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든 링> 출시까지 3일(2월 25일) 남았다.
<엘든 링>은 <소울>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개발사 '프롬 소프트웨어'(이하 프롬)의 3인칭 오픈 월드 RPG며, 2019년 첫 공개 때부터 "도저히 출시를 기다릴 수 없다"라는 전 세계 팬들의 기대가 이어지고 있다. 아직 중소 규모 개발사로 여겨짐에도 AAA 게임을 개발하는 거대 개발사와 견줘 무색하지 않은 기대를 받고 있다.
그런데, 프롬은 본래 게임 개발사가 아닌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던 작은 회사였다. 게임 개발로 직종을 전환한 후에도 '마니아'들만을 위한 게임을 개발하는 회사로 여겨졌다. 프롬이 <엘든 링>으로 전 세계 게이머를 설레게 하는 개발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엘든 링>을 앞둔 지금, 프롬 소프트웨어의 역사를 돌아본다.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출처 : 프롬 소프트웨어)
# 원래는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팔았다
프롬은 1986년 일본 시부야에 설립되었는데, 본래 하청을 받아 농업용,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였다. 개중에서는 돼지 먹이 관리 프로그램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프롬이 게임 개발사로 변신한 것은 설립 후 8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1994년 12월, 게임계 빅 뉴스는 '플레이스테이션 1'(PS1)의 출시였다. PS1이 자랑하는 핵심은 두 가지였는데, CD 롬의 도입과 가정용 게임기에서 선보이는 실시간 3D 그래픽이었다. 당시에는 기존 2D 양식에서 벗어나 3D 그래픽 열풍이 게임계에 불어오고 있었고, PS1를 통해 게임기 시장 진입을 노리고 있었던 소니는 여기에 맞는 게임을 개발해 줄 서드파티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서드파티 확보는 중요하다
이에 열풍을 지켜보고 있었던 프롬도 게임 개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90년 시작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일본 경제 불황의 영향으로 인해 하청 개발 요청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 신사업을 위해 소니의 PS1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은 프롬은 10명 남짓의 인력을 할당해 <킹스 필드>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렇게 얼기설기 개발해 반년도 안 되는 기간에 만들어진 첫 작품 <킹스 필드>는 PS1 출시 후 13일 뒤 발매됐다. <킹스 필드>는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3D 실시간 RPG로, 암울하고 불친절한 스토리를 가진 현 프롬의 특징을 그대로 띈 게임이었다. 튜토리얼도 없었고, 세이브 포인트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덕분에 출시 당시 평가도 극단적으로 나뉘었으나, 이내 공략이 정립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아 마니아층을 확보하게 된다.
<킹스 필드>
이에 프롬 소프트웨어는 아예 게임 개발 회사로 직종을 바꾸게 되었다. 프로젝트도 두 개로 나뉘었는데, <킹스 필드>의 후속작 <킹스 필드 2>와 메카닉 액션 게임 <아머드 코어>였다. 두 게임 모두 1997년 7월 발매됐다.
여기서 약간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왜 첫 작품으로 RPG을 출시했던 프롬이 갑자기 메카닉 장르 게임을 개발했는가? 이는 프롬이 <킹스 필드>전 기획했던 첫 게임의 영향으로 보인다. 정확한 소스는 알 수 없지만, 프롬은 본래 "미궁 모양의 지하 공간에서 로봇이 활약하는 게임"을 기획했다. 그러나 기술력의 부족으로 "미궁"이라는 콘셉트만을 따 와 <킹스 필드>를 개발했다. 여기서 "지하 공간에서 로봇이 활약"하는 개념을 <아머드 코어>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머드 코어>는 <킹스 필드>와 일부 유사한 지점이 있었다. <아머드 코어>의 스토리를 살펴보면 환경 오염으로 전 인류는 지하 공간에서 살게 되었고, 여기서 기업의 의뢰를 받아 로봇을 조종하는 '레이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대부분의 스테이지가 어둡고, 미로 같은 공간에서 진행됐다.
<아머드 코어> 또한 특유의 시스템을 통해 <킹스 필드>처럼 마니아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아머드 코어>가 메카닉 게임에서 최초로 여겨지는, 혹은 획기적인 시스템을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특유의 무거운 액션과 플레이어 입맛대로 설정할 수 있는 '어셈블리'(로봇 파츠)를 통해 자신만의 로봇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현 팬들에게 제대로 적중했기 때문.
<아머드 코어>
# 규모는 작을지라도, 이외로 '다작' 했던 회사
이 시기 프롬은 상당히 게임을 빠르게 개발하는 회사였다.
먼저 <킹스 필드> 시리즈와 <아머드 코어> 시리즈는 짧으면 반년, 길면 1년 안에 꼭 신작을 발매했다. <킹스 필드 2>는 1995년 7월 출시됐으며, <아머드 코어>도 첫 작품 이후 반년 만에 <프로젝트 판타즈마>라는 후속작을 출시했다. 특히 <아머드 코어>는 넘버링 작품을 출시하면 2~3개 정도 '확장팩' 개념의 타이틀을 이어서 발매했기 때문에 종류가 꽤 많다.
꾸준히 자체 제작 게임 개발에도 힘썼다. PS2 출시와 동시에 신규 RPG <에버그레이스>를 출시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3인칭 RPG <이터널 링>을 출시했다. 그러면서도 '게임큐브'로는 <룬>을, Xbox로는 <오토기>를 개발해 플랫폼 초창기 라인업에 올리기도 했다. 20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NDS와 피쳐폰 기기로도 게임을 발매했으니 건드려볼 수 있는 플랫폼은 전부 찔러본 셈이다.
참고로 피쳐폰으로는 <아머드 코어 모바일>을 만들었는데, 무려 네 작품이나 출시했다(그 복잡한 조작을 어떻게 구현했을지는 알고 싶지 않다).
심지어 PSP로 <어드벤처 플레이어>라는 크리에이션 킷까지 만들어 판매한 적이 있다
안 해본 게 없다
태생 덕분인지 외주 개발도 활발한 편이었다. 특히 로봇 계열 장르의 외주, 협업 작품이 많았다. 가령 <슈퍼로봇대전>으로 유명한 반프레스토와 협력해 개발한 <어나더 센추리 에피소드> 시리즈나 <기동전사 건담 UC>가 있다. 캐주얼한 게임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PSP로 발매된 <몬헌일기 따끈따끈 아이루 마을> 시리즈가 바로 프롬의 작품이다.
물론, 이런 시도가 반드시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에버그레이스>나 <오토기>는 두 작품만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2012년 출시된 <중철기>는 Xbox 키넥트의 끔찍한 조작감과 맞물려 혹평을 받기도 했다.
<어나더 센추리 에피소드 R>
여담으로 프롬의 메카닉 게임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인터페이스에 네 자리(혹은 그 이상) 숫자 적길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나마 3부터 프롬이 일본 퍼블리싱과 휴대용 기기 이식을 맡았고, 반응도 괜찮았던 어콰이어의 잠입 액션 게임 <천주>는 넘버링 타이틀 4개, 외전과 이식작을 전부 합치면 무려 15개의 작품이 발매됐지만 현재는 시리즈 명맥이 끊겼다. 덕분에 <세키로>의 첫 콘셉트 아트가 공개됐을 때 <천주> 시리즈의 부활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재미있는 점은 이 당시 흥행 부진을 겪었음에도 시간이 지난 후 리마스터 출시된 게임이 있다는 것인데, 바로 <메탈 울프 카오스>다. <메탈 울프 카오스>는 Xbox로 독점 발매된 일본 내수용 게임이지만, 미국 대통령이 직접 로봇을 타고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을 일망타진하는 독특한 콘셉트을 가지고 있어 해외에서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메탈 울프 카오스>는 2019년 '데볼버 디지탈'을 통해 스팀에 리마스터 발매됐다.
<메탈 울프 카오스>
미국 대통령이 로봇 타고 "웰컴 투 더 화이트 하우스"를 외치는 여러모로 대단한 게임이다.
# 동쪽에서 귀인이 올 지어니
그런 와중, 2004년 안 그래도 이상한 프롬에 한 기인이 입사하게 된다. 바로 29살의 나이에 '오라클' 이라는 IT 대기업의 재정 관리직을 때려치고 게임 개발의 꿈을 위해 찾아온 '미야자키 히데타카'다.
미야자키 히데타카가 어렸을 때부터 PC, 콘솔 게임과 친한 것은 아니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고, 분위기도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다. 덕분에 독서를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소서리!> 같은 보드 게임 몇 가지, 혹은 운 좋게 중고 타이틀을 구해 플레이하는 것이 전부였다. 게임기를 사서 본격적으로 게임을 즐긴 것은 대학생 때부터였다.
미야자키 히데타카. 현재는 프롬 소프트웨어의 사장까지 올랐다. 무려 입사 후 10년 만이다.
하지만 아직도 게임 개발에 관여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출처 : 프롬 소프트웨어)
게이오대학을 졸업한 후 향했던 곳도 IT 기업이었다. 사실 미야자키는 졸업 후부터 게임을 만들고 싶었지만, 꿈보다는 당장의 현실을 생각해야 했다. 3년 정도 오라클에서 일한 후 돈 문제가 해결되자 미야자키는 열정 있게 일하는 동료 직원들을 보며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 와중 한 친구의 권유로 <ICO>를 플레이한 후, 그는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때려치우고 게임계로 향했다. '평생 직장'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일본을 생각하면 상당히 과감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게임 직종에서 나이도 있고, 아무런 경력이 없는 사람이 기획자로 입사하긴 쉽지 않았다. 그나마 길이 열린 곳 중 하나가 프롬이었고, 안 그래도 <킹스 필드> 시리즈와 <아머드 코어> 시리즈의 팬이었던 미야자키는 2004년 9월에 중도 입사하게 된다. 다방면으로 일을 배우며 처음으로 기획을 맡았던 게임은 <아머드 코어 라스트 레이븐>이었다.
이내 미야자키는 능력을 인정받아 2년 만에 <아머드 코어 4>, <아머드 코어 포 앤서>의 디렉터를 맡으며 빠르게 경력을 쌓아 나간다. 그리고 <아머드 코어 포 앤서>의 디렉터를 맡던 중 다른 게임의 디렉팅도 맡게 되었는데, 바로 본인에게도, 프롬에게도 큰 전환점이 된 <데몬즈 소울>이다.
<데몬즈 소울>
#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었는데, 잘 팔리네?
"<킹스 필드> 신작 안 만드나요?"
<소울> 시리즈의 시작 <데몬즈 소울>의 시작점은 SCE의 '카지이 켄'이었다. <킹스 필드> 시리즈의 열렬한 팬인 그는 프롬과의 미팅에서 이 질문을 던졌는데, 이 질문 하나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소니가 투자를 결정하게 되면서 <데몬즈 소울> 개발이 시작됐다.
<데몬즈 소울>의 공동 디렉터를 맡았던 카지이 켄
안타깝게도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출처 : CEDEC 2009)
그러나 초기 개발 상황은 나빴다. 프로토타입은 명확한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안 그래도 다크 판타지 게임을 만들고 싶었던" 히데타카가 <데몬즈 소울>의 디렉터를 맡게 되면서 되고 나서야 3인칭 액션 RPG라는 틀이 잡혀나가기 시작했다.
미야자키는 당시를 회상한 인터뷰에서 "이미 실패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게임을 만들 기회였다고 언급했다. 말 그대로 <데몬즈 소울>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든 게임이다. 심지어 처음에는 사망 시 세이브파일이 삭제되는 안까지 검토됐다.
현 위상과는 다르게,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었던 게임인 덕분인지 <데몬즈 소울>의 첫 인상은 나쁘게 받아들여졌다. 어려운 난이도 덕분에 초반 진행부터 턱턱 막히니 '도쿄 게임 쇼'에서 게임을 체험한 관객들은 <데몬즈 소울>을 미완성 게임으로 여겼고, 당시 SCE 사장이었던 '요시다 슈헤이'는 "쓰레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쁜 게임이다"(This is crap. This is an unbelievably bad game)라는 혹평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 덕분에 소니는 <데몬즈 소울>의 해외 퍼블리싱을 포기했다. 이 어렵고 난해한 게임이 팔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해외 퍼블리싱 권한은 반다이 남코와 아틀라스가 각각 나눠 받았다.
<데몬즈 소울>의 첫 인상은 굉장히 나빴다. 아니, 일단 깰 수가 있어야지!
퍼블리싱 권한 이양도 SCE에게 한(?)이 된 덕분인지, SCE는 후에 프롬과 적극 협업해 <블러드본>을 개발했다
그러나 게임이 출시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발매 첫 주에 일본에서 2~3만 장이 판매됐던 <데몬즈 소울>은 순수한 입소문, 리뷰어의 호평을 타고 역주행을 시작해 전 세계에서 17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달성했다. 어떻게 보면 공략이 정립되고 입소문이 퍼지며 흥행했던 <킹스 필드>와 비슷한 결과였다. 그렇게 미야자키에 따르면 "마케팅 관점에선 절대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프로젝트"는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그렇다고 해도, <데몬즈 소울>이 단순히 "어렵게, 코어 게이머만을 위해" 만들어져 성공한 게임은 아니다. 관련 질문에 대해 미야자키는 늘 (소울 시리즈가) '코어'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데몬즈 소울>은 "게임이 좋은" 사람을 위해 개발됐다. 난이도가 쉽다고 말하기엔 어려워 분명 컨트롤도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반복과 관찰, 학습을 통해 난관을 돌파할 수도 있다. 반복을 위한 완충 장치, 보스 공략을 위한 힌트도 충실히 구비되어 있다. 후에 개발되는 <소울> 시리즈는 모두 이 부분을 기초로 삼고 있다.
<데몬즈 소울>은 후에 PS5로 리메이크 출시되기도 했다
# 프롬이 그려나갈 미래는?
<데몬즈 소울>에 이어 2011년 출시된 <다크 소울>은 기사에 구구절절이 언급하기 미안할 정도로 유명하다. 각종 해외 웹진에서 '최고의 게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게임이 되었으니까.
<다크 소울>이 호평받는 이유를 간단히 복기해 보자면, 도전심을 자극하는 절묘한 난이도 구성과 탐험, 밍글 플레이의 완성, 간접적인 스토리텔링이 주는 아름다움이다. <다크 소울>은 어려운 게임으로 유명하지만, 플레이어의 도전을 자극하기 위한 절묘한 완충 장치를 구비해 놓았다. 플레이어는 실패 속에서 계속 반복해서 도전하며, 절묘하게 연결된 맵 구성을 통해 "타협 없이" 만든 게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다크 소울>의 스크린샷. 무조건 어렵다고 유명한 것이 절대 아니다
심지어 <다크 소울>은 '소울라이크'라는 하나의 장르를 창조하기까지 했다. <다크 소울>에 깊은 감명을 받은 개발자들이 개발 방향성을 본딴 작품을 만들면서 장르를 소울라이크로 호칭했기 때문. 게임 하나가 장르 전체를 대변한 경우가 몇 없음을 고려하면 최고의 찬사를 받은 셈이다.
이후 소울 시리즈는 탐험과 반복의 재미라는 기본 틀은 유지하되, 약간의 변주를 더하면서 끝없이 발전해왔다. 개발에 난항을 겪어 완성도가 미흡해 '스꼴라'라는 모욕적인(?) 별칭이 붙기도 했지만, PVP의 재미와 큰 볼륨을 자랑하는 <다크 소울 2 스콜라 오브 더 퍼스트 신>, SCE와의 공동 개발을 통해 아트의 멋과 공격적인 전투를 살려낸 <블러드본>, 소울라이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다크 소울 3>, 체간 시스템을 통해 손맛 있는 액션을 구현한 <세키로>까지.
그리고 프롬 소프트웨어는 이번 <엘든 링>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노리고 있다. 이번 <엘든 링>의 핵심은 '오픈월드'와 '탐험'이다. 프롬이 최초로 시도하는 오픈월드 장르를 통해 <소울> 시리즈가 자랑하는 탐험 요소를 더욱 확장하겠다는 의미다.
프롬 소프트웨어, 그리고 미야자키가 그린 <소울> 시리즈의 새로운 단계는 무엇일까? <엘든 링> 출시까지 3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