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A를 AAA답게’ 만드는 특징 중 하나로 높은 수준의 월드 디테일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마을을 가득 채우는 NPC들의 세세하고도 다양한 행동거지 표현은 –인디게임에서는 좀처럼 따라 하기 힘든- 트리플A의 대표적 리얼리티 요소다.
3월 21일(현지시간) 열린 GDC 2023 첫날 아침 강연자로 나선 에스펜 송(Espen Sogn)은 인게임 월드에 현실적 디테일을 부여하는 전담 디자이너로서, 실무에서 직접 얻은 깨달음과 팁을 전달했다. 송은 <킬 존>, <오디세이 투 더 웨스트> 등 작품에 참여했고, 이후 게릴라 게임즈에서 <호라이즌: 제로 던>을 거쳐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 프로젝트의 ‘리드 리빙 월드 디자이너’를 일임한 인물이다.
‘리빙 월드’란 게릴라 게임즈가 추구하는 하나의 개발 방향성이자, 팀 이름이기도 하다. 인게임 월드를 그저 게임플레이의 배경이 아닌, 작중의 가상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전담 조직이다. /샌프란시스코(미국)= 방승언 기자
한편 <호라이즌> 시리즈는, 기계 생물들에 지배당한 포스트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다. <호라이즌>의 세계에서 원시적 문명을 지닌 여러 부족은 기계 생명들을 사냥해 얻은 자원으로 생존함과 동시에 서로 반목하며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에일로이를 플레이하는 유저가 이러한 세계관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도록, 리빙 월드 팀은 각 부족의 거주지에 살고 있는 여러 NPC의 일상적 행동을 손수 만들어 각 부족의 설정에 오롯이 녹아들게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리빙 월드 팀의 이러한 작업은 후속작 <포비즌 웨스트>로 넘어오면서 중대한 혁신을 겪었다. 그 혁신의 세부 사항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살아있는 월드 디자인의 중요한 원칙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제로 던> 당시까지만 해도 팀은 ‘살아있는 월드’가 무엇인지에 관한 정의를 스스로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생긴 조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아직 완성조차 되지 않은 기준을 통해 비춰봤을 때, <제로 던>의 월드는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한 디렉터는 아주 직접적으로 “리빙 월드는 왜 그렇게 실패한 거야?”라는 말을 던지며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한 바 있다.
사실 <제로 던>의 리빙 월드가 그 직설적 지적만큼이나 실패투성이였던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NPC가 마치 오토마톤(특정 동작을 반복 수행하게 만든 자동인형)처럼 ‘살아있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그렇다면 왜 이들 NPC는 생동감을 주지 못했을까? 이를 알아보려면 먼저 <호라이즌> 시리즈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세 가지 중요한 중추를 알아야 한다. 이는 웅대한 자연환경, 멋진 기계 동물들,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문명 등이다.
‘리빙 월드’는 이중 ‘생동감 넘치는 문명’을 유저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수단이다. 그리고 <제로 던>의 NPC들은 실제로 이 세계의 거주민 같은 느낌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던 셈이다.
송은 <제로 던>에서의 경우 리빙 월드 팀의 작업이 뒤늦게 기존 월드에 ‘얹는’ 방식으로 진행된 점이 문제라고 느꼈다. 그래서 전체 제작 파이프라인상 훨씬 이른 단계부터 다른 부서들과 함께 ‘종합적’(holistic)으로 작업을 진행해보기로 했다.
송은 <포비든 웨스트>의 양조장 디자인에서 처음 이러한 종합적 접근을 시도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아직 콘셉트 단계에 불과했던 양조장은 사실 게임에 삽입될지 여부도 분명치 않았다. 리빙 월드 팀은 이를 현실적으로 만드는 실험에 돌입했다.
리빙 월드 팀은 환경 팀과의 협력을 통해, 양조 작업 애니메이션에 여러 리얼리티를 추가할 수 있었다. NPC가 증류기 상단의 문을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맛보고, 아래쪽 화덕 부분에 연료를 넣는 등의 애니메이션을 추가했다는 얘기다.
이 양조 작업의 ‘리얼리티’는 겉보기에 그치지만 이는 필요한 일이었다. 실제 양조 과정에서는 항상 증류기 옆에 사람이 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포비든 웨스트>에서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의 NPC가 증류기를 돌보고 있다. 이는 유저가 해당 지역을 지나가는 ‘중요한 순간’에 NPC를 하나쯤 꼭 목격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더 나아가 리빙 월드 팀은 월드 구현에 있어 ‘모든 팀’과 협력했다. 단적인 예로, 앞서 환경팀과의 협업으로 완성된 증류 작업의 디테일 또한 아트팀이 증류기의 해당 부분을 인터랙티브한 파트로 만들어준 덕분에 구현될 수 있었다.
송은 “<제로 던>에서는 월드 구현을 내러티브의 일환이 아니라 일종의 캐릭터 애니메이션으로 생각했다. NPC 각자의 배경, 거기 살고 있는 이유 등을 자세히 생각지 않고 전형적 접근으로 전형적 애니메이션을 모든 부족에 적용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프로덕션 효율 차원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결과물을 보면 캐릭터 간 차이가 별로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부족 별로 옷만 달리 입었을 뿐 하는 일은 똑같은 식이다. 반면 “<포비든 웨스트>에서는 부족마다 (고유) 애니메이션을 최대한 많이 쓰고, 하나의 애니메이션을 여기저기 써버리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참았다”고 송은 이야기한다.
이어서 송은 <포비든 웨스트>를 구성하는 주요 부족인 테낙스, 우타루, 오세람 부족 각각의 ‘문화적 특징 표현을 위해 시도한 내용을 설명했다. 다만 그 전에 알아둬야 할 것은 바로 각 부족의 특징이다.
먼저 테낙스는 경쟁심이 뛰어나며, 멸망한 고대 인류가 만든 박물관의 홀로그램 기록물을 자신들의 주요 이념으로 삼게 된 부족이다. 이 홀로그램 전시물들은 고대 전쟁의 주요 전투를 묘사한 것들이다. 그러나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며 홀로그램은 불명확해지고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여기에서 고대 영웅들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확인한 테낙스는 묘사된 옷차림과 행동 등을 따라 하게 됐다.
이는 충분히 흥미로운 설정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를 월드 설정 안에서 표현함과 동시에, 유저들이 자연스레 인지하게끔 유도할 수 있을까? 송은 “이들 사이를 거니는 것만으로 이들 부족의 특징을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가 일을 잘 해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테낙스의 경우 부족 특성을 ‘눈에 띄게’ 만들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들은 경쟁심 강한 부족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한쪽에서 테낙스 부족원끼리 겨루는 모습을 구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유저들은 대결이 벌어지는 순간에 그 옆을 지나야만 하며, 짧은 관람으로 전체 맥락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다.
박물관 기록물을 숭상하는 고유문화도 물론 흥미롭다. 일례로 테낙스는 홀로그램 속 인물들이 하는 경례를 일상 인사법으로 쓴다. 이 또한 아이디어는 좋지만, 세계관 설명에 있어 ‘보조’ 역할에 그친다는 것이 문제다. 원본 홀로그램을 본 다음에야 이들의 ‘경례’ 문화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을 뿐, 그 자체로 세계관 이해가 되진 않는다는 뜻이다.
우타루의 경우, 기술적인 어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이들은 고대의 농기계 근처에 살면서 기계들을 ‘땅의 신’으로 추대하는 자들이다.
이때 ‘땅의 신’과 주민들 상의 직접적 상호작용을 다양하게 구현하고자 했지만. NPC가 전투 밖에서 기계와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이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팀은 이를 포기하고 부족민들이 먼발치에 앉아 ‘신’들에 기도하는 모습으로 대체해야 했다.
한편, 우타루는 좁은 공간에 모여 사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특성은 표현하기 훨씬 수월했다. 가까이 붙어사는 우타루 부족은 ‘개인 간 거리’ 개념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 때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이야기하거나, 어깨동무를 풀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테낙스의 ‘대련’과는 달리 우타루 주민들 근처에 있으면 항상 볼 수 있는 지점이어서 전달이 쉬웠다.
한편 오세람 부족은 상술한 두 부족과는 정반대로, 리얼리티를 표현하기 매우 수월했던 부족에 속한다. 이는 맥주를 좋아하고 대장간 일을 잘 하는 오세람 부족의 성정이 잘 알려진 드워프 종족의 전형과 상당 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저가 이미 알고 있는 문화라면 그 맥락을 전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기에 개발자 입장에서는 훨씬 표현하기 간편해진다.
마지막으로 송은 기술적 한계 안에서 월드 리얼리티 구현을 위해 선택하는 몇 가지 아이러니한 ‘비현실적’ 요소를 설명했다. 우선 <호라이즌> 시리즈는 유저의 행동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데, 이는 배경에서 열심히 일하는 NPC들의 리얼리티에 방해가 된다. 낮이 지속할 경우 십수 시간이 지나도록 작업이 안 끝나는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
이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한 행동의 루프를 굉장히 길게 설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제작진은 ‘부분 작업’에 굉장히 오랜 시간 몰두하는 일종의 장인 NPC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작업 진척도를 두 가지 만든 뒤 번갈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면 작업이 진척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비현실적이지만, 송에 따르면 게임의 리얼리즘과 현실 세계의 리얼리즘은 서로 달라야 한다. 현실에서의 리얼리티는 게임에는 지루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송은 “모든 미디어는 저마다 그 안의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게임은 현실을 벤치마킹해선 안 된다. 실제보다 더 대담해야 유저가 이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고 전했다.
리얼리즘의 ‘지루함’은 여러 예시에서 볼 수 있다. <호라이즌> 시리즈 주인공 에일로이의 사례를 보자. 에일로이는 분명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유저는 특정 지점으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길 바라는데, 때로는 다른 사람을 밀치거나 남이 식사 중인 테이블 위로 걷는 것이 가장 빠를 때가 있다.
이런 ‘이상행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면, 개발자는 캐릭터를 특정 구간에서 갑자기 느리게 만들거나, 점프할 수 없게 막거나, 투명벽으로 막거나 등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이런 요소를 구현해야 할까? 게임을 재미있게 해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는 리얼리즘을 향한 불필요한 집착일 수 있다.
제작진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보게 하기 위해 플레이어의 시야를 제한하는 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물론 일련의 상황을 강제로 마주하게 만드는 게임들도 많고, 일부는 아주 훌륭히 이를 해내지만, 이 만약 이 방법으로 ‘생동감’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전적으로 이 방법에만 의존해야 한다.
가장 안 좋은 상황은 생동감 넘치는 컷신을 보다가 게임플레이로 돌아왔을 때 훨씬 ‘지루한 세상’에 돌아왔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공간의 생동감 표현을 컷씬에 의존하는 것은 이런 부작용을 낳는다.
송은 월드 생동감을 위한 팁 몇 가지와 결론과 함께 강연을 마쳤다.
첫 번째 팁은 텍스쳐 활용이다. 텍스쳐를 다양하게 삽입하면, 같은 캐릭터여도 서로 구분되는 개인과 같다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제스처’ 시스템의 도입이다. 특히 아이들(idle, 대기상태) 애니메이션 개선에 도움이 된다. <호라이즌>의 경우 ‘머리 긁기’ 등 일상 제스쳐가 랜덤하게 재생되는데, 덕분에 캐릭터의 아이들 애니메이션 루프가 눈에 덜 띄는 효과가 있다.
한편 두 캐릭터가 가까워질 때 서로 인사를 나누는 등 인공지능 개입으로 재생되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호라이즌>에서의 경우 이런 애니메이션은 부족 간 차이를 더 명확히 드러내는 데 사용됐다.
송은 마지막으로 이러한 ‘리빙 월드’ 노력을 추구할 때 주의할 점을 이야기했다. 송은 “리빙 월드를 기존 구축된 월드 위에 뒤늦게 얹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세계관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싶다면, 이른 단계에서 종합적으로 접근해 만들어내야 한다”고 전했다.
리빙 월드를 처음부터 종합적으로 설계했을 때, 유저를 내러티브에 끌어들이는 ‘내러티브 훅’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내러티브 훅은 NPC들에게 존재감을 부여해주는 요소 및 아이디어로서, 최대한 많이 삽입될수록 좋으며, 게임 전반에 걸쳐 계속 존재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대신 (제로 던에서와 같이) 게임 월드와 따로 노는 요소로 존재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