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의 만점 세례, '단점이 없다!'라는 리뷰, 세계 최고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19년 최고의 비디오 게임'이라는 평가까지. 수많은 극찬을 받은 <디스코 엘리시움>의 한국어화가 완료되었다. 발매일로부터는 8개월, 번역을 시작한 지는 약 5개월 만이다.
90만 자에 이르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여러 게이머들의 참여 덕에 번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완료되었다. 드디어 한국 게이머들도 서양권에서 '세기의 명작' 취급받는 게임을 한글로 즐길 수 있게 됐다.
오늘 '방구석 게임'은 <디스코 엘리시움>을 리뷰한다.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재석 기자
깨질 듯한 숙취 속에서 깨어나 보니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방은 엉망진창. 잡을 수 있는 물건은 전부 다 부서져 있다. 주변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입고, 유리창을 깨고 발코니로 날아간 신발을 다시 주워 신는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니 한 여성이 주인공을 "형사님"이라 부르며 인사한다. 계단을 내려가 정문으로 가니 '킴 카츠라기'라는 동양인 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내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텅 비어버린 기억 속에서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기본적으로 게임은 RPG의 특성을 띠고 있다. 탑 뷰 형식을 통해 플레이어 캐릭터를 조작하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퀘스트를 완료한다. 플레이 방식은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나 <발더스 게이트>, 혹은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와 같은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쫓는다는 점에선 <역전재판>같은 '추리 게임'이 생각나기도 한다. 사람들과 대화하며 능력치 체크를 통과하고, 여러 물체를 클릭해 단서를 얻는다는 점에서 보면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 느낌도 물씬 난다.
차별점도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전투가 없다. 게임은 대부분 등장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진행된다. 다소 뻔할 수 있는 구성이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더했다. 바로 '능력치와 스킬'이다. 능력치와 스킬. 이는 겉으로 보면 <폴아웃>과 같은 RPG에서 봤던 요소와 다르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의 시스템은 정말 독특하다.
아마 글로만 보면 이해가 안 갈 법도 한데, 예를 들자면 이런 방식이다(게임에 등장한 텍스트가 아니라 필자가 즉흥적으로 상상한 대화다).
"당신은 길을 걸어가다 땅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본다. 흡연자가 몇 모금 피우고 버린 탓인지, 당신은 문득 담배를 주워 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기화학: 아하! 타르와 니코틴의 혼합 물체로군! 안 그래도 몸에 니코틴이 부족했던 참인데 *당장* 주워서 피자고!
인지: 냄새를 맡아 보니 아직 버려진 지 얼마 안 된 듯해. 담배를 버린 사람은 아마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논리: 남이 버린 꽁초를 다시 주워 피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합니다. 사람들이 꽁초나 주워 피는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물론 모든 인격들이 사사건건 간섭해 오는 것은 아니다. 플레이어가 주로 선택한 기술들이 주로 말을 걸어온다. 이 독특한 시스템 덕분에 자신이 추구하는 콘셉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대화문과 알아낼 수 있는 정보, 그리고 사건 해결의 방향성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당연히 생각 캐비닛도 대화의 방향성과 선택지에 영향을 미친다. 가령 '마조프주의 사회 경제학'이라는 생각 캐비닛은 좌익을 긍정하는 선택지를 계속해서 선택하다 보면 '수사학' 스킬이 당신에게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고, 이를 긍정하면 획득할 수 있다.
마조프주의 사회 경제학을 내면화하면 주인공은 '공산주의자'가 된다. 공산주의를 내면화한 주인공은 '권위'와 '시각화 분석'에 -1 페널티를 받지만, 좌익을 긍정하는 선택지를 고를 때마다 경험치 보너스를 얻을 수 있으며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등장인물과 유쾌하게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다.
능력치와 스킬을 통해 통과할 수 있는 '스킬 체크' 시스템도 참 재미있다. 일단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한다 (논리 능력치가 낮아 선택할 수 없음)"와 같은 선택지가 없다. 플레이어의 능력치가 부족하면 특정 스킬 체크 자체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주로 육성한 스킬과 관련한 선택지만 등장하기에 '몸도 잘 쓰고 머리도 잘 쓰는 천재 형사'같은 캐릭터는 연기할 수 없다. 힘과 운동에 주로 투자했다면 근력으로, 지성과 감성에 주로 투자했다면 말빨 위주로 스킬 체크를 통과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필자는 시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한 화물 노동자를 만났다. 노동자와 대화하던 주인공은 '화려한 시를 즉석에서 읇어서 내 감수성을 증명해야지'라고 생각했다. 확률도 50% 정도였고 감정 능력치도 부족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선택지를 눌렀지만, 결과는 꽝이였다.
주인공은 걸걸한 육두문자의 집합체를 '시'랍시고 내뱉기 시작했다. '논리' 인격은 "아니 진짜로 그게 시라고 생각해요?"라며 주인공에게 일침을 날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는 "꽤 느낌이 있었다."라며 주인공을 두둔했고 관계는 친밀해졌다.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수많은 정치적 요소가 들어가 있다. 물론 정치는 실생활과 밀접히 맞닿아 있으면서도 다루기에는 거북한 주제이기에 잘못하면 '정치충' 취급받기 딱 좋은 주제다. 자칫하다간 싸움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을 설명할 때 정치적 요소를 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디스코 엘리시움>이 특정 사상을 은근히, 혹은 무조건으로 지지하는 작품은 절대 아니다. "모든 것이 틀렸어"와 같은 냉소주의나 극단적인 아나키즘으로 빠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결국 분노한 시민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전복시키고 시민 정부(코뮌)를 세웠다. 하지만 시민 정부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반대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으며,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시민들은 사람 취급조차 해주지 않았다.
결국 레바숄의 공산화가 자국까지 영향을 끼칠까 우려한 주변 국가들은 연합을 형성해 레바숄을 공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유정을 파괴하고 기름띠까지 만들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비치 웨이드'라는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 작전을 막지 못하고 패배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세계관은 냉전 이후 혼란스러웠던 유럽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고 본다. 공산주의자들이 레바숄에 세웠던 시민 정부는 프랑스 혁명 당시 세워진 '파리 코뮌'과 상당히 유사하다. 레바숄의 역사도 게임이 만들어진 '에스토니아'라는 동유럽 국가의 역사와 꽤나 비슷한 구석이 많다.
공산주의 혁명이 시작된 '그라드'는 '러시아'와 굉장히 유사하며 동양계 인물들의 고향인 '세올'은 아시아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레바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 싸움은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상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게임은 여러 정치적, 문화적 요소들을 넘어 자신들이 다루는 RPG라는 장르마저 자조적으로 풍자한다. 게임 중반부에 망해버린 '게임 회사'를 조사할 기회가 있는데, 여기서 벌어졌던 일들은 인디 게임 개발에 관한 비관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
많은 투자를 받아 의욕적으로 게임을 만들던 개발자들은 결국 너무나 커져 버린 프로젝트를 감당하지 못하고 뿔뿔히 와해되어 버렸는데, 이는 시간과 예산의 한계로 인해 원안의 많은 요소를 반영하지 못했던 <디스코 엘리시움>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꼭 <디스코 엘리시움>이 아니더라도 전혀 현실성없는 계획을 짜다가 결국 형편없는 결과물을 내놓은 일부 킥스타터 게임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런 세계관을 보면 <디스코 엘리시움> 속 세계는 우리와 관계없는 머나먼 동유럽 속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양인 차별'로 대표되는 인종주의는 우리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국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정치적 대립과 격동 속 한반도 역사를 생각하면 레바숄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양 사회의 모습과도 상당히 겹치는 점이 많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의외로 중화권에서 호평을 받으며 쏠쏠한 판매고를 올렸다.
그리고 게임 속 정치적 이야기들은 플레이어가 생각 캐비닛 속에 내면화한 주제와, 레벨을 올려 투자한 스킬과 유기적으로 조화되며 새로운 경험을 창출한다. 플레이어는 모든 것을 까먹어버린 형사다. 그렇기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우리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디스코 엘리시움>속 세계관을 완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고, 이는 주인공도 동일하니까.
# 이 게임은, 술친구 같습니다
앞서 말한 이야기를 생각하면 <디스코 엘리시움>은 정치적이고, 수많은 사회문화가 녹아들어 있는 복잡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게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외로 간단하다. 블랙 유머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조롱하고 희화화할 것처럼 굴던 게임은 결말부를 통해 진정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은근슬쩍 전달한다. 마치 친한 친구와 술자리를 가지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도 참 비슷하다. 구태의연한 현실은 오늘도 바뀔 생각이 없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일들은 항상 허무한 결과를 맞곤 한다. 신문을 펼치면 자극적인 뉴스가 판을 치고, 세상은 당장 망할 것만 같다. 정치인들은 양 극단에 서서 분열과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
아무리 노력한들 이 병든 현대 사회는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니까. 꿈이 넘치던 학창 시절 생각했던 인생은 이게 아니였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디스코 엘리시움> 속 이야기는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텍스트로 점철된 지루한 게임을 단순히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는 이유로 극찬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확실히 <디스코 엘리시움>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게임은 아니다. 쏟아지는 텍스트, 느린 진행, 복잡한 세계관을 보면 꽤나 취향 타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불편한 요소도 많다. 넓은 맵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빠른 이동'은 지원하지 않고, 방대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전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원활한 진행을 방해하는 버그도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