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오페라와 같이, 게임계에도 익숙한 메카닉 위에 SF적 소재를 접목해 만든 작품이 많습니다. <뱀파이버 서바이버> 이후 ‘뱀서류 SF’게임이 많이 나온 것처럼요. 반면 본격적 SF 타이틀도 많습니다. 우주탐험, 트랜스휴먼, 강인공지능과 같은 SF적 아이디어를 스토리와 메카닉 모두에 접목한 <노 맨즈 스카이>, <소마>, <바이오쇼크>같은 게임이 예시입니다.
베데스다의 신작 <스타필드>는 그렇다면 본격적 SF 게임과 ‘SF 풍’ 게임 중 어느 쪽에 해당할까요? 직접 플레이해 본 바 <스타필드>는 이 지점에서 플레이어에게 많은 혼란을 줍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은 현재 게임을 향한 시장의 엇갈리는 반응의 최대 이유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타필드>는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는(것으로 추정되는) 미지의 유물 ‘아티팩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우주 모험 활극입니다. 설정상 인류는 지구의 환경이 거주 불가능 수준으로 악화하자 기술 발전을 서둘러 우주 전역으로 확장한 상태입니다.
도입부에서 막 우주 광부 일을 시작한 주인공은, 채굴작업 중 문제의 ‘아티팩트’와 접촉, 짧은 환상과 환청을 겪은 뒤 기절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티팩트를 수집하고 있는 탐사단체 ‘별자리’의 일원이 찾아와 주인공에게 가입을 권유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다른 많은 베데스다 게임에서처럼, 이후 크게 세 갈래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세계적 규모의 모험을 담은 메인 퀘스트라인, 세계관에 어울리는 다양한 이야기와 인물들을 접할 수 있는 사이드 퀘스트라인, 그리고 게임 속 사회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여러 집단 간 충돌을 그린 팩션 퀘스트라인 등입니다.
'아티팩트'의 발견으로 사건이 시작된다.
<스타필드>의 코어 메카닉은 기존 베데스다 게임들의 시스템을 참고해 그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강화한 점을 높이 살 만합니다.
일례로 스킬 시스템을 살펴보면, ‘반복 수행’으로 스킬 레벨업이 이뤄졌던 초기 작품들과 포인트 투자를 통해 스킬을 강화했던 후기 작품들의 시스템을 혼합하고 있습니다.
캐릭터 레벨업 때마다 1점씩 주어지는 스킬 포인트를 스킬에 투자해 스킬 랭크를 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인트를 바로 투자할 수는 없습니다. 각 스킬에 요구되는 ‘챌린지’를 완수했을 때만 스킬 랭크가 ‘해금’되면서 투자가 가능해지는 방식입니다.
이를테면 ‘전투’ 카테고리의 ‘권총 숙련’ 스킬 랭크를 올리고 싶다면, ‘권총으로 적 n명 처치’와 같은 관련 챌린지를 먼저 완수해야만 합니다. 이를 통해 관련 능력을 영구적으로 강화하거나 새 기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몰입감과 밸런스를 잡은 스킬 성장 시스템
<스카이림> 등 베데스다 초중기 작품들의 경우 관련 스킬의 실제 사용을 통해 숙련도를 올리는 시스템으로 캐릭터 육성의 몰입감을 크게 키웠던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하에서는 유저들이 ‘제자리 점프’ 등의 편법으로 스킬을 손쉽게 강화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후기 작품들과의 융합을 통해 이번 게임에서 좋은 타협점을 찾아낸 셈입니다.
<폴아웃 4>에서 처음 등장한 제작/개조/건설 시스템을 다시 도입한 점도 눈에 띕니다. <스타필드>에서 유저는 우주 전역에서 모으는 다양한 원자재와 부속품을 이용해 무기 및 방어구를 제작, 강화하거나 전초기지를 건축할 수 있습니다.
이는 <폴아웃 4>의 호평 요소 중 하나였으나, 개조/건축 레시피가 금방 고갈되면서 콘텐츠의 지루함이 쉽게 찾아오는 것이 단점으로 꼽혔던 바 있습니다. 또한 각각의 제작 품목들이 지니는 효과나 영향력 또한 미미했던 편입니다. 반면 <스타필드>는 제작의 다양성과 유용성을 이전에 비해 크게 강화, 성취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주 게임’ 테마에 맞춰 새롭게 더해진 우주선 제작 콘텐츠도 주목할 만합니다. <스타필드>에서는 상점에서 새로운 우주선을 구매하거나 미션 중 우주선을 습득할 수 있으며, 처음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우주선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우주선을 판매하거나 개조하는 것 또한 물론 가능합니다.
외형과 스펙이 다양한 우주선이 준비되어 있다.
후기 작품에서 지적이 일었던 퀘스트 및 스토리의 허술함에서도 심기일전한 측면이 엿보입니다. 베데스다의 이전 게임들에 비해 <폴아웃 4>는 선택지를 단 4개로 줄여버린 대화 시스템으로 인해 퀘스트 진행의 자유도가 크게 낮았던 편입니다. 더 나아가 던전 디자인의 단조로움과 스토리의 설득력 부족 등에서도 비판을 받았던 바 있습니다.
이후 베데스다는 <폴아웃 76>에 NPC와 퀘스트를 도입하면서 기존 대화 시스템을 복구하는 등, 퀘스트 콘텐츠 측면에서의 다양성 제고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플레이어 수가 워낙 적었던 탓에, 이런 노력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교훈을 잘 간직한 듯 이번 게임에서도 베데스다는 <폴아웃 4> 대비 월등히 몰입적인 퀘스트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대화 시스템에서는 캐릭터의 배경에 따라 종종 유니크한 대화 선택지가 주어지는가 하면, 독특한 ‘설득’ 시스템을 도입해 캐릭터의 능력이 대화에 더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행성에서 벌어지는 콘텐츠의 다양성과 퀄리티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복고주의’가 특히 빛나는 지점은 바로 사이드 퀘스트의 양과 질입니다. 퀘스트의 공략 과정에 있어 콘텐츠를 다층적, 다면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각각을 완수해 나가는 재미를 기존 대비 강화하려는 노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퀘스트는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NPC, 우연히 발견한 노트 등 다양한 트리거에 의해 예상치 못한 여러 지점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진입한 퀘스트 공간(주로 던전)에서 맞닥뜨리는 사건과 인물은 모두 나름의 뚜렷한 서사와 두꺼운 층위들을 가지고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는 다시 각 던전의 독특한 구조와 고유한 퍼즐, 스토리에 직접적으로 연계된 보상, 이면의 또 다른 연계 콘텐츠 등으로 이어지면서 단순히 ‘퀘스트 마커’를 지우는 것 이상의 분명한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고유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여기까지 살펴봤을 때, <스타필드>는 베데스다 기존 게임들의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끌어올린 훌륭한 어드벤처 게임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스타필드>에는 ‘기대 이하’라는 평가가 만만치 않게 쏟아집니다. 이를 그저 과도한 불평으로 볼 수 있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베데스다가 게임을 홍보해 온 방식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토드 하워드를 위시한 제작진은 전통적인 베데스다식 RPG 콘텐츠 이외에도 무수한 행성, 함선 전투, 자원 채취, 우주선 건조, 행성표면 탐험 등을 주요 콘텐츠로 내세워 왔습니다.
이를 종합했을 때의 인상은 더할 나위 없는 ‘우주 탐험’ 게임입니다. 베데스다가 나열한 콘텐츠 대부분을 실제로 제공하는 <노 맨즈 스카이>, <엘리트 데인저러스> 등의 게임들이 그간 출시해 왔기 때문에 유저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그 이상’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측면도 있습니다.
업계 최대 게임사 중 하나가 적어도 7년을 들인 프로젝트인 만큼 이는 특별히 나무라기 힘든 기대입니다. 문제는 <스타필드>의 경우 위에 언급된 콘텐츠들을 다른 우주 탐사 게임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주에서의 이동 방식을 대표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행성에서 행성으로의 직접 비행이 가능한 동종의 게임들과 달리, 스타필드의 ‘우주여행’은 사실상 연속적인 화면 로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정 항성계에서 다른 항성계, 행성 궤도, 행성 표면으로 이동하는 모든 과정은 ‘빠른 이동’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기존 발표에서 행성 착륙 시 로딩이 필요하다고 밝힌 적 있지만, 이 정도의 제약까지 예상하진 못했다는 반응이 나옵니다.
이로 인해 유저들은 끊임없이 <스타필드>의 우주 밖으로 내쳐집니다. 충실하게 꾸며진 행성 표면 콘텐츠를 탐험하면서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설렘과 몰입감은, 이처럼 ‘흉내 내기’에 불과한 구현 방식 탓에 외려 실제로 우주로 향할 때마다 급격히 시들고, 유저들은 우주 한가운데가 아닌 그저 스크린 앞에 앉아 있을 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데스다는 <스타필드>의 홍보에 있어 ‘1,000개의 행성’이라는 화려한 규모를 내세우는 한편, 실제로 기술적, 기획적 리스크는 감수하지 않으려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인 셈입니다. 하지만 ‘혁신적 우주 게임’과 ‘우주 배경 베데스다 게임’ 사이의 간극을 알아채지 못하기에는, 유저와 업계 모두 지난 세월 동안 너무 많은 발전을 이뤘습니다. 지금보다 현실적 기획과 혁신이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무리해서 벌어지고 만 '틈'에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