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자드에서 <하스스톤> 팀장을 맡으며 애증의 대상이 되었던 벤 브로드. <하스스톤>에 관심이 없는 게이머도 그 이름이나 관련 밈 한둘 정도는 알고 있을 만큼 업계에서 능력과 개성을 두루 인정받아온 인물이다.
브로드가 블리자드 퇴사 후 지난해 여름 출시한 마블 IP의 모바일 신작 <마블 스냅> 역시 크게 호평받았다. 간단하면서도 전략적인 게임 플레이를 통해 전 세계의 많은 유저를 매료시키면서, 브로드의 게임디자인 역량이 다시금 입증된 바 있다.
GDC 2023에서 벤 브로드는 <마블 스냅>을 만들면서 그가 실제로 참고한 여러 요소, 그리고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디자인 원칙을 상세히 공유했다. <마블 스냅>을 탄생시킨 재료와 요리법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함께 알아보자.
브로드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마블 스냅>은 모바일 중심의 디지털 카드수집게임(Digital Collectible Card Game)이다.
양 플레이어는 화면에 제시되는 세 개의 지역 중 하나에 특수기능과 코스트, 파워를 지닌 카드를 한 장씩 내려놓아 겨루게 된다. 지역별로 놓인 카드 파워의 총점이 높은 유저가 해당 지역을 차지하며, 라운드 종료 시점 2개 이상 지역을 차지한 쪽이 승리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경기 도중 화면 상단에 떠 있는 큐브를 ‘스냅’하는 기능이다. 큐브는 경기의 승점이자 일종의 ‘판돈’이다.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될 때 스냅을 통해 게임에 걸린 큐브의 숫자를 두 배로 올릴 수 있으며, 상대는 이를 받아들여 플레이를 계속하거나 게임을 포기할 수 있다.
브로드는 <마블 스냅>의 기원을 설명하기 전에 자신의 게임 제작 원칙을 ‘요리’에 빗대어 설명했다.
브로드에 따르면 게임 디자이너는 많은 부분에서 요리사와 같다. 요리사는 재료를 ‘발명’하지는 않는다. 재료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조합하는 것이 요리사의 일이다. 그러나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전혀 다른 요리가 나올 수 있다. <마블 스냅> 역시 기존하는 재료들을 모아 고유한 방식으로 조합하는 방법으로 태어났다.
브로드의 ‘요리 스타일’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마블 스냅>에 앞서 <하스스톤>을 제작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브로드가 <하스스톤> 팀에 합류한 것은 15년 전이다. 2008년 당시는 디지털 카드게임의 숫자가 비교적 적었고, 그래서 브로드는 말 그대로 ‘모든’ 디지털 카드수집 게임을 플레이했다.
이렇듯 ‘모든 게임’을 맛보는 데 따르는 장점은 명확했다. 적은 비용으로 각각의 ‘재료’, 그러니까 여러 게임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직접 하나하나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본 뒤에 실험해보는 것과 비교하여 훨씬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렇듯 많은 디지털 카드게임을 플레이해본 것에 반해 정작 <하스스톤>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실물 TCG(트레이딩 카드 게임) 들이었다.
먼저 브로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TCG>에서 카드 타입, 카드 공격 시스템, 승리 조건 등을 따왔다. 그리고 <배틀 스피릿>에서는 마나 시스템을 빌렸다. 여기에 영웅 능력, 무기 내구도, 탈진 시스템 등의 고유한 요소를 더하고 전반적 복잡도를 낮추면서 <하스스톤>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스스톤>이 드디어 출시된 당일에 브로드는 론칭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들의 출생 이후 브로드의 게임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이전처럼 수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수 없었고 잠깐씩만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하스스톤> 출시 2년 후 출시한 <클래시 로얄>은 벤 브로드의 입장에서 아주 ‘샘 나는’ 게임이었다. 5분만 여유가 있어도 즐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후 2018년 브로드는 블리자드를 떠나 공동 창립자인 해밀턴 추와 함께 새 회사 ‘세컨드 디너’를 설립했고, <클래시 로얄>을 닮은 짧은 호흡의 카드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마블 스냅>의 시작이다. 즉, <클래시 로얄>의 압축적인 게임플레이가 <마블 스냅>의 첫 번째 ‘재료’가 된 셈이다.
한편 신작을 구상하면서 브로드는 이번에도 온갖 모바일 카드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면서 게임 콘셉트를 구체화했는데, 이때 <카드 몬스터즈 3 미닛 듀얼>을 만났다. 해당 게임은 세로 화면으로 짧게 플레이하는 모바일 중심의 카드 수집 게임으로, 벤 브로드가 압축적 게임 포맷에 확신을 가지게 한 계기가 되어줬다.
<마블 스냅>의 두 번째 재료가 된 것은 그 원형이 기원전 3,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적 보드게임 <백개먼>이다.
<백개먼>은 1920년대 미국에서 ‘더블링 큐브’라는 룰 도입과 함께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더블링 큐브’는 ‘승점 2배 게임’을 제안하는 시스템이다. 상대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게임이 그대로 진행되고, 포기하면 제안한 자의 승리로 끝난다.
아이디어 회의 중 공동 창립자 해밀턴은 “항상 턴제 전략 게임에 <백개먼>의 더블링 큐브 시스템을 도입해보고 싶었다”고 말했고, 두 사람은 <하스스톤>을 켜서 서로 대전하면서 ‘더블링 큐브’ 룰을 적용해봤다. <백개먼>과 같이 상대가 더블링 제안을 할 때마다 게임을 계속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해야 했고, 두 사람은 이 시스템이 주는 효과들을 곧장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승점이 2배수로 커지는 만큼 게임에서 느끼는 감정적 임팩트도 따라서 커진다. 또한, ‘지는 게임’에 낭비되는 시간을 크게 아낄 수 있다. 브로드는 “이길 확률이 5% 정도밖에 안 되는데도 계속 플레이해야 할 때가 있다. <모노폴리>에서 그렇게 되면 6시간을 고통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대전 게임들이 가지고 있는 공리주의적(?) 차원의 문제도 해결된다. 브로드에 따르면 대전 게임은 양 플레이어의 ‘재미의 총합’이 0이 된다는 문제가 있다. 이긴 쪽은 재미를 느끼지만, 진 쪽은 되려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브로드는 “결국 한쪽의 재미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옮겨놓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승리’ 개념이다. 이는 <하스스톤>의 본래 디렉터이자 브로드의 멘토인 에릭 도즈가 지난 2014년 GDC에서 <하스스톤>의 디자인 원칙으로 대중에 소개한 것이기도 하다.
‘큰 승리’는 실제 게임 승리를 말한다. 반면 ‘작은 승리’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자신의 강함, 혹은 영리함을 체감할 수 있는 작은 순간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플레이하면서, 적 여러 명을 압도했지만 결국 졌다고 가정해보자. 경기 결과는 패배지만 여전히 유저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순간이 바로 ‘작은 승리’다.
<마블 스냅>의 경우 스냅 시스템이 이런 역할을 한다. 승산 없는 싸움에서 상대의 스냅을 무시하고 ‘잘 빠져나가는 것’만으로 스스로 괜찮은 플레이를 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즉, ‘패배’가 아닌 ‘전략적 후퇴’를 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제작진은 실제로 이런 심리적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패배’라는 문구를 ‘탈출’로 바꾸는 등 인게임 UI도 변경해나갔다.
이처럼 다양한 효과가 있지만, 브로드에 따르면 스냅 시스템의 결정적 장점은 게임의 복잡도(complexity)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전략적 깊이(depth)는 더해준다는 데 있다.
여기서 브로드가 말하는 ‘복잡도’란 ‘게임 룰을 익히기 위해 사전에 들여야 하는 노력 수준’을 말한다. 예를 들어 카드의 숫자와 룰이 다양한 TCG라면, 이를 사전에 익혀야만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기 때문에 ‘복잡도’가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유저들은 흔히 게임의 ‘복잡도’와 ‘깊이’를 똑같은 개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브로드는 “예를 들어 <마블 스냅>에서 카드를 낼 때마다 마이크에 대고 카드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패배한다고 생각해보자. 반드시 학습해야 할 중요한 룰이지만, 게임에 아무런 깊이를 더해주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또한, 복잡도와 깊이가 서로 비례하는 것만도 아니다. 이를테면 상대적으로 룰이 간단하지만 플레이하기는 어려운 바둑과 같은 사례가 있는가 하면, <모노폴리>의 경우 익혀야 하는 룰이 많은 데 비해 플레이 자체의 깊이는 떨어지는 편이다.
브로드는 ‘깊이’를 계속 더하고 싶으면 오히려 ‘복잡도’를 어느 정도 감소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유저가 수용할 수 있는 학습량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너무 복잡해 룰을 배우는 데만 오랜 세월이 걸린다면 그런 게임에서 유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깊이’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스냅 시스템은 복잡도를 거의 상승시키지 않으면서 게임에 전략적 깊이를 더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스냅 시스템에 있어 유저가 사전에 알아둬야 할 룰이라고는 각자에게 스냅 기회가 1번씩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에는 자동으로 스냅이 적용된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룰 덕분에 유저들은 그저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을 고민하는 데서 더 나아가, 라운드마다 자신과 상대의 승률을 면밀히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마블 스냅> 디자인에 있어 브로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또 다른 재료는 카드의 ‘동시 공개’시스템이다. 여기에서는 <반지의 제왕: 대결> (Lord of the Rings: The Confrontation)과 <왕좌의 게임> 등 실물 카드 게임을 참고했다.
다만 자신의 패와 상대방의 패가 동시에 공개되는 이런 시스템에서는, 상대의 수를 읽고 이에 대응하는 전략적 요소가 줄어들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브로드는 상대방의 선택을 짐작하고 추론해볼 만한 ‘맥락’을 추가하고 싶었다.
그렇게 도입된 것이 바로 <마블 스냅>의 ‘구역’ 시스템이다. <마블 스냅>에서는 매 대전마다 총 3개의 구역이 제시된다. 매 라운드 양측 유저는 자신의 손에 있는 카드를 세 구역 중 하나에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으며, 한 구역에 배치 가능한 카드 숫자는 총 4장이다.
구역의 종류는 다양하고 각각은 다양한 룰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룰’은 양측이 상대의 다음 수를 짐작할 만한 단서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모조 월드’ 구역은 배치된 카드의 숫자가 더 많은 쪽에 무조건 +100점을 부여한다. 이때 양측 유저는 상대방이 낮은 코스트의 약한 카드 여러 장을 ‘모조월드’에 투자할지, 아니면 높은 코스트의 강력한 카드를 이용해 다른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려 들지 예측해보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구역 시스템의 더 중요한 장점은 바로 게임의 변수를 늘려주는 데 있다고 브로드는 주장한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브로드는 <매직 더 개더링>의 디자이너 리처드 가필드가 진행했던 GDC 강연을 인용했다.
‘게임 속 운(luck)’이라는 제목의 이 강연에서 가필드는 ‘운’과 ‘실력’에 관한 대중의 흔한 오해를 지적한다. 많은 이들이 게임 시스템상 ‘운’과 ‘실력’은 상호 배타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즉, 실력이 많이 필요한 게임일수록 운이 덜 개입하고, 반대로 운이 많이 개입하면 실력은 덜 필요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가필드와 브로드는 말한다. 운과 실력은 게임성을 구성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구성요소일 뿐이다. 예를 들어 ‘체스’처럼 무작위성이 아예 없고 실력만 요구되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포커 같은 경우는 운과 실력이 모두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게임 속 ‘무작위’(운) 요소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으며 각각은 나름의 특징과 장점이 있다고 브로드는 말한다. 첫째는 유저에게 랜덤 상황을 부여한 다음 결정을 내리게 하는 ‘조건적 무작위’(input randomness)다. 조건적 무작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적응해 전략을 펼치는 사고적 유연성을 실험한다.
한편 둘째는 유저가 내린 결정에 대해 무작위적 결과를 발생시키는 ‘결과적 무작위’(output randomness)이다. 이는 사용자들이 각 전략의 ‘성공 확률’을 미리 따져보고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결정 내리도록 함으로써, 당사자와 관중 모두에게 특유의 ‘흥분감’(excitement)을 선사한다.
<마블 스냅>의 구역 시스템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무작위를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허브’ 구역은 유저 손에 랜덤한 패를 쥐어준다는 점에서 ‘조건적 무작위’ 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제출한 카드를 25% 확률로 파괴하는 ‘데인저 룸’은 ‘결과적 무작위’를 구현한 구역이다.
또한, <마블 스냅>의 구역들은 첫 3라운드 동안 왼쪽에서부터 하나씩 공개되는데, 이 또한 두 가지 유형의 무작위를 모두 느낄 수 있는 시스템이다. 공개된 지역을 확인한 뒤 전략을 세울 수도 있고(조건적 무작위) 미공개 지역에 일단 카드를 내려놓은 뒤 결과를 지켜보는 것 또한 가능하다(결과적 무작위)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조건적이든 결과적이든 게임 속 무작위는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다. 실제로 벤 브로드가 담당했던 <하스스톤> 역시 무작위성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던 바 있다. 그런데도 브로드는 차기작 <마블 스냅>에서 다시 한번 무작위 요소를 적극 끌어안았다. 이유가 뭘까?
브로드는 무작위가 게임의 메타 고착화를 막을 수 있는 유용한 요소라고 설명한다. 그는 “카드 게임에서는 시간 흐름에 따라 점차 메타가 굳어진다. 그래서 다른 게임의 경우 수백, 수천 장의 카드를 더하게 된다”고 말한다.
한편 <마블 스냅>에서는 매 라운드마다 구역이 랜덤 배정되기 때문에, 특정한 덱으로 모든 상황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확률이 낮아진다. 더 나아가 게임에 도입된 새 요소가 전체 밸런스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 수준도 조절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