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게임 세계를 창조하는 ‘레벨 디자인’은 게임플레이 경험과 아트, 내러티브 등 여러 요소를 한꺼번에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 작업이다. 디자인 단계에서는 완벽해 보였던 설계가 실제 테스트에서는 예상치 못한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대규모 게임을 만드는 경우 파트간 협업의 어려움마저 더해지면서 레벨 디자인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협업 구조를 일신하고 작업 효율을 높일 수 있을까? NDC22(넥슨 개발자 컨퍼런스) 마지막 날 ‘요구조건이 빡빡한 게임에서 레벨 디자이너로 살아남기’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선 넥슨 <프라시아 전기> 김기진 레벨 디자이너가 그 방법을 공유했다.
강연자 : 김기잔
소속 : 넥슨코리아 신규개발본부 <프라시아 전기> 레벨 디자이너
발표자 소개
2008년에 게임기획자가 되겠다며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MMORPG나 TPS, 모바일 콜렉팅 RPG 등 다양한 장르와 플랫폼의 프로젝트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게임 개발 전반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현재는 <프라시아 전기> 프로젝트에서 레벨 구성 파트장을 맡고 있다.
레벨 디자이너는 말 그대로 레벨을 설계하는 사람으로, 게임의 세계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다. 언뜻 보기에 레벨 디자이너는 단순히 사냥터, 마을 등의 공간과 위치만 정의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려면 게임 개발의 여러 분야에 발을 걸칠 수 있어야 한다. 각 공간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위에 스토리와 플레이 경험을 녹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텐츠, 시나리오 라이터, 배경 아티스트의 감각을 모두 조금씩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는 협업의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다. 개발은 협업의 연속이고, 레벨 디자이너는 매우 많은 부서와 상호 협력하게 되어있다. 각 부서는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르다. 예를 들어 전투 디자이너는 비주얼의 우선순위를 낮게 둘 수 있고, 반대로 아티스트는 비주얼을 최우선시할 수 있다. 이때 그 사이에서 일이 제대로 진행되도록 조율하고 정리하는 것이 레벨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프라시아 전기> 개발 초기 발생한 ‘20미터 대로 사건’은 레벨 디자이너의 고민과 역할을 잘 보여준다.
개발 초기, 게임 내는 폭, 높이 각각 20미터의 대로가 존재했다. 기획대로라면 멀리 사냥터가 보이는 최고의 전경을 갖춘 장소였지만, 실제 내부 테스트를 진행해본 평가는 좋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부하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때 개발팀은 실제 테스트 시점까지 전혀 검증되지 않고 있는 요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김기진 디자이너 역시 원래 존재하던 내부 기준만을 충족하며 레벨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20미터 대로’의 문제가 드러나고 난 뒤, 기존에 자신이 만들고 있던 모든 콘텐츠를 돌아보게 됐다.
다시 검토한 콘텐츠들에는 실제로 문제가 많았다. 도로 폭을 너무 넓게 설정해 화면 안에 땅바닥만 보인다거나, 영지 간 거리가 너무 멀게 설정되어 있다거나, 사냥터들의 내부 구조가 서로 엇비슷한 개미굴 형태라는 등의 해결과제가 드러났다.
개발팀 전체는 문제별 원인 파악에 나섰다. 먼저 사냥터는 전체 넓이만 기획될 뿐, 내부를 채워 넣을 방법은 기획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정해진 것 없이 내부를 꾸미다 보니 소극적 채워넣기에 그쳤고, 결과적으로 모든 사냥터가 비슷한 느낌을 내게 됐다. 이런 식으로 기획 단계에서는 알 수 없었던 과제들이 속속 드러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리더 그룹은 약 2개월 동안의 개발 일시중지를 선언한 뒤, 프로그래머, 레벨 디자이너, 아티스트가 함께하는 ‘쿼터뷰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다. ‘쿼터뷰에서의 맵 밀도 강화’를 목적으로, 기존 콘텐츠 및 레벨을 다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고자 만들어진 팀이다.
그렇다면 쿼터뷰에서의 맵 밀도는 실제로 어떻게 검증할 수 있었을까? 이때 김기진 게임 디자이너는 블렌더를 이용해 직접 로우폴리(low polygon) 스타일의 목업 맵 제작에 나섰다.
로우폴리는 맵 검증에 적합하다. 그래픽적으로 디테일하지는 않지만, 전문적 지식 없이도 실제 결과물과 비슷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레벨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이때 김기진 게임 디자이너는 개인적으로 익혀둔 블렌더를 사용했다. 무료 툴이지만 마야, 맥스 등 다른 유력 툴과 사용법이 다르다는 것 외에 특별한 단점이 없고, 사용하기 쉽고 간편하다는 점에서 로우폴리 레벨 디자인에는 최적의 도구라고 그는 평가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획자가 3D 맵 데이터를 직접 제작할 때의 이점은 무엇일까? 우선 작업 중 계속해서 거리를 재어가며 맵을 설계할 수 있어서 정확한 공간 설계가 가능하다. 로우폴리 텍스처로 색을 쉽게 입혀볼 수 있어 인게임 느낌 재현에도 유리하다.
또한 클릭 드래그만으로 빠르게 맵을 수정할 수 있고, 엔진에 올린 뒤에는 블렌더에서 수정한 결과물을 리임포트하는 것만으로 수정사항이 빠르고 정확하게 반영된다. 따라서 짧은 시간 안에 해당 맵의 구성이 유효한지 검증하기에 최적의 방식이다.
위에 제시한 방법을 통해 개발진은 실제로 대로의 폭, 영지의 크기를 얼마나 줄이면 될지 테스트로 확인할 수 있었다.
레벨 디자인 방식도 단순한 공간 정리에서 더 나아가, 사냥터 내부를 크고 작은 꾸밈 공간으로 나눠 더 디테일하게 꾸미는 방식으로 접근을 바꿨다. 이 덕분에 아티스트는 꾸밈 공간 대 플레이 공간의 밸런스를 고민하지 않고 꾸밈 공간 디자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반대로 레벨 디자이너는 게임플레이 공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에서 아트 팀과 레벨 디자이너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확립한 것도 큰 수확이었다. 배경 팀의 적극적 의견 개진을 통해 10미터 크기 체크무늬로 사냥터 너비를 검증한다거나, 대로가 사냥터를 통과할 수 있도록 바꾼다거나, 맵을 줄이는 대신 퀄리티를 올리는 등의 절차상의 변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레벨 디자인 문서에도 효율적 변화가 생겼다. 꾸밈 공간과 플레이 공간을 명확하게 분리해 표현함으로써 꾸며도 되는 공간과 아닌 공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공간 설정은 레벨 디자이너가 인게임에서 직접 체험하며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었다.
물론 협업 방식을 다듬어나가는 과정도 필요했다. 일례로 공간이 미터 단위로 결정되자 그 안에서 다시 규칙이 세워질 필요가 있었다. 이를테면 쿼터뷰 시점을 고려할 때, ‘숲’으로 간주할 수 있는 공간은 최소 35m 폭이어야 한다는 규칙이 레벨 디자이너와 배경 아티스트 간 합의로 결정됐다. 이런 규칙들이 늘어나면서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때도 로우폴리 스타일의 목업이 문서 내용 전달에 도움을 줬다. 아트 유닛은 이 목업 이미지를 기준으로 원화 및 오브젝트 제작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울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김기진 디자이너가 12년 만에 얻은 개인적 깨달음도 있다. 우선 12년 전의 그는 극도로 세밀하게 레벨을 디자인했었다. 구성이 디테일할수록 원화 및 배경 작업이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이것은 작은 팀에서는 실제로 유효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수백 명 규모 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었다. 목업이 디테일할수록 아티스트의 창조성이 오히려 저해되었기 때문이다. 목업 상의 산, 강, 목책, 성 등 모든 요소를 하이폴리곤으로 대체하는 건 레벨 디자이너와 아티스트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녔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얻은 교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레벨 디자인은 세밀하게 미터 단위로 설계해야 한다. 동선은 플레이 경험인 동시에 곧 내러티브이며, 이 공간에 대해 레벨 디자이너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플레이 공간 위에 올려지는 박스들은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아야 한다. 대략적 콘셉트가 있더라도 그것을 구상하는 디자인의 ‘룩 & 필’은 아티스트에게 창작 권한을 넘겨야 한다.
레벨 디자인 문서와 목업은 배경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의 역할을 해야 한다. 만약 이런 협력 구조를 만들지 않는다면 게임 플레이가 힘들어지거나, 반대로 게임플레이는 편하지만 보기에 멋지지는 않은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김기진 레벨 디자이너는 로우폴리 목업의 또 다른 장점을 설명하며 강연을 마쳤다. 로우폴리 맵은 시각 자료에 그치지 않고, 실체가 있는 3D 공간이기 때문에 컬리전(collision) 처리를 거치면 인게임에서 뛰어다녀 볼 수 있는 맵이 된다. 실제로 개발진은 이 위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러보기도 했다.
김기진 디자이너의 개인적 희망은 목업으로 모든 맵을 온전히 설계해 게임플레이 및 테스트가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위에서 게임플레이 경험을 검증한 다음, 이를 로우폴리 레벨 디자인으로 다시 정제해서 실제 맵 제작에서도 시행착오 없이 완성도 높은 맵을 만들 수 있도록 기여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