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남아공 월드컵을 뜨겁게 달군 부부젤라를 기억하시나요?
부부젤라는 아프리카 전통 악기로, 선수들의 기를 북돋는 데 활용된 응원 도구인데요, 특유의 독특하고 큰 소리로 인해 엄청난 화제를 일으킨 바 있습니다. 하지만 부부젤라는 누군가에겐 음악이라기보다 소음에 가까웠던 탓에 선수와 관중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다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윔블던 테니스와 런던 올림픽 금지 물품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습니다. 응원용 악기라는 기존 목적이 다소 퇴색된 결과였죠.
<리그 오브 레전드> 소환사의 협곡에도 원래 기능을 상실한 시스템이 있습니다. 마우스 클릭만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할 수 있는 '신호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협곡 속 신호 시스템은 다소 병든 것처럼 느껴집니다. 채팅 없이도 소통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지만, 전혀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으니까요. 기존 목적을 잃은 채 오, 남용되고 있는 소환사의 협곡 속 신호 시스템,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 Amitis(주보국) 필자, 편집= 디스이즈게임 이형철 기자
본 콘텐츠는 디스이즈게임과 오피지지의 협업으로 제작됐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신호는 '핑'이라고 불리는데요, 채팅을 통해 의사 전달이 가능함에도 굳이 핑을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소환사의 협곡을 둘러싼 상황이 매 순간 너무나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죠. 그만큼, 키보드와 채팅으로 상황을 알리는 것 역시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저들의 편의를 배려해 만들어진 게 바로 핑입니다. 적이 라인에서 사라졌을 때는 물음표, 특정 챔피언을 일점사할 때는 집중 아이콘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이죠.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핑은 기존 목적을 완전히 잃은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전략적 활용보다는 '엉뚱한 용도'로 훨씬 많이 쓰이고 있으니까요.
대표적인 예가 생존 핑입니다.
생존 핑은 챔피언이 죽었을 때 부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확인하고, 이를 아군에게 알려줄 수 있는 만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부활을 앞둔 아군이 버프를 받을 수 있도록 오브젝트 처리 시간을 늦출 수도 있고, 상대 챔피언의 부활 시간을 계산해 교전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문제는 생존 핑이 이러한 '순한'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입니다. 부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보다 '우리 팀이 패하면 모든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 혹은 '기량이 떨어지는 유저를 조롱하고자 사용될 때가 훨씬 많으니까요. <리그 오브 레전드> 유저 중 채팅창에서 3~4번 연속으로 생존 핑이 찍히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는 결코 없을 겁니다. 그 정도로 생존 핑의 목적은 퇴색된 지 오래입니다.
사라짐 핑 또한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원래는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졌으니 라인을 당기고 조심하라는 의미지만, 최근엔 아군의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활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과장 조금 보태 '나는 당신의 플레이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 담긴 조롱에 가까운 핑으로 전락한 셈이죠.
한국 <리그 오브 레전드> 천상계 랭크 게임 관전 시 한 가지 도드라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유저 대부분이 '영어'로 의사소통한다는 점인데요, '플래시' 유무를 물어볼 때 "플래시 있나요?" 대신 "NO F?(Flash)"라고 하는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왜 이런 문화가 생겼을까요? 단편적으로는 한국 서버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해외 유저들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핑만으로 섬세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의 핑 시스템은 한 번 보내고 나면 주워 담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이를테면 어디로 가겠다고 핑을 보낸 뒤 상황이 변함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려야 할 경우, 앞서 보낸 핑을 취소하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죠. 이에 유저들은 위험 핑을 일종의 '취소' 핑으로 활용하곤 합니다. 갱을 갈 예정이었지만, 못 간다거나 오브젝트를 치던 중 상황이 달라졌으니 빠지자는 콜을 취소 핑 하나로 다 하곤 하죠.
문제는 이러한 핑 활용이 누군가에겐 다소 애매하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지금 아군이 찍은 위험 핑이 정말 위험해서 찍은 건지, 내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용한 건지 혹은 도와주려고 가다가 상황이 달라져서 갈 수 없다는 뜻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까요. 텍스트의 애매함을 보완하고자 도입된 핑마저도 여러 혼란을 초래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핑 문제는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까요? 현실적인 선택지는 '조금 더 다양한 의사 표현이 가능하게끔 핑을 개선'하는 겁니다. 보냈던 신호가 잘못됐다거나 선택지가 달라졌을 때 활용할 수 있는 '취소'나 상대 궁극기나 소환사 주문 유무를 '있다, 없다, 모른다'로 구분 가능한 제3의 핑 등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해 문제를 해결하는 거죠.
사용 가능한 핑 횟수를 조절하는 것도 괜찮은 옵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25일) 기준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핑 횟수는 여섯 번으로, 결코 적지 않은 편이지만 효율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애매한 핑이 존재함은 물론이고 앞서 언급했듯 오더보다는 아군을 조롱하는 용도로 더 많이 활용되는 게 현실이니까요.
이러한 상황은 '낮은 핑의 가치'와도 연결됩니다. 핑이 핑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에 가치는 떨어지고, 사용하는 사람도 받아들이는 사람도 '<리그 오브 레전드>의 핑은 언제든 마음대로 남용해도 상관없다'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죠.
따라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안은 핑의 가치를 높이는 겁니다.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핑 횟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대신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는 등 '가치 하락'을 막는 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이 될 전망입니다. 상대팀 챔피언 초상화 하단에 궁극기와 소환사 주문 상태 신호를 세분화하고, 이를 아군에게 알려줄 수 있는 별도의 아이콘 생성 역시 고려해봄 직한 옵션이고요.
<에이펙스 레전드>의 핑 시스템 역시 좋은 참고자료가 될 듯합니다. <에이펙스 레전드>에서는 열려있는 문을 클릭하면 캐릭터가 "적이 다녀간 것 같다", "여기 딴 놈들이 있었어"와 같은 대사를 내뱉습니다. '문이 열려있다'라는 단순한 메시지 대신 직접적인 의미를 담은 내용을 전달함으로써 함께 플레이하는 동료가 조금 더 쉽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구조를 준비해둔 셈입니다.
현재 <리그 오브 레전드> 핑 시스템의 의미는 많이 퇴색된 상황입니다. 정확한 상황 전달보다는 다른 이를 조롱하고, 비꼬는 데 활용되는 경우가 잦으니까요. 다만, 핑 시스템은 전략적으로 꼭 필요한 요소인 만큼 부정적 효과가 크다고 해서 쉽게 삭제하긴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고쳐서 정상화해야 하는 셈이죠.
과연 핑 시스템을 바라보는 라이엇 게임즈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소환사의 협곡 핑 시스템이 조롱 대신 전략적 의미로 활용될 수 있을까요? <리그 오브 레전드>의 수명을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핑 시스템 개선이 꼭 이뤄지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