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C 2020에 등장한 <원혼>은 이른바 'K-잠입액션'을 소재로 하며 적지 않은 관심을 얻었습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속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소녀가 귀신의 능력을 빌어 벌이는 게임이죠. 소재도, 게임방식도. 꽤 신선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테스트 단계였던 <원혼>은 약 9개월의 시간을 거쳐 스팀, 스토브 인디에 정식 출시됐습니다. 버그 개선이나 편의성 개선 등을 거쳤겠죠. 오랜만에 출시 버전을 해보니 그때의 기억이 다시 나더라고요. 빙의와 잠입 액션의 결합은 역시 인상적입니다.
근래 여러 장르, 컨셉의 게임이 출시됐지만 <원혼>은 개성만큼은 단연 돋보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게다가 우리 민족의 '한'인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했다니 지나칠 수 없죠. 분노의 마음을 안고 <원혼>으로 해소해봅니다. / 디스이즈게임 정혁진 기자
# 샤머니즘을 소재로 한 초자연적 복수극(?)
체험에 대한 소감을 밝히기 전에 먼저 게임의 배경 설정에 대해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원혼>은 1920년 일제강점기 속 한국이 배경입니다. 어느 날 한 소녀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고 그녀는 저승사자를 만나 "자신이 이들의 억울한 한을 대신 풀어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그를 돕는 조건으로 귀신 능력을 얻어 현세로 부활하게 되죠.
저승사자로부터 얻은 능력은 바로 '빙의'입니다. 소녀 자체가 이미 저승에 있는 영혼인 만큼 현세의 인간 몸에 들어가 그들을 조종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해 우리 민족에게 준 원한을 복수한다는 설정은 여러 방법으로 다뤄졌지만, 초자연적인 요소를 활용한 게임은 이번이 처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소녀는 신체가 연약하지만 저승사자와의 거래로 '빙의'라는 슈퍼히어로급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빙의는 이 게임이 주는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 포인트라고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혼>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당하는 핍박이나 해방(독립)을 위한 스토리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습니다. 설정만 주어질 뿐이죠. 나라를 빼앗긴 과정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의 못다한 바람을 조금 '독특한 방법'으로 풀어주는 복수극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당한 원한을 복수하기 위해 다른 혼의 원한을 대신 복수해준다는 내용이어서 상대적으로 소녀 본인의 스토리는 덜 부각된 느낌입니다만, 저승사자가 계약을 하며 '귀신이 돼서 하는 일에 대해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얘기를 보면 뭔가 소녀에게 주는 메시지도 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본격적인 스토리 파악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쯤 생략하겠습니다.
# 변하는 상황에 맞는 빠른 판단이 필요, 잠입 액션의 묘미 잘 살렸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체험해 본 소감을 얘기해보겠습니다. <원혼>에는 원한을 가진 수많은 혼이 유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거 데모 버전에서는 일부 스테이지만 체험할 수 있었지만 풀버전에는 17개의 스테이지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무덤에는 사연을 가진 혼이 있고, 혼의 부탁은 곧 다음 미션의 목적이 됩니다. 각 스테이지는 물리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복수'라는 공통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죠. 소녀는 이들의 원한을 해결해줘야 합니다.
잠입과 빙의 기술을 익히고 나면 별도 튜토리얼 없이 바로 실전입니다. 각종 기능을 사용해야 할 때 팝업 형태의 설명이 나와 적응이 어렵진 않습니다. 잠입은 당연히 적에게 들키지 않아야 하므로 소녀 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적의 시야 사각에서 몰래 근접해 빙의에 성공하면 일정 시간 동안 적으로 빙의해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은 어렵지만 군인부터 군견까지 다양한 것에 빙의해 플레이를 할 수 있습니다.
스테이지는 거듭할수록 난이도가 올라가는 계단식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반에는 잠입과 빙의를 익히는 수준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인질을 데려오거나 아이템을 획득하는 등 복잡한 미션을 수행하게 됩니다.
모든 잠입 게임이 그렇듯 <원혼>도 이를 위해 꽤 머리를 써야 합니다. 스테이지 초반에는 상황에 맞게 잠입, 빙의를 조합하는 수준이 어렵지 않지만, 스테이지3 정도만 가도 적들을 따돌리면서 물건을 되찾아오기가 제법 까다로운 수준이 되거든요.
스테이지 내 적의 수나 임무 등은 고정되어 있지만, 적들이 꾸준히 이동하며 감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플레이 패턴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유저의 체력이나 제한된 빙의 상황도 늘 같을 수는 없겠죠.
# 더 이상 꼼수는 없다, 오로지 잠입과 빙의에만 신경 써야
소녀일 때는 공격 수단이 없기 때문에 적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최대한 잠입하며 이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빙의를 하면 상황이 달라지죠. 적의 외형이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나마 자유롭게 누빌 수 있습니다.
소녀가 적에게 빙의를 해제하면 원혼 형태가 됩니다. 이때는 벽이나 장애물을 순간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혼 상태도 빙의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제한적이기에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빙의했을 때나 원혼 상태나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상관이 없지만, 만약 스스로 죽거나 다른 적을 죽이면 그들의 원혼으로 보이는 붉은 색의 빛이 소녀를 따라오게 됩니다. 이 빛이 닿게 되면 빙의 또는 원혼 상태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감소되죠.
시간이 모두 소요되면 다시 소녀의 상태로 돌아옵니다. 적을 교란하거나 제거하는 시간은 꽤 제한적이기 때문에, 빙의 후 활동을 제법 빠르고 신속하게 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느긋하게 플레이할 수는 없는 게임입니다.
빙의 상태에서 누군가를 죽이면 다른 병사가 와서 적군으로 인식, 빙의한 유저를 죽입니다. 물론 죽게 되면 원혼 상태로 변하기 때문에 게임오버는 되지 않습니다만, 위에서 말한 붉은 빛이 다가와 빠르게 원혼 상태를 해제시키기 때문에 가만히 있다가는 소녀의 모습이 발각돼 미션에 실패하게 됩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씩 빙의를 위한 방해 요소가 추가됩니다. 초반에는 빙의를 해도 아무 행동을 하지 않으면 괜찮았지만, 후반으로 가면 군견이 빙의한 상태를 감지해 공격하거든요.
당연히 스테이지를 거듭할수록 군견의 숫자나 추가 방해 요소가 늘어날 겁니다. 플레이도 보다 신중하게 되고요. 무작정 돌격해서 적들을 해치우는 플레이는 점점 구사하기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데모 버전에서는 빙의 상태에서 총성으로 유인을 해도 빙의한 소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는데, 정식 버전에서는 적으로 인식해 죽이게 바뀌었더라고요. 수류탄병 같이 범위 공격을 하는 병사로 빙의해 유인한 다음 적들을 몰살시키는 꼼수 플레이는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게임마다 메인 목적이 있기는 하지만 높은 등급을 얻기 위해선 당연히 빠른 시간 내 많은 적을 처치해야 하는 것이겠죠. 본인의 플레이에 따라 여러 플레이를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과도한 욕심은 게임오버가 될 테니 주의해야 합니다.
# 잠입의 본질적인 재미를 잘 살려낸 K-잠입 게임, '원혼'
게임 몰입에 방해될 수 있는 일부 요소가 보강되면서 <원혼>은 좀 더 잠입에 몰입할 수 있는 게임이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잘 대처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다만, 잠입 시 좀 더 긴장감을 높이도록 적의 시야나 AI를 좀 더 실감나게 연출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적의 시야는 부채꼴 모양으로 바닥에 표시되는데, 정면으로 이동하며 시야각에서 살짝 벗어나기만 해도 적의 후방을 노리기 쉽더라고요. 좌, 우로 둘러보며 경계를 하지 않다 보니 경계 범위도 제한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적에게 발각돼 쫓기는 상황에도 바로 근처 건물에 엄폐만 하면 적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수월했습니다. 좀 더 유저를 집요하게 쫓는다는 느낌이 강조되면 긴장감이 고조될 것 같습니다. 음악도 좀 더 다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지금 수준으로도 잠입 액션의 재미는 충분히 살렸다고 평가됩니다. 빙의를 하며 여러 방식으로 공격의 수단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꽤 참신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17개의 스테이지가 직렬식 구성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해도 빠른 클리어를 노리거나 모든 적을 처치하는 등 추가 타임어택 요소도 있습니다. 그밖에 별도 게임모드도 있어 좀 더 다양하게 게임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고요.
<원혼>은 데모 버전에서 경험한 대로 여전히 긴장감이 넘치는, 잘 만들어진 K-잠입 게임입니다. 추가 스테이지를 계속 선보여 좀 더 즐길 거리를 늘려줘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현재로서도 볼륨이 괜찮은 편이기는 합니다.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