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2020 롤드컵이 담원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수 년만에 한국이 롤드컵을 가져갔다. 담원과 맞선 쑤닝은 참 특이한 팀이다. 용병이 있지만 한국인이 없는 팀이다. 정글러 SofM은 베트남인, 서포터 소드아트는 대만 사람이다.
중국에서 홀로 활약하는 베트남인 정글러 SofM에 주목했다. 예전 Levi의 MSI 활약으로 베트남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데 베트남인으로 롤드컵 결승에 진출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늘은 SofM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재석 기자
(출처: SofM 트위터)
# SofM, 그는 누구인가?: 데뷔 전까지
SofM은 1998년생으로 하노이 꺼우지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한인타운이 있는 미딩 지역과 가까운 곳이기도 한 지역이다. 본명은 Le Quang Duy, 보통 '리꽝주이'라고 부른다. 베트남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어두운 피부색 때문에 Béo Đen(블랙캣)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어릴 때부터 게임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SofM은 <도타 2> 마스터티어인데, 어린 시절 <워크래프트 3> 커스텀 게임을 즐기면서 일찍이 MOBA 게임에 재능을 뽐냈다고 한다. 그는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을 알기 전까지는 주로 <워크래프트 3>와 <도타 2>를 즐겼다고 한다.
SofM이 처음 <롤>을 접한 것은 2012년. 가레나(Garena)가 베트남에 <롤>을 서비스하기 시작하며 그도 <롤>을 플레이했다. 그해 SofM은 동남아 서버 최상위 점수까지 올랐다. 당시 차트 최고 점수가 1900점이었는데, 그의 점수는 1750점이었다.
그러던 중 하노이 소재 테크 기업 게임티비(GameTV)가 e스포츠 프로팀을 구성하려 팀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당시 SofM과 함께 최고 재능으로 알려진 Nguyen Duc Binh이 함께 팀에 합류한다. 당시 SofM의 나이 14세였다. 참고로 한국에서 알려진 허름한 베트남 프로팀 연습실 사진이 바로 이 당시 게임티비 소속일 때 연습실로 쓰던 PC방이다.
초기 SofM이 연습하던 공간.
그는 첫해 정글 알리스타로 데뷔했다. 종종 탑솔러로도 등장했는데, 당시 동남아 최강 탑라이너 QTV를 눌러버리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게임티비는 SofM의 맹활약과 함께 창단 첫 해 4위를 기록한다. 아쉽게 GPL 동남아 리그에 진출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2013년, SofM은 기가바이트 풀 루이스(Gigabyte Full Louis)로 이적한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포지션을 뛰었는데 처음에는 탑에서 시작해, 미드로 변경했다가, 바텀라인을 지나 마지막으로 정글러로 정착한다.
이후 SofM은 지금까지 줄곳 정글러로 활약 중이다. 풀 루이스에서 그가 참가한 첫 대회는 저니 투 레전더리(Journey to Legendary)의 토너먼트. SofM은 2013년 베트남 북부 8강 전에서 전 소속팀 게임티비를 이기고, 결승에서 싸이존(Cyzone)을 이기고 지역 우승을 거머쥔다.
SofM이 합류한 풀 루이스는 단숨에 베트남 최강팀 사이공 조커스(Saigon Jokers)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팀이 됐다. 풀 루이스는 이후 전국 8개팀 최종 토너먼트에서 우승까지 차지한다. 당연 SofM의 활약은 빛났다.
풀 루이스 팀원들과 촬영한 단체사진.
풀 루이스는 최강의 전력으로 13년 6월, 베트남 리그 시즌3에서 리그 2위를 기록하고 동남아 리그 라운드에 진출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준결승에서 패배하며 또 한번 GPL의 문턱을 밟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두달 뒤인 8월, 시즌 4에서 이즈리얼 정글로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13승 1패로 팀을 우승시켰다. 그렇게 풀 루이스는 GPL에 진출했다.
드디어 첫 GPL 2013 윈터에 초청받아 쟁쟁한 해외팀들과 붙게 된 SofM. 그의 팀은 그룹B에 배정받아 6승 4패 4위로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게 된다. 8강전에서 만나게 된 팀은 그 유명한 TPA, 두번째 롤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팀이었다. 이때 풀 루이스는 3경기 전패로 탈락한다. TPA는 그해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 풀 루이스와 결별, 나이 조작과 비자 문제
2014년에도 풀 루이스와 SofM은 GPL 스프링과 서머에 이름을 올린다. 스프링에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한 풀 루이스와 SofM은 서머부터 주목을 받는다. 그때 풀 루이스는 조 3위로 라운드를 통과했다. 이어진 8강 전에서 대만의 로그 에프(
Log F)를 3:1로 잡으며 GPL 첫 준결승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최측에서 SofM의 나이 조작을 문제 삼은 것. 팀은 그대로 실격패됐다. 이유인즉 이랬다. 당시 베트남리그는 연령제한이 없었지만, GPL에서는 17세 미만은 경기를 뛸 수 없었다. SofM은 2015년이 되어야 자격이 생기지만, 풀 루이스가 나이를 조작해 경기에 참가해버렸던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16세였다.
에이스 SofM의 나이를 조작해 실격패된 풀 루이스
SofM은 이듬해 스프링에 당당히 참가한다. 당시 대회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다. 모국에서 대회를 펼친 SofM과 풀 루이스는 2라운드에서 최종 탈락하고 만다. 이 대회의 우승은 사이공 판타스틱(Saigon Fantastic)에게 돌아갔다.
SofM은 2016년 한 인터뷰에서 "2015년 스프링 이후 대만 팀으로부터 영입 제안이 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실제로 당시 대만의 3개 팀에서 영입 제안을 했고, 이후 그는 베트남에서 대만으로 둥지를 옮긴다는 소식의 전해졌다. 그의 새 소속팀은 플래시 울브즈(Flash Wolves)여야 했다.
그러나 이번엔 비자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당시 대만은 18세 이하에게 취업 비자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풀 루이스에서 1시즌을 더 보내야 했다. 팀은 2015년, 2016년 모두 VCS 준우승에 그쳤다. 풀 루이스는 2016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풀 루이스 선수들은 대부분 슈퍼하이프 게이밍(SuperHype Gaming)에 흡수됐는데, SofM은 이 팀에서 잠시 머문다.
이 사이에 한국에서도 유명한 사건이 하나 일어나는데, 바로 SofM이 한국 서버 챌린저 10위에 달성한 것이다. 핑이 100이나 넘게 발생하는 환경 속에서 그는 조작 없이 그 기록을 달성했다. 그는 한국, 대만, 동남아, 베트남 서버 모든 곳에서 챌린지를 달성했다. SofM의 접속 환경에서 100핑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는 후문이 전해지지만, 전무후무만 기록이라 부를 만하다.
# LPL의 첫 베트남 용병, 선구자가 된 SofM
2016년, SofM은 중국 상하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스네이크 이스포츠(Snake Esports)에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했다. 18세에 불과했던 그는 낯선 환경에서 적응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는 중국어 소통이 아주 힘들었는데, 입단 첫 달에는 중국어를 못 해서 소통에 문제가 발생해 벌금을 물기도 했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Yes, Yes만 해서 피드백이 어려웠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그의 중국 데뷔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팀이 2연패의 수렁에 빠지자 SofM이 소방수로 투입된 것. 1군 콜업을 받은 SofM은 그렇게 최초로 LPL의 비한국인 외국인 용병이 되었다. 그는 기대했던 것처럼 데뷔전을 '캐리'했고, 이어서 팀의 에이스로 발돋움한다. 팀은 그룹A 2위를 기록하고 SofM은 서머시즌 MVP 투표 3위 정글러 KDA 4위를 기록하며 16 LPL 베스트 신인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화제의 롤드컵 선발전. 1라운드는 이지훈이 있는 비시 게이밍이었지만 SofM이 각성하면서 패패승승승, 리버스 스윕의 기염을 토하며 1라운드를 통과한다. 다음은 Team WE. 한국인 미스틱과 제로가 있는 팀이었다. 3 대 2로 분전했지만 여기서는 아쉽게도 탈락한다.
전해지는 뒷 이야기도 SofM의 중국어가 유창하지 않아 자신이 뛰었던 경기가 롤드컵 선발전인 줄 몰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
스네이크 시절의 SofM.
# 이번에도 팀 해체... 하지만 날개 얻은 SofM
2016년에 보여준 임팩트가 너무 강력했던 것일까? SofM은 공격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정글러로 이름을 날리지만, 17 시즌부터 3시즌 연속 소속 팀은 중위권에서 맴돌거나 플레이오프에서 미끄러졌다. 그의 실력에도 기복이 보였다.
결국 19 스프링을 끝으로 스네이크는 해산한다. 소속 팀의 두 번째 해체. 풀 루이스때도 그랬듯이 SofM은 끝까지 소속팀에 남아있었다. 이후 그가 고향 하노이로 돌아왔을 때, 베트남 최강팀이었던 GAM에서 영입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SofM은 다시 중국 무대에 도전한다. 19 서머 시즌, SofM은 스네이크를 기반으로 재창단된 LNG로 이적한다. 그해 팀은 리그 7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20 스프링 시즌, SofM은 쑤닝으로 전격 이적한다. 코로나19와 함께 중국에서 맞이한 시즌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는 기복있는 플레이를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분투했다. 당시 순위는 리그 11위로 마무리됐다.
SofM의 활약은 서머 시즌부터 빛을 발한다. 그의 플레이가 점차 안정되면서 상대 정글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리그 4위를 기록하며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여기서 3위로 올라서며 쑤닝은 롤드컵에 진출했다. 그렇게 맞은 첫 롤드컵에서 그는 징동의 카나비를 압도하고, 리그 챔피언 TES를 꺾었다. SofM의 리신과 그레이브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비록 쑤닝과 SofM은 담원과의 일전에서 패배했지만, 최정상급 정글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출처: 라이엇게임즈)
2017년 MSI에서 GAM 소속으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Levi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Levi 역시 해외로 진출했지만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팬들이 자꾸 둘울 비교하자 Levi가 스스로 나서서 SofM은 나의 워너비라고 밝히기도 했다. Levi가 롤을 알기 전부터 이미 SofM은 베트남리그에서 날라다니고 있었다.
SofM은 LilyMeow라는 아이디도 사용하고 있다. 자신의 여자친구인 Lily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것. 여자친구는 Nguyen Tang Hoai Thuong으로 2013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SofM의 인스타나 페북을 가면 게임아니면 Lily 사진뿐이라고 할 정도이다. Lily는 현재 SofM의 공식 유튜브 및 SNS 채널들을 관리해주고 있다.
SofM의 인스타그램. 온통 여자친구 사진이다.
SofM은 <롤>, <도타2> 외에도 <하스스톤>이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게임도 즐긴다고 한다.
한때 한국 커뮤니티에 "베트남 연습실 사진"은 리그 초창기인 2012년 이야기다. 그가 오래도록 활약했던 풀 루이스나 강팀 GAM, 사이공 조커스의 숙소 및 연습실 인프라는 깔끔하며 현대적이다. 베트남이라고 다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하지 않는다.
스네이크 팀 시절 한 다큐에서 베트남 프로 시절 코치가 밝히기로 첫인상이 차갑고 조용한 아이였지만, 친해질수록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구라고 밝혔다. SofM의 취미는 먹는 것인데 하노이로 돌아가면 친구들과 주로 먹는 것에 집중한다고 한다. 전 동료인 LoiTa는 그는 쌀국수와 빵 몇 개만 있으면 밤새 게임을 했다고 했다.
SofM의 가족들은 그의 경기가 있을 때면 모두 함께 시청한다고 했다. 어린시절 친구들은 그를 '쥐'라고 부르기도 했다. SofM은 첫 상금을 탔을 때 친구들에게 뷔페를 쐈다. 중국 스네이크로 이적 후 기회의 땅에 온 것이 기뻤지만 외로움과 싸우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을 극한으로 계속 푸쉬했다고 한다.
SofM의 중국어를 한 마디도 못 했지만, 팀원들이 서로 팀워크를 올리기위해 SofM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
(출처: SofM의 웨이보)
# 베트남 e스포츠의 선구자, 제 2의 '정글의 신' 노리는 사람들 많아지지 않을까?
베트남에서 SofM은 Vietnam Golden boy 혹은 Vietnam Forest God (베트남 정글의 신) 으로 불리고 있다. 베트남 주요 언론에서도 연일 SofM의 소식을 보도한다. 지금 베트남에선 <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SofM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덕이다. 해버지(박지성) 덕에 해외 축구 유입이 늘어난 것과 비슷한 상황. SofM은 그만큼 대단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SofM의 성공으로 앞으로도 해외 진출을 노리는 베트남 선수들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의 연봉은 15억 원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성공을 보고 많은 젊은 베트남 사람들이 e스포츠에 유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해버지의 성공이 하나의 특이 케이스로 머물지 않았듯이, 앞으로도 SofM을 동경하는 e스포츠 선수들이 계속 발굴되지 않을까?
첫 상금을 받던 시절의 So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