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게임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중앙대 영화과 졸업작품으로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를 제작했다. '내언니전지현'은 박 감독이 11살 때부터 <일랜시아>에서 써온 닉네임. 그는 여전히 '마님은돌쇠만쌀줘' 길드의 마스터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자신의 궁금증을 푸는 영화였다. "왜 유저들은 여전히 일랜시아를 왜 하고 있는 걸까?" 그 대답이 대중과 평단의 호응을 얻었다. 덕분에 상도 많이 탔다. 춘천SF영화제 '과학창의재단 관객상', 정동진독립영화제 '땡그랑동전상',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젊은 기러기상'.
그가 4년 만에 <세이브 더 게임>으로 돌아왔다. 이번 영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게임은 어떻게, 누가 만들었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했다. 한국 게임 1세대를 다룬 최초의 영화이자,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최초의 게임 소재 영화가 됐다. 호응도 컸다. 첫 시사회를 시작하기 전 모든 회차가 매진됐다.
박윤진 감독에게 직접 물었다.
<세이브 더 게임>의 박윤진 감독
Q. 디스이즈게임: 특별히 이 시기를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만들게 됐나?
A. 박윤진 감독: 온라인게임으로 게임을 처음 접한 나같은 90년대생들은 한국 게임의 역사라고 하면 보통 <바람의나라>부터 떠올린다. 우리나라가 온라인게임으로 게임 강국이 되었기에 최초의 온라인게임을 한국 게임 역사의 시작으로 기억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우리나라 최초의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가 만들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자료조사를 하다보니 1980년대 후반부터 국산 게임이 차곡히 만들어져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이 시기에 게임을 개발한 1세대 개발자들을 조명하는 것이 우리나라 게임 역사 기록의 시작이라고 생각해 이 시기를 조명하게 됐다.
Q. 한국 게임 1세대를 본격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세이브 더 게임'라는 제목은 어떻게 지었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A. 게임이 온라인으로 유통되기 전에는 디스켓에 담겨 오프라인으로 유통됐다. 영화의 방향성을 잡기 위해 1세대 게임 개발자들을 찾아가 사전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이 있다.
‘이들은 게임을 개발한다고 손가락질 받던 시선을 이겨내고 자신의 게임을 지키기 위해 정말 많은 고군분투를 해왔구나'였다. 그들이 게임을 디스켓에 담는 여정이 마치 그들의 꿈을 지켜내는(save) 여정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목을 ‘SAVE THE GAME’이라고 짓게 됐다.
게임을 디스켓에 담는 여정이 마치 그들의 꿈을 지켜내는(save) 여정처럼 느껴지기 시작해 제목을 '세이브 더 게임'으로 지었다고. 사진은 인터뷰이로 참가한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출처: 사이드미러)
Q. <세이브 더 게임>은 부산국제영화제에 한국 게임을 다룬 최초의 영화로 출품됐는데 시사회를 앞두고 어떤 느낌이었나?
A. 너무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이었는데, 두 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하나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주신 분들이 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였고, 둘째는 ‘관객분들이 좋아해주셨으면 좋겠다'였다.
Q.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다. 첫 시사회에서 보니, 출연자와 관객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질문은?
A. 관객분들이 영화를 깊게 봐주시고 다양한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했다. 특히 전작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보고 오신 분들이 많아서 든든하고 반가웠다. 게임을 좋아하거나 게임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오셔서 그런지 게임 다큐멘터리 GV(관객과의 대화)는 항상 분위기가 좋은 것 같다.
인상적이었던 질문은 <세이브 더 게임>은 개발자의 이야기고,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유저들의 이야기인데 두 작품을 하며 느낌 점을 묻는 질문이었다. 사실 <세이브 더 게임>을 하며 전작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질문을 듣는 순간 두 영화가 굉장히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외면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손노리의 주역이었던 이원술 대표, 서관희 현 원더스쿼드 대표와 90년대 패키지게임을 살펴보는 박윤진 감독 (출처: 사이드미러)
Q. 초창기 PC게임에 관해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을 텐데 제작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A. 오영욱 님(게임역사 연구가)이 아카이빙해둔 잡지 자료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 잡지 구석구석에 있는 게임 광고, 독자 의견, 편집자 노트 등을 전부 사료로 활용했다.
Q. 게임 1세대 역사나 증언 모두 다양할 텐데 어떤 점에 포커스를 두었는지?
A. 수많은 개발자들이 전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각 개발자가 영화에서 가지는 의의를 생각하면서 선정 후 편집했다. 개인의 매력이나 게임의 인지도보다도 '이 인물이 역사의 마디마디를 가장 잘 드러내줄 수 있는지'를 주목했다.
Q. 역사를 다뤄서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데, 재기발랄한 느낌이 들었다. 레트로 느낌도 나던데, 영상 편집(사운드 포함) 콘셉트는 어떻게 잡았나?
A. 아무리 역사물이고 옛날 얘기여도 결국 '청년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업계 중역들이지만 그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소년스러운 눈빛으로 바뀐다고 생각했다. <슬램덩크>처럼 청년들의 땀냄새 나는 승부가 담기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게임을 발매하거나, 발매된 게임이 흥행하는 장면에서 박진감이 넘치도록 편집했다.
패키지와 온라인 게임 두 세력으로 나뉘어 진행되는 서사를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하나는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 하나는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 이렇게 두 개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당시 잡지와 기사 속 이미지를 사용해 꼴라주 아트로 구현했다.
사운드는 최대한 그 당시 게임의 음악을 많이 썼고, 그 시절의 감성을 느낄 수 있도록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할만한 명곡들을 몇 군데 배치했다.
이야기의 시작으로 등장하는 세운상가 (출처: 사이드미러)
Q. 영화를 제작하면서 이 시기 또는 개발자에 대해 가졌던 기존 인식과 달라진 게 있다면 어떤 건가?
A. 기존 인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예 없어서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모든 정보를 받아들였다. 우리가 참고한 자료 속 모든 개발자들이 내 나이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먼 존재가 아니라, 가까운 존재로 느끼면서 작업했다.
요즘의 청년 세대보다도 더 과감하게 도전하고 낭만을 소중히 여기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서 스스로의 삶에도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적용해보게 되었다.
Q. 영화를 제작하면서 게임 개발자들의 증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
A. 첫 사전 인터뷰를 했던 개발자가 정재성 개발자였다. 정재성 개발자는 <그날이오면3>로 국산 패키지 게임 시장을 연 사람이다. <그날이오면3>가 히트를 쳤다는 것은 그 앞에 <그날이오면1>과 <그날이오면2>도 발매가 되었다는 의미다.
어떻게 두 작품의 흥행 실패를 딛고 <그날이오면3>를 만들 수 있었냐고 묻자, 정재성 개발자님이 "우연히 잡지에서 남인환의 <신검의전설>출시 기사를 봤다. 그 기사를 보고 나 말고 국산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서 게임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시며 "그 시절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이 국내에 몇 없어서 건너건너 서로의 소식을 들었고, 그게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하셨을 때 그 눈빛과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Q. 영화를 제작하면서 발견한 1세대 한국 게임 개발자들의 공통된 정서나 정신, 철학 같은 게 있었나?
A. 좋아하는 것에 인생을 걸어보는 아주 순박한 마음, 그리고 정보를 귀하게 여기는 동시에 내가 알아낸 것을 남들과 나누려는 마음.
박윤진 감독은 정재성 개발자가 <그날이오면>을 만든 이야기를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이야기했다. (출처: 사이드미러)
Q. 제작을 통해 개인적으로 얻은 통찰이나 배움이 있다면?
A. 너무 뻔한 말이지만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고, 성취보다 함께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
모두가 게임 발매 이후의 기쁨보다도, 게임을 만들고 있던 도중 팀원들과 고생한 썰을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어쩐지 그 표정이 고통스럽지 않고 들뜬 듯한 표정으로 모두가 공통적으로 “...그래도 그때 참 재밌었다"고 말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그렇게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는 것도, 누군가들이 함께 그 시간을 지나주는 것도 아주 귀한 일이지 않을까. "20대의 시간이 게임 타이틀로만 기억된다"는 최연규의 말처럼 이 다큐를 만들고 있는 우리 팀원들의 3년도 비슷하게 기억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Q. <세이브 더 게임>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A. '당신이 가장 ‘지키고(save)’ 싶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Q. 이후에도 게임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 그리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싶나?
A. 게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다 보니 자료가 정말 많이 쌓였다. 이번 다큐멘터리로 끝나기엔 아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지난 수년간 게임보다도 게임을 하는 사람이나 게임을 만드는 사람,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흥미를 가졌는데 이제는 도대체 게임이 뭘까? 라는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갖게 됐다.
다음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게임에 대한 관심은 다큐멘터리를 하며 쭉 가져가지 않을까 싶다.
(출처: 사이드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