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매체와 온라인 매체가 특정 제품이나 대상을 집중적으로 띄워주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현상을 '하이프'(hype)라고 지칭한다. 우리말로는 흔히 '과장광고'라고 옮겨진다.
‘하이프 사이클’은 IT 기 및 자문 기업 가트너가 고안해낸 시장 예측 모델의 하나다. 실용성 혹은 객관성 측면의 비판도 있지만, 오랜 기간 IT 업계 전반이 참고/인용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하이프 사이클은 잠재적 기술이 시장에 등장해 실제 생산성을 지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5개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5단계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잠재적 기술이 처음 시장에 소개된다(기술 촉발). 해당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시도가 나타나지만, 일부만 성공을 거둔다(기대의 정점). 이후 기술의 실제 성과가 나타나지 않음에 따라 소비자가 실망한다(환멸의 골). 이후 대중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수익 모델이 등장한 뒤(계몽의 경사로) 마침내 기술이 시장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생산성의 평원).
올해 8월 가트너는 2022년 신흥 기술들의 하이프 사이클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메타버스 기술은 현재 1단계인 ‘기술 촉발’ 단계에 머물러 있다. 주목할 점은 또 있다. 가트너는 메타버스의 5단계 진입에 적어도 10년이 걸린다고 봤다. 즉 업계의 ‘다양한 시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생산성 발휘는 아직 먼 이야기라는 이야기인 셈.
이와는 사뭇 다른 관점도 있다. 지난 10월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메타버스 기술이 하이프 사이클의 3단계인 ‘환멸의 골’ 단계에 있다는 견해를 내놨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다음은 실제 수익을 낼 수 있는 메타버스 기술이 등장하는 ‘계몽의 경사로’ 단계다.
한편 <둠>을 만든 전설적 개발자 존 카맥은 메타의 VR 총괄 고문직을 사임하면서 "VR에서의 내 10년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VR는 많은 사람에게 가치를 전할 수 있으며, 메타만큼 그 일을 잘할 회사는 없다'는 말로 고별을 기했지만, VR의 가치를 강하게 신뢰했던 그의 '이탈'을 시장의 미래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징조로 여기는 시선은 많다.
이들 사례 외에도 메타버스 기술의 현재에 대한 평가와 앞날에 대한 기대는 여러 층위에서 엇갈리고 있다. 2021년 정점에 달했던 '메타버스 하이프' 2022년 한해 어떤 궤적을 그렸고, 2023년엔 어느 방향을 향할까?
TIG 신년기획
① 메타버스 하이프, 결국은 계속 간다? (현재 기사)
②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도입 (바로가기)
③ 역대급 불황에도 "살아남자" 7개 인디 개발사의 생존법은? (바로가기)
④ 2023년, 어떤 게임이 출시될까? 30개 작품 둘러보기 (바로가기)
단어의 정의, 혹은 산업적 분류에서 메타버스의 외연이 불분명하다는 사실은 메타버스 회의론의 꾸준한 논거다. 그러나 2022년이 마무리되기까지 산업과 학계가 모두 동의할 통일된 정의는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 미래학단체 ASF가 제시한 ‘메타버스 분류’ 이론에 기댄 정의가 자주 언급되던 과거에 비해, 2022년에는 보다 실용적이며 현실에 입각한 설명이 등장한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올해 초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메타버스 신산업 선도전략’에서 메타버스를 “가상과 현실이 융합된 공간에서 사람·사물이 상호작용하며 경제·사회·문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세계”로 정의했다.
이 또한 아직 다분히 추상적인 인상을 주는 설명이다. 대신 과기부는 실제 운영 중인 메타버스 플랫폼들을 그 활용 목적에 따라 분류하면서 더 뚜렷한 윤곽을 함께 제시했다. 과기부는 메타버스가 ▲사회관계 형성 ▲디지털 자산 거래 ▲원격협업 지원의 세 유형으로 나뉘는 것으로 봤다.
사회관계 형성 유형으로는 SNS·게임에 집단놀이, 문화 활동을 접목한 ‘로블록스’ 등 사례가 거론된다. 디지털 자산 거래 유형에는 가상부동산이나 가상상품 등의 직거래가 이뤄지는 ‘디센트럴랜드’ 등이 꼽혔다. 원격협업 지원의 예시로는 원격 의사소통 및 다중협업 지원이 이뤄지는 ‘MS 메시’ 등 사례가 등장했다.
한편 가트너가 제시한 메타버스의 정의는 ‘완성형 메타버스’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기반 기술을 언급하면서 조금 더 구체적인 지향점을 제시한다. 가트너는 메타버스를 “증강 현실과 디지털 현실의 융합으로 형성된, 종합적으로 공유되는 가상 공간”으로 이야기했다.
동시에 가트너는 메타버스를 완성하는 ‘3요소’를 함께 제시했다. 첫 번째는 이동(transport)으로, 이용자를 가상 현실에 온전히 몰입시킬 수 있는 역량을 말한다. 둘째 요소인 변화(transform)는 디지털 세계를 현실 세계에 중첩할 수 있는 기술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거래(transact)는 가상화폐, NFT 등 블록체인 기술을 통한 경제적 토대를 의미한다.
VR(이용자 몰입), AR(디지털 세계 중첩), 블록체인(경제적 토대) 등 기반 기술들이 빠짐없이 마련되었을 때 비로소 메타버스가 완성된다는 시각이다. 더 나아가 현실 세계와의 연결을 영구히 유지하는 연속성과 플랫폼 간의 상호운용성 역시 메타버스를 기능하게 하는 중요 요건으로 제시했다.
한편 과기부의 경우 이러한 ‘몰입 경험’ 형태의 완성형 메타버스가 분야에 따라 순차적으로 상용화될 것으로 내다본다. 우선 현재는 PC, 스마트폰 기반의 일상생활, 사회활동 중심의 메타버스 서비스가 먼저 보편화한 상태다. XR(확장 현실) 기반 메타버스는 제조·훈련 등 전문영역에 먼저 특화되어 활용되다가 차츰 일상 및 업무 영역에 확산하리라는 것이 과기부의 예측이다.
지난 2021년 7월 메타버스 산업 육성에 중·장기적으로 국비 2조 6,000억 원을 들이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다소의 우려를 낳았던 과기부는 이런 '장래적' 관점에 따라 결국 2023년에도 지원을 이어나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2023년 예산안에 따르면 총 18조 9,000억 원 중 메타버스 플랫폼 산업 육성 사업 및 서비스 개발에 600억 원 예산이 편성될 예정이다.
PC, 스마트폰을 이용한 일상적 메타버스가 대중 사이에 먼저 자리를 잡고, XR 기반의 메타버스는 다음에야 상용화되리라는 과기부의 공시적 관점은 아직 상용화에 난항을 겪고 있는 XR 관련 기술 개발 현황을 볼 때 설득력이 있다.
메타버스를 궁극적으로 기존 플랫폼들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현실과의 경계를 허무는 몰입 경험이다. 메타버스의 주요 기능으로 꼽히는 온라인 거래, 온라인 소통, 온라인 협업 등은 사실 게임이나 웹 등 기존 플랫폼에서도 충분히 정상 작동해 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몰입경험의 기본 요건으로 제시되는 XR, 그리고 그 구성 요소인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의 상용화에서 업계는 현재 분명한 걸림돌 몇 가지를 넘지 못하고 있다. 첫 번째는 가격이다. 올해 있었던 메타의 ‘메타 퀘스트 2’ 가격변동 전후의 상황을 보면 VR 기기의 가격 민감성 이슈를 파악할 수 있다.
메타 퀘스트 2는 현재 VR 시장에서 75%의 압도적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파격적인 가격 책정의 결과로 풀이된다. 실제로 올해 초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동일 사양 기기에 비해 수십만 원 저렴한 퀘스트 2의 가격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독점 혐의 조사를 시작하기도 했다.
한편 시장조사기업 CSS 인사이트가 12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VR헤드셋 제품 출하량은 전년 대비 12% 하락했고, NPD 그룹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 내 VR 판매도 2% 감소했다.
그 원인으로 꼽히는 것 역시 ‘메타 퀘스트 2’의 가격이다. 올여름 인플레이션으로 메타가 제품 가격을 약 13만 원 인상하고 글로벌 거시 경제가 약세를 보이면서 메타 퀘스트 2 판매는 처음으로 감소세를 기록하는 등 부진을 겪었다. 이렇게 단일 가성비 제품의 가격 변동이 전체 시장 악재로 반영될 만큼 VR기기의 가격 민감성은 높다.
둘째 걸림돌은 이용 편의성이다. 대부분의 VR 기기는 아직 해상도, 어지럼증 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경험 제공은 여전히 요원한 상태. 더 나아가 HMD(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 경량화, 소형화 역시 아직 갈 길이 멀다.
주요 기업들이 주요 과제로 삼아 연구를 지속하면서 일부 개선이 이뤄졌지만, 가격 문제가 다시 발목을 잡는다. 지난 10월 메타가 발표한 신제품 ‘메타퀘스트 프로’의 예시가 대표적. 자체 개발한 ‘팬케이크’렌즈를 이용해 HMD 경량화 및 소형화에 성공했지만 219만 원의 높은 가격이 책정됐다. 구체적인 판매량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소비자 커뮤니티에서 포착되는 시장 반응은 차갑다.
메타가 찾은 돌파구는 ‘기업용’ 포지셔닝이다. 10월 있었던 APAC 기자 대상 브리프 세션에서 마크 랩킨 메타 리얼리티랩스 부사장은 메타퀘스트 프로를 컬러 혼합현실(MR)을 제공할 수 있는 ‘업무용 기기’라고 전했다. 관련하여 MS, 액센추어, 어도비 등 기업과 협력하고 있으며 비즈니스 전문가나 메타버스 크리에이터, 게이머 등에도 적합한 기기라는 설명이다.
‘대중화’ 숙제로부터는 한 걸음 물러나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는 AR 기기 중 가장 진보한 제품으로 평가되는 MS의 ‘홀로렌즈’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로 포착되는 이슈다. 홀로렌즈 2 역시 일반시장에서의 판매를 완전히 포기하고 군용, 기업용으로 납품되고 있다. 과기부의 전망처럼 XR 기술의 본격적인 활용은 전문영역에서 먼저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일반 소비자용 VR/AR 헤드셋 개발 경쟁 역시 활발히 지속 중이라는 사실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구글의 경우 지난 5월 자체 행사인 ‘구글 I/O 2022’에서 실시간 번역 기술을 제공하는 AR 글래스를 소개했다. ‘구글 글래스’의 실패를 딛고 다시금 AR 글래스 시장에 뛰어든 것으로 업계는 바라보고 있다.
2023년 다시 찾아올 CES 행사에서도 주요 신형 VR 기기 공개가 예정되어 있다. 소니의 신형 VR하드웨어 ‘PSVR2’, 그리고 아직 명칭이 공개되지 않은 HTC 바이브의 새 VR 제품이 소개될 예정이다. 한편 밸브도 12월 있었던 본지 인터뷰에서 “최근 VR 헤드셋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2021년 코로나19의 여파로 비대면 중심의 비즈니스 ‘뉴노멀’이 찾아오리란 기대는 메타버스 관련주의 폭발적 성장을 낳았다. 그러나 2022년에 접어들어 대표적 메타버스 기업 로블록스와 메타 주식이 각각 1년간 각각 71%, 64% 하락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꼽히지만, 뉴노멀 기대가 부풀었던 것에 비해 실제 패러다임 전환은 예상보다 확정적이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저커버그 메타 CEO가 직접 제시한 실패 원인과도 맥을 같이한다. 11월 저커버그는 자사의 AR, VR 개발을 담당하는 ‘리얼리티 랩스’ 부서 인원을 다수 포함해 총 11,000명의 인원을 정리해고하면서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전 세계가 급속히 온라인으로 이행하고, 전자 상거래 급증으로 해당 시장의 매출이 대폭 확대되었다. 가속 현상이 판데믹 종료 후에도 지속할 것으로 내다봤고 투자를 대폭 확대했으나, 예상만큼의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전자 상거래 트렌드가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거시경제의 침체, 경쟁 강화, 광고 ID 제공 중단 등 이슈로 인해 내 예상을 크게 밑도는 수익을 기록했다.”
이처럼 메타버스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은 급등했던 시장 기대의 반동 효과로 위기를 겪고 있다. 그렇지만 기존 보유한 역량을 활용해 더욱 ‘현실적인’ 형태의 메타버스 투자를 지속하는 기업이 여전히 많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현재로선 구현이 어려운 몰입경험이나 가상 세계 완성에 전력투구하는 대신 현존 기술과 자사가 보유한 역량 범주 내에서 비교적 ‘안전한’ 투자를 이어 나가는 양상이다.
가까운 예시로 국내에서도 관련 기업들의 자사 역량을 통한 실용적 도전이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넥슨은 게임 제작 메타버스 플랫폼 <메이플스토리 월드>를 발표했다. 컴투스그룹을 중심으로 하나금융그룹, 마이뮤직테이스트, 교보문고 등 각 분야 유력 주자가 참여해 만드는 메타버스 프로젝트 ‘컴투버스’ 역시 비슷한 접근으로 볼 수 있다.
글로벌로 시선을 돌리면 마케팅 채널로서의 활용 시도가 빈번하다. 반다이 남코는 풍부한 IP를 기반으로 한 메타버스 테마파크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금융 기업 HSBC는 블록체인 기반 메타버스 ‘더샌드박스’에 입점했다.
또다른 금융사 JP모건 역시 동종 플랫폼 ‘디센트럴랜드’에 가상 영업점을 열었다. 나이키는 자체 메타버스인 ‘나이키랜드’를 만들었고, 구찌는 네이버의 ‘제페토’를 포함 다양한 메타버스 플랫폼과 컬래버한 사례가 있다.
이들 사례를 보면, 메타버스가 장기적 차원에서 ‘신경 써야 할’ 트렌드라는 관점이 적어도 산업 내에서 통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맥킨지 앤 컴퍼니는 메타버스의 시장가치가 2030년까지 최대 5조 달러(약 6,315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 전망이 단기적 시장 성과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시장 트렌드는 오히려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단적인 예로 국내 메타버스 대장주로 꼽히던 자이언트스텝을 비롯, 맥스트, 덱스터, 위지윅스튜디오, 알체라 등 관련주는 모두 2022년 한해 60~75%에 달하는 하락폭을 보인 바 있다.
관련주 상한가가 이어지던 2021년의 ‘메타버스 광풍’은 2022년에 들어 온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평가된다. 실질적 성과가 아닌 기대감만으로 밸류 상승이 이뤄졌던 만큼, 금리인상, 인플레이션, 우크라이나 전쟁 등 거시경제 악화를 버텨내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