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2016년 세계경제포럼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로,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차세대 산업혁명을 주도한다는 내용의 포괄적 개념이다.
NDC 2017 첫 날, 기조 연설자로 나선 이은석 왓 스튜디오 총괄 디렉터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게임 개발’이라는 주제로 강단에 섰다. 이은석 디렉터는 강연에 앞서 ”오늘 발표는 1~2년 뒤가 아닌 10년 후의 변화를 다룬다는 점, 그리고 회사의 의견이 아닌 개인의 의견이라는 점을 밝히고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은석 왓 스튜디오 총괄 디렉터
“언젠가는 게임 개발 로봇이 나오지 않을까?”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
2015년 NDC때 ‘언젠가는 게임 개발 로봇이 나오지 않겠느냐’라는 얘길 했었는데, 오늘은 이 얘기를 좀 더 풀어보려고 한다. <도라에몽>이라는 만화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만화의 견본을 기계에 넣고, 만화의 콘셉트와 분량을 입력하면 입력한 내용대로 완성된 만화책이 출력되는 것이다. 그 땐 판타지라 여겼는데,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지능화 된 로봇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보면, “게임도 언젠가는 저렇게 만들어 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게임 개발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게임은 디지털 시대의 놀이이며, 놀이는 인간의 본능이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우리는 놀이를 즐기고 추구한다. 그러나 놀이는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비필수적이며, 비실용적이다. 그러나 재미, 유희에 대한 욕망은 문명의 발전과 혁신을 견인해왔다. 산업혁명을 이끈 것이 증기기관 뿐 아니라 사치스러운 옷감의 유행이었다는 것도 그 예 중 하나다.
그런 측면에서 게임은 순작용도, 부작용도 있지만 가장 진화된 (놀이) 미디어다. 게임 속에서는 읽고, 보고, 듣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
게임의 가격을 잠시 생각해 보자. 개발비에 큰 차이가 있더라도 게임의 가격은 대체로 균등하다. 음식이나 가방의 경우 싼 것과 비싼 것의 차이가 아주 크지만 게임의 경우 그렇지 않다. 한 명에게 추가로 서비스나 재화를 제공하는데 소모되는 비용인 ‘한계 비용’이 거의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음식의 경우, 한 명에게 더 주려면 재료비와 인건비 등이 똑같이 1인분만큼 더 추가된다. 그러나 게임은 실체가 없는 재화다. 약간의 서버 비와 회선 비만 있으면 한 명의 유저에게 똑같은 품질의 게임을 공급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영화 역시 한 사람 분의 극장 좌석 임대료만 있으면 같은 품질의 영화를 제공할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해 질 수록 가격에서 한계 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게 되는데, 그에 따라 오늘날 게임은 (제작비에 비해) 거의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제공되는 수준까지 왔다.
게다가 게임은 태생적으로 글로벌 경쟁 체재에 놓여 있다. 뉴욕에 아무리 맛있는 식당이 있더라도 사람들은 대체로 직접 갈 수 있는 국내의 맛집을 찾는다. 그러나 게임은 다르다. 앉은 자리에서 최고의 게임들을 즐길 수 있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개발팀이라도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게임은 다른 여가 수단들과도 싸워야 한다. 무한히 공급되는 여가 수단들(공급)에 비해 유저들의 시간(수요)은 24시간으로 한정돼 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영화, 음악, 음식 등 다양한 재화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다.
이미 도래한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
사실 ‘4차 산업혁명’은 한국에서만 크게 유행하는 용어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인데, 작년 하반기부터 구글 검색 빈도가 크게 상승했다. 아무래도 ‘알파고 쇼크’의 영향이나 대선 후보들의 아젠다로 활용되다보니 그런 것 같다. 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제 3의 물결>붐과도 비슷한데, 아무튼 뭔가 큰 게 다가오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알고리즘과 하드웨어, 빅데이터에 기반한 딥러닝(Deep learning)은 불가능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지도학습된 AI가 할 수 있는 것에는 사진을 분석해 인물에 사람을 태깅할 수 있는 ‘사진 태깅’이나 언어 번역 같은 것들이 있는데 분석을 위해 질문에 대한 정답 세트가 수십 만 개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인지 자동화’는 인공지능의 많은 부문 중 특히 각광받고 있는데, 이유는 ‘1초 이내의 즉각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일부 업무는 가까운 시일 내에 인공 지능을 통한 자동화가 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공지능의 성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 지능에는 견줄 수 없지만, 훈련된 특정 분야에 한해서는 인간보다 나을 수 있다는 ‘약한 인공 지능’ 시대는 이미 도래해 있다. ‘알파고’가 인간의 신경망에는 견줄 수 없지만 바둑의 승리에 한해서는 특출난 것이 그 예다.
그렇다면 인간의 노동은 종말할까?
인공 지능에 의한 노동 종말의 징후는 지금도 보이고 있다. 운전/운수업 종사자는 자율 주행차가 도입되면 실업 위기를 맞을 것이고, 금융 거래나 기사 작성은 이미 인공 지능이 해 내고 있다.
인공지능의 가성비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기계가 인간보다 잘 하진 못하더라도, 인건비보다 싸면서 24시간 365일 일하기 때문에 자동화 될 수 있는 분야는 점점 고용이 축소될 것이다.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직업이 생기니 괜찮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가 너무 빠른 것이 문제다. 직업 전환에는 오랜 시간 많은 교육이 필요한데, 현재 변화 속도로는 인간이 한 생애 내에 겪을 패러다임 변화가 너무 잦다. 게다가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약한 인공지능 시대, 게임산업에 벌어질 일들
게임산업은 소프트웨어 산업이기 때문에 인공지능 도입이 더욱 쉽다. 하드웨어가 없기 때문에 자율주행차나 산업용 로봇의 문제점인 ‘상해’에 대한 위험에서 자유롭고 한계 비용이 적어 비용도 싸다.
그러나 독과점과 양극화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먼저 치고 나가는 선두 플랫폼은 규모의 경제 외에도 네트워크 효과를 만들어 낼 것이며, 플랫폼이 커질 수록 소비자는 유리하기 때문에 성장은 가속화 될 것이다. 또한, 거대 기업은 빅데이터에 중요한 요소인 데이터의 양이 많기 때문에 더욱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창의적인 일도 안전하지 않다, 작아지는 개발팀
약한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게임산업에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 일이 많아서 줄이기 위해 자동화를 도입했는데, 오히려 일을 잃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직업을 잃는 것은 아니겠지만 신규 채용이 감소하는 등 결국은 일자리 감소의 길을 걷게 된다. 노동자는 노동 조건 개선(넉넉한 업무 시간과 예산, 저녁이 있는 삶)을 통해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했을 뿐인데 노동 기회가 감소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는다. 게임산업같은 ‘한계 비용 제로 산업’에서는 자동화를 통해 얻게 되는 이득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할 것이다.
또한, 게임산업은 필연적으로 유저의 시간을 오래 점유해야 하기 때문에 질리지 않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변하는 콘텐츠’가 필수적이다. 인공 지능을 이용하면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거나, 레벨/배경 아트를 자동으로 디자인하고 고해상도 3D 텍스쳐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알파고처럼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오메가고’를 상상해 보자. 기사들이 ‘어떤 플레이를 할 때 희열을 느끼는 지에 대한 데이터’가 포함된 기보를 학습한 오메가고는 단순히 승리하는 것이 아닌,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희열을 주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기사들의 뇌전도, 심박, 호흡, 체온 등을 수없이 학습한 오메가고는 ‘궁극의 바둑 게임’이 된다.
이렇게 게임에 인공 지능을 이용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비용을 비롯한 여러가지 한계 때문에 당장 도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동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생산성, 가격, 경쟁력)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이들 게임과 경쟁해야 할 지도 모른다.
여전히 AAA급 타이틀(Full Price로 판매 가능한 타이틀)에는 수백 명의 개발자들이 동원되겠지만, 최상위에 해당하는 게임들에 한정된 얘기다. 그 외에는 모두 한계 비용에 가까운 금액으로 판매될 것이며 가격을 맞추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고용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당신의 자리가 AI로 대체될 것이니 그만 나오시오.” 같은 일이 벌어진다기 보다는 경쟁에 밀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거나, 프로젝트가 접혀서, 신입이 안 뽑혀서 실직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일은 안전할까? 알파고 역시 바둑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는 창의적이다. 게다가 창의성의 개념을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조합으로 유용한 해결책을 만드는 능력’이라 정의했을 때, 인공 지능의 랜덤성과 이것이 적합한 해결책인지 측정 가능한 평가 방법이 있다면 인공지능이 창의성을 ‘창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라서 프로그래머 역시 ‘코딩’ 분야는 자동화 될 가능성이 설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또한, 자동화를 만드는 것이 설계 파트 프로그래머의 영역이므로 업무의 성격이 계속해서 변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인공지능의 위협에 기업과 개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먼저 기업 입장에서는 인공지능을 게임 개발에 적극 도입하는 것이 유리하다. AI가 게임을 만들면 마치 1:1 수업을 받는 것처럼 계속해서 개인화 된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항상 변하기 때문에 질리지 않는 콘텐츠를 유저가 원할 때 제공할 수 있다. TRPG에 존재하는 게임 마스터를 AI가 맡는다고 생각해 보면 쉬울 것이다.
패스트 팔로워는 AI가 더 잘 하기 때문에 통하지 않는다. 또 패턴화 될 만 한 것은 자동화되기 쉽기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 기계든 사람이든 따라할 수 없는 IP와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좋은 대처라고 볼 수 있다. <잉그레스>에 <포켓몬> IP가 더해 차이를 만든 것처럼.
개인의 경우 데이터화 하기 어려운 직무를 모색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AI 학습에는 패턴 파악을 위해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 데이터가 많은 일은 기계화되기 쉬운 일이고, 본인이 기계적이라 생각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자동화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면 된다. 데이터가 많이 생기는 분야에 있다면 많이 생기지 않을 영역으로 확장해 보자.
두 번째로, AI는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 이해하는 직무는 자동화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인간과 같은 성장 과정을 가진 것도, 같은 신체나 생리 구조를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 협상은 기계에겐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인공 지능의 활성화로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면 지금은 고민하기 어려운 자아 실현의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기계화 된 업무가 아닌, 의미 있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은 인공 지능 시대의 희망적인 면모라고 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팀 동료를 일의 일부로만 생각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존중과 재미, 성장을 제공하는 동반자로 인식한다면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가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