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변화가 하나 준비 되어 있습니다. 바로 ‘협동 시나리오 캠페인’ 입니다.
<레드얼럿3>의 모든 시나리오 캠페인은 ‘2인1조’로 진행됩니다. 플레이어 외에 또 다른 사령관이 유저와 함께 공동으로 미션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 2의 사령관은 인공지능(AI)에게 맡길 수도 있고, 온라인에 접속해서 다른 유저들에게 맡길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협력미션이 그냥 인공지능과 2:1로 단순하게 멀티 플레이 커스텀 매치를 하는 느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미션은 온라인에 접속해서 다른 유저, 혹은 인공지능과 같이 진행할 수 있습니다.
아군의 특수요원 ‘타냐’를 적진에 침투시키는 미션을 예로 들면, 한 명의 사령관은 타냐를 직접 조종해서 직접 적의 기지에 침투시켜야 하고, 다른 사령관은 타냐가 안전하게 침투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사격을 하면서 다른 방향에서 밀려 들어오는 적을 차단해야 합니다.
게임은 모두 합쳐 27개의 미션을 선보이는데요, 모든 미션이 이런 식으로 굉장히 치밀하게, 그리고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협동 플레이는 <C&C>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완성도와 재미가 굉장히 훌륭합니다. ‘나는 RTS는 무조건 멀티 플레이만 해’라는 유저들이라도 한 번쯤은 플레이 해 볼 것을 권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만약 주변에 아는 친구들이 있어서 같이 플레이 한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입니다.
처음 선보이는 형태의 미션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완성도가 높은 협력 미션. 참고로 인공지능은 게임을 즐기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괜찮습니다.
역시나 '개그얼럿'스러운 유머 센스 |
<C&C>를 좋아하는 팬들 사이에서 <레드얼럿>은 2000년 발매된 <레드얼럿2> 이래로, ‘개그얼럿’이라고도 불립니다. 본편에서는 볼 수 없는 코믹한 연출과, B급 영화 느낌이 나는 FMV(Full Motion Video = 실사영화) 등으로 인해 이와 같은 애칭을 얻었죠.
전편에서 확립된 시리즈의 전통(?)은 이번 3편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FMV 구석구석에는 코믹한 연출이 즐비하고, 게임의 시나리오 중에서도 ‘러시모어 대륙간 레이저’ 나, ‘이스터섬 모아이 인간대포’(-_-) 같은, 다소 어처구니 없는 센스의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취향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덕분에 전체적으로 굉장히 즐겁게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모아이 머리 뚜껑이 열리면서 더러운 소련군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질 않나….
미국의 대표적인 명소 중 하나인 ‘러시모어 산’(Mount Rushmore)에서 대륙간 레이저가 등장하질 않나…. EALA, 알고 보면 (진지하게) 미국 안티일 지도 모릅니다.
마니아들이 만족하기에는 부족한 시나리오 전개 |
요즘은 RTS 게임이라도 ‘시나리오’, ‘스토리’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레드얼럿3>는 굉장히 마니아층이 많은 시리즈의 후속작인데다, 미국 드라마 등에서 활약한 유명 배우들이 실사 영상(FMV)에 등장하기 때문에, 발매 이전에도 스토리와 시나리오 전개가 굉장히 높은 관심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어떨까요?
결론적으로 말해 이 부분은 10점 만점에 5점을 주기도 힘들 정도로 엉망입니다.
<레드얼럿3>는 연합에 의해 패망 위기에 몰린 소련의 지휘부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아인슈타인을 제거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때문에 미래가 바뀌고, 존재하지 않았던 욱일제국이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는데요, 도입부는 제법 흥미롭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시나리오 전개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엉성합니다. 설정들 또한 엉성하고 헛점이 많이 노출됩니다. 4글자로 줄여서 딱 ‘용두사미’입니다.
전작들에서는 시나리오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아인슈타인은 게임 시작하자마자 가루(?)가 됩니다. 잘 보면, <레드얼럿>에서 히틀러를 제거하는 장면의 오마쥬입니다.
이런 시나리오 전개는 기존에 시리즈를 굉장히 열심히 즐긴 마니아들의 입장에 보자면 화가 날 지경입니다.
아인슈타인을 죽였다는 것은 제법 흥미로울지 모르지만, 사실 <레드얼럿>에서 이와 같은 전개는 1편과 2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시리즈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과도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레드얼럿> 시리즈는 아인슈타인이 없으면 시나리오 자체가 성립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타 다른 시나리오 부분에서 전작들과 특별한 연관성이 있냐고 하면, 그런 것도 전혀 없습니다.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면 ‘게임의 제목’과 몇 가지 유닛들 빼고는 이미 <레드얼럿>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게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지경이거든요.
과학자 한 명 죽인 것에 따른 나비효과로 갑자기 태어난 욱일 제국. 하지만 탄생 과정이나 기원 등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그만큼 게임의 시나리오는 엉성합니다.
아쉬움은 많지만, 즐겨 볼만한 게임 |
이 밖에도 <레드얼럿3>는 전체적으로 뒷마무리가 부실한 점이 몇 가지 눈에 띕니다. 도저히 2008년에 나온 게임이라고는 보기 힘든 수준의 디자인을 가진 멀티플레이 게임방과, 미니맵 디자인. 그리고 몇몇 부분에서 불편함을 선보이는 조작 시스템 등.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다수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내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게임의 한글화는 차마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입니다.
물론 시장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해준 것 만해도 얼마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주 비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오타가 10문장 걸러 하나씩 발견되고, ‘살아 있는 신을 길들여라’(To Tame a Living God) 같은 문구가 ‘삶에 길들여진 신’으로 번역되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사는 20대 한 명이 직접 디자인해도 이것보다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데 말입니다.
<C&C3>는 유저들이 직접 만든 사설 한글화 패치가 따로 제작되었습니다. <레드얼럿3>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질 예정입니다.
일반적인 게이머 입장에서 보면 <레드얼럿3>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RTS 게임입니다. 신선한 구성의 ‘2인 1조 시나리오 캠페인’도 그렇지만, 멀티 플레이 역시 아기자기하고 빠른 속도감의 박진감 넘치는 진행을 보여줍니다.
해상전이 등장한 만큼 이젠 지상과 비행유닛 외에 해상유닛까지 관리해야만 합니다.
정리하자면 <레드얼럿3>는 RTS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나, 기존 <C&C> 시리즈 마니아 모두 2008년이 가기 전에 한 번쯤은 꼭 즐겨볼 만한 게임입니다. 마니아들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7년 만에 돌아온 후속작으로 보면 소장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끝으로 여담이지만, 게임 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꼭 <레드얼럿3>의 음악에 주목할 것을 권장합니다. 지금도 시리즈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히는 ‘헬 마치’(Hell March)를 작곡한 ‘프랭크 클리팩키’가 복귀해서 만든 3편의 사운드는 최근 등장한 게임 중에서도 단연 최고 수준이거든요.
※ 프랭크 클리팩키(Frank Klepacki): 웨스트우드 스튜디오에서 <C&C> 및 <레드얼럿> 1편의 음악 감독을 지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