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헤드셋 ‘오큘러스 리프트’가 개발자들에게 공개된 지 1년. 각종 게임과 시뮬레이션 등이 개발되고 있는 가운데 한 가지 독특한 시도가 등장했다. 단편영화를 주로 제작하던 한 예술가가 오큘러스 리프트를 이용한 예술작품을 공개한 것이다.
프랑스의 예술가 ‘발타자르 옥시틀’(Balthazar Auxietre)은 2012년 오큘러스 리프트를 이용한 첫 작품 <환영>(Eidolon)을 공개했고, 지금은 두 번째 작품인 <다섯번째 잠>(The Fifth Sleep)을 만들고 있다. 그가 본업(?)을 잠시 내려놓고 가상현실에 빠져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가상현실을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일까? 한국을 방문한 발타자르를 만나보았다. /디스이즈게임 김승현 기자.
프랑스에서 온 ‘발타자르 옥시틀’ 작가
현대의 모든 문화와 기술이 곧 예술이다
발타자르가 가상현실을 이용한 예술 작품을 구상한 것은 대학을 마치고 ‘프레노와’(Le Fresnoy)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프레노와는 현대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시도하는 프랑스의 교육기관이다. 평소 게임을 즐겼던 발타자르는 이곳에서 (3D 어드벤처나 FPS 등의) 게임 문법과 가상현실이라는 플랫폼, 그리고 예술의 결합 가능성을 발견했다.
“<둠>이나 <모던워페어> 시리즈 등과 같은 이전부터 게임은 즐겨왔지만, 이러한 게임의 문법을 제 작품에 적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프레노와에서 가상현실을 접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동안 즐겨 만들었던 영화와 달리, 가상현실은 관객을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 속으로 초대할 수 있고 이를 경험하게 할 수 있죠. 가상현실만 가능한 이것이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그가 생각하는 예술은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예술의 기준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 드라마나 영화, 게임과 같은 역사가 짧은 문화 콘텐츠도 예술이 될 수 있고, 프로그래밍이나 가상현실과 같은 최신 기술도 곧 예술로 연결된다. 어떤 것이든 사람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데다가, 최근에 나온 콘텐츠나 기술일수록 여러 사람들에게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예술을 어려운 것, 고상한 것으로 정의해야 할까요? 저는 오히려 관객이 정해지거나 한정된 예술은 죽은 것이라 생각해요. 반대로 대중음악을 즐기는 이들이든,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든 누구나 자유롭게 즐기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진짜 예술 아닐까요?”
현실과 꿈,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질문을 던진다
발타자르의 작품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선택지가 있는 영화’, ‘가상현실로 구현된 비주얼 노벨’에 가깝다.
관객은 오큘러스 리프트를 통해 작품 속 세계로 들어간다. <환영>에서는 죽은 과학자의 기억을 더듬어 가게 되고, 작업 중인 <다섯번째 잠>에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식이다. 관객은 이 안에서 다양한 경험을 보게 되며, 특정 구간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며 경험에 직접 관여하기도 한다.
<다섯 번째 잠>의 트레일러 영상
예를 들어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의 정신 속을 탐험하는 <다섯 번째 잠>에서 관객은 다양한 기준의 행복을 맞닥뜨리게 된다. 환자가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혼수상태에 빠져있는지, 환자는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지. 이러한 '경험'들은 관객의 선택에 의해 제각기 재생된다. 그리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관객에게 환자를 혼수상태에서 깨울지, 아니면 그가 만족하는 대로 놔둘지에 대한 선택지가 주어진다.
발타자르가 이러한 가상현실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과 꿈, 그리고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그가 만드는 작품의 대부분은 현실에서 오큘러스 리프트를 쓰는 공간과, 가상세계 안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공간이 동일하다.
일례로 <환영>의 경우, 관객은 철제 구조물 안에 놓인 오큘러스 리프트를 씀으로써 관람을 시작하게 되는데, 디스플레이를 쓰고 나면 자신이 오큘러스 리프트를 쓴 그 공간이 눈에 보인다. ‘정신이 든’ 관객은 이곳에서부터 죽은 과학자의 기억을 엿보기 시작한다. <환영>은 이외에도 크라이엔진으로 제작된 실제와 흡사한 모델링, 직경 2km에 달하는 가상의 섬 등으로 현실감을 더했다.
그가 이러한 구성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이를 통해 역으로 현실의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저는 헬멧(오큘러스 리프트)를 쓰는 행위가 주변을 잊고 관객 자신의 내면으로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주변을 잊고 자신을 알려면 먼저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하죠. <환영>이나 <다섯번째 꿈>이 제공하는 환경과 이야기는 비록 가상의 것이지만 관객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이죠. 그리고 이러한 경험과 공감을 바탕으로 현실을 보다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기를 꿈꾸는 거죠.”
<환영>을 관람하기 위한 철제 구조물. 작품 속으로 들어가면 이와 똑같은 구조물이 관객을 맞이한다.
“’저니’와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발타자르가 최근 몰두하고 있는 주제는 ‘상호작용’이다. 관객, 혹은 유저가 이야기의 흐름에 관여할 수 있는 '상호작용'은 그가 이전에 작업하던 단편 영화에는 없는 가상현실의 특징 중 하나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선택'의 형태로 <환영>에 도입했고, <다섯 번째 잠>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얼마나 그가 표현하려는 메시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가 이다. 관객의 모든 상호작용을 받아주는 작품은 기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선택의 형태로만 상호작용을 남겨두면 가상현실이라는 플랫폼의 강점을 살릴 수 없다. 그렇다고 억지고 상호작용 요소를 늘리면 상호작용 자체가 메시지와 무관한 ‘장식품’이 되어 버린다.
“게임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잘 알 거에요. 게임은 유저가 이야기에 관여할 수 있는 상호작용 요소를 가진 대표적인 분야고, 최근에는 적지 않은 작품이 '상호작용'을 내세우며 자신들을 홍보하죠. 하지만 그 가운데 진정한 상호작용이 있는 작품은 많지 않죠. 대부분 메인 스토리와 상관없는 부분에서 상호작용이 악세서리처럼 들어갈 뿐이죠.”
그래서 그가 꿈꾸는 가상현실 예술의 모습은 2012년 PS3로 출시된 게임 <저니>처럼 관객(혹은 유저)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가 되고 이야기가 되는 작품이다.
“<저니>는 굉장히 멋진 작품입니다. 간단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유저가 스스로 의미를 찾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게끔 상호작용 요소를 잘 만들었어요. 정말 이야기의 틀 안에서, 그리고 비디오게임이라는 틀 안에서 딱 필요한 상호작용 요소만 배치한 결과죠. 제가 만드는 작품도 <저니>같이 군더더기가 없었으면서도, 진정한 상호작용이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