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PD의 뇌피썰] 기술이 발전하며 '영화 같은 게임'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니게 됐습니다. 또한 게임이 대중화되며 게임 요소를 녹인 영상 콘텐츠도 많이 시도되고 있죠. 게임과 영상은 서로 빠르게 장점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아, 게임 속 각종 영상 기법, 비디오 콘텐츠 속 각종 게임 요소, 혹은 게임 영상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코너를 준비했습니다. 그동안 저희 지면엔 '게임'에 무게를 둔 기사가 많았는데, 이번 코너는 (게임을 좋아하는) '현직 영상 PD'가 글을 쓰는 만큼 영상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릴 예정입니다. 재밌게 읽어 주세요.
[람자는 누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D&D>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게임 매니아이자 Mnet, Cookat, 라이엇 게임즈 등의 회사에 근무하며 10년째 비디오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숙달된(?) 방송 영상 PD입니다. 'Show me the Money'를 비롯한 각종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K-pop 토크쇼, 그리고 '위클리 매드무비/코멘터리/뉴스피드', 'SNL', 2020·2021년 'LCK 결승전 오프닝쇼' 등의 영상 콘텐츠를 연출하고 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직장에서 하루에 몇 시간 근무하시나요? 혹은 학교에서 하루에 몇 시간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시나요?
저는 콘텐츠 제작업에 종사하면서 하루에 지정된 근무시간 8시간을 보통 근무하고요, 편집이 많을 때나 방송일이 다가오면 많게는 십 수 시간을 작업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늦게, 혹은 새벽에 집에 돌아와 게임을 하면 그렇게 편안하고 즐거운 기분이 듭니다. 아마 독자분들도 저처럼 게임 머신 앞에 앉는 순간을 기다리며 그 긴 근무와 수업을 힘겹게 보내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갑작스러운 '현타'에 정신이 어지러워졌습니다.
# 나는 게임을 하는 것인가, 일을 하는 것인가?
이런 '현타' 경험을 게임 도중 두 번 겪었는데요. 첫 번째 범인은 바로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입니다.
제가 애정을 가지고 키운 심 '람자'는 게임 내에서 제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의료계 직업군으로 커리어 패스를 정했습니다. 치트를 쓰지 않고 돈을 모아 집을 넓히고 이사를 가기 위해서 직업을 꼭 가져야 했는데요.
문제는 몇 날 며칠 동안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출근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여가를 포기해 발생했습니다. <심즈>에서 즐길 수 있는 많은 재밌는 경험을, 반복적인 잡다구리 출근 준비나 집안일, 그리고 통근버스 놓치지 않기 등의 (이사가기 위한) 재미 없는 경험으로 대체했다는 것이죠.
두 번째 '현타'의 원인 게임은 '롱런 갓게임' <GTA5>였습니다. 모드로 휘황찬란한 게임을 즐기는 스트리머들과 달리, 저는 바닐라 게임을 통해서 진행했는데요.
게임의 주된 스토리텔링은 흥미로웠지만, 캐릭터들이 특정한 일거리를 의뢰 받고 해결하는 패턴으로 돈을 벌거나 재화를 얻는 과정이 반복되자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제 머리가 띵해지는 '현타'를 느낀 이유는 단순히 게임 내에서도 일을 해야 한다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방송영상 제작자인 제 직업적인 특성과 오늘 풀어낼 뇌피썰과도 연관이 있는데요. 제가 '현타'를 느낀 이유는,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게임 플레이가 어쩐지 '편집' 혹은 '컷' 되어야 할 부분인데 그러지 않고 그냥 지루하게 방송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게임 속의 단순 과제들을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나요?
# '리얼'과 '리얼리티'의 차이
게임 얘기는 잠시 두고, 가장 인기 많은 TV 프로그램 콘텐츠 포맷인 '리얼리티 / 리얼 버라이어티'를 떠올려 보시죠. 통칭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은 실제의 상황이나 실제를 가장한 연출이 가미된 상황을 편집을 통해 스토리텔링 하는 장르입니다.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실체는 '리얼'과 거리가 조금 있는데요. 아무리 재미있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이더라도 반복되거나 지루하게 계속 이어지는 일상의 순간들은 편집을 통해 삭제되고 '컷'으로 연결됩니다. 일부는 재배열되고 새로운 스토리 텔링으로 이루어지거나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정글의 법칙'과 같은 리얼리티 방송에서 어디론가 단순 이동할 때 지도 등의 그래픽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나, '무한도전'에서 등장인물이 단순 작업을 할 때 빨리 감기 혹은 '1시간 뒤' 라는 자막으로 대체하는 편집 구성 많이 보셨을 겁니다. 이런 편집 덕분에 시청자들은 가장 재미있는 장면만 쏙 즐기면서 웃을 수 있습니다.
치열한 소년·소녀들의 데뷔기가 담겨 있는 리얼리티 오디션 쇼에서도 밤새 열심히 반복해 연습하는 모습은 '다음 날'이라거나 짧은 스케치와 자막으로 대체됩니다. 재미를 위해서 오디션 리얼리티 쇼 출연자의 순서를 변경하거나 특정 상황을 반복해 보여줘 재미를 더하기도 합니다.
다들, 이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을 보며 '실제 상황'이나 '리얼'을 얘기하지만, 실제로 리얼리티 TV 프로그램들은 '풀버전'이 아닌 '하이라이트', 즉 축약본에 더 가까이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상의 반복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영상 콘텐츠와는 달리 '게임'만큼은 정말 '리얼'에 가깝습니다.
# 편집없는 '리얼'을 보여주는 전통적인 게임 플레이
오픈 월드 RPG 장르가 대표적일 텐데요. 단순 반복 작업을 통한 아이템 수집형 퀘스트를 거치지 않고는 게임 자체가 진행되지 않는다거나, 특정한 장소로 이동할 때에는 (물론 재차 방문 시에는 포털이나 순간이동 같은 도구를 제공하긴 하지만) 최초에는 우직하게 뚜벅뚜벅 몇 시간 동안 땅을 밟아서 가야 합니다.
진짜 핵심적인 부분은 그 뒤에 보스 몬스터를 만나거나 굉장한 파워를 가진 동료나 유니크 아이템을 얻는 부분이지만, 그런 장면은 찰나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사실 길을 찾거나 잡몹을 제거하거나 '도토리 열매 모아오기 (0/50)' 이런 일상의 반복입니다.
현실 시간 킬러로 유명한 <이브 온라인>에서 수만 시간 플레이를 한 플레이어들은 아마도 90% 이상의 플레이 시간을 공허한 우주 공간을 이동하는 것으로 채웠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대함대가 격돌하고 해적단과 치열하게 교전하는 부분일 텐데 말이죠.
뇌피썰 본능이 발동합니다.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이 편집과 재가공을 통해 핵심 장면만 보여주는 것처럼, 게임도 단순 작업이나 불필요한 이동 등을 모두 제거하면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만 남게 되지 않을까?
<동물의 숲>이나 <이브 온라인>, RPG 장르 게임들에서 단순한 수집과 강화, 퀘스트를 위한 소품 모으기는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빼도 되지 않을까요? 게임이 노잼이 될 거라구요?
# 만약 유저에게 하이라이트만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자동 전투 RPG 장르는 '제 글의 흐름에 따르면' 훨씬 진화되고 사용자들의 니즈에 부응하는 효율적인 게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우스나 키보드의 커맨드를 입력하거나 휴대 기기 화면을 수십 번 터치하는 것을 자동으로 처리합니다. 사용자는 게임 클라이언트를 켜두고만 있으면 자신의 캐릭터가 스스로 사냥과 전투를 반복하며 레벨업을 하고, 심지어 아이템들까지 착실하게 챙기는 것을 '관람'할 수 있죠.
귀찮은(?) 성장은 AI가 알아서 하고, 유저는 PvP나 레이드 같은 결정적인 장면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게임은 하지 않고 크리에이터들의 게임 플레이 콘텐츠만 시청한다는 분들 제 주위에 많으신데요. <GTA5>를 수 시간 플레이한 라이브 콘텐츠를 가공해서 마치 리얼버라이어티 TV 프로그램처럼 만든 크리에이터들의 편집물들은 실제 게임 플레이를 담은 콘텐츠보다 더 큰 호응을 받기도 합니다.
이 콘텐츠들을 시청할 때에는 게임 속 지루한 단순 반복 부분에 대해서 두려워 하거나 걱정할 필요조차 없죠. 화면에 나오는 장면들은 높은 확률로 가장 재미 있는 게임의 순간들만 모아둔 것일테니깐요.
일부 연구자들은 게임의 자동전투가 게임을 플레이하며 재미를 느끼는 요소 중 하나인 인터랙티브를 포기했지만, 효율적으로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동전투가 길드나 클랜과 같은 소셜적인 부분에 더 몰입하게끔 하는 계기가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기도 하고요.
게임 크리에이터 영상의 경우에는 팬들과 크리에이터가 도네이션, 화면효과, 채팅참여 등으로 '공동 제작, 연출'한 콘텐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팬들은 단순 시청을 통해 재미를 느끼는 것 이외에 (실제 본인이 채팅이나 도네이션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연출에 대한 욕구, 인터랙티브에 대한 욕구, 게이밍 그 자체에 대한 욕구 등을 충족시킨다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이것을 가공한 짧은 '하이라이트' 성격의 가공 콘텐츠는 오랜 시간 크리에이터의 라이브를 시청하지 않아도 가장 재미있는 부분만 쏙쏙 빼서 모아 볼 수 있네요.
이제 마음이 편안합니다. 단순 반복 '리얼' 작업이 없는 게임의 세계가 왔군요. 지루한 부분은 컷! 편집! 빨리 감아버리거나 자동으로 해버립시다.
# '리얼리티'는 '리얼'이 주는 기쁨을 대체할 수 있는가?
음. 하지만 유토피아의 이면에는 디스토피아가 있죠.
게임의 세계 속에서 '나무 뿌리(0/50)'를 캐면서 한가롭게 머리를 식혔던 기억, 광활한 오픈 월드를 돌아다니며 게임 속 그래픽이지만 이세계에 들어온 듯 상상해 보았던 기억, 특유의 물리엔진과 공감하며 수십 시간 플레이를 통해, 공주를 구하기 위해 떠나는 <젤다의 전설>의 주인공 젤다(?)가 되는 상상을 해보던 그 게임 경험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리얼리티'는 남았지만 진짜 '리얼'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스토리 텔링, '리텔링'(re-telling)만 남고 진짜 스토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요.
게임의 '리얼'과 게임적 일상이 사라진 하이랄 왕국 한켠에서, 없어진 '리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OTT를 통해 절찬리 유통되는 이른바 방탈출형 게임 예능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최근 다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리얼리티 오디션 쇼에서 말이죠.
게임 얘기하다가 방송 콘텐츠라니, 너무 뜬금없나요? 다음 회에서 다룰 뇌피썰은 이곳에서 시작합니다.
<다음 주에 '하'편이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