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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서울광장 주변을 서성이다

임상훈(시몬) 2015-12-11 01:14:03

12월 5일. 서울광장에 가고 싶었다. 갔다.

 

한남대교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1호 터널을 거쳐 남산을 뚫고 나갔다. 정작 막힌 건 평평한 땅에서였다. 퇴계로 2가 교차로부터 백병원 쪽 가는 길에 바퀴가 멈췄다. 그때 한 차가 차도를 어기며 앞으로 쑥 지나갔다. 괘씸했다.

 

 

을지로 2가에서 내렸다. 걷다보니 아까 지나갔던 차가 보였다. 고엽제환자수송차량이었다. 환자를 싣고 간다면 서울광장 쪽으로 가선 안 된다. 환자를 안 실었다면, 나쁜 짓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특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공공도덕을 어기는 수준의 특권은 아니다.

 

 

서울광장에 도착했다. 깃발이 나부꼈다.

 

 

그 앞을 이들이 지나갔다. 동의했다. "사랑합니다. 다 함께 삽시다." 이들 뒤를 꽃을 든 스님들이 따랐다.

 

 

 

사람과 깃발이 솟은 곳으로 들어갈 엄두가 안 났다. 주변을 돌기로 했다. 프레지던트호텔을 거쳐 프라자호텔 쪽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15년 전 밤, 나는 이 길을 걸었다. 난생 처음으로 barhopping을 경험했던 밤. 몰트를 처음 마셨던 그 날이 생각났다.

 

 



길이 막혀 프라자호텔 뒤쪽 길로 움푹 돌아서 길 건너편으로 갔다. 대한문을 옆에 끼고, 세종대로를 타고 올라갔다. 빨간 옷을 입고 이 곳에서 '대한민국'을 외쳤던 기억이 났다. 조선일보 옆에서는 이런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어르신들만 보였다. '종북'이라는 소리만 들렸다.

 

 


첫 직장 시절, 늘 지나다니던 광화문 사거리를 지났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큰 소리로 노래하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그 옆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조용히 서있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여학생들이 고마웠다. 눈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 남학생이 따뜻한 음료를 건넸다. 뭐라도 사주고 싶었는데, 발 뒤에는 먹을 게 쌓여있었다.

 

 

 

동아일보를 옆에 끼고 세종대로를 타고 내려왔다. 작은 무리의 보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쪽도 어르신들만 보였다. 서울광장 근처에 이르렀을 때 금색, 은색 마스크를 쓴 여학생들이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녁노을에 비치는 모습이 근사했다. 

 

 


서울광장은 여전히 사람이 만나서 서울시청 뒤쪽길을 돌아 시청 삼거리 방향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다. 파고들어가봤다. 문재인 대표가 보였다. 파란색 머플러를 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꽃을 들고 한 줄로 서있었다. 안철수 의원은 안 보였다.

 

 


광장 쪽 방향으로 좀더 내려갔다. 꼬치와 오뎅 등을 파는 노점상이 많았다. 침을 꿀꺽이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서울대병원까지 행진이 시작될 움직임이 보였다. 꽹과리를 든 청년들이 맨 앞을 이끌었다. 징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뒤로는 장구와 북을 두드리는 청년들이 따랐다. 사물놀이를 이끄는 악기들이었다. 농사를 짓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기후가 중요했다. 꽹과리(천둥), 징(바람), 장구(비), 북(구름)은 네 가지 기후를 상징한다. 

 

 

 

사물놀이패의 뒤는 하회탈을 쓰고, 얼쑤얼쑤 춤을 추는 남녀학생들이 따랐다. 지난 가을 안동에 갔던 기억이 났다. 하회마을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부용대에서 한 사내가 하회탈을 쓰고 멋진 춤사위를 보여줬었다. 하회탈춤은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해학을 표현한다. 거리에서 춤을 추는 학생들도 같은 이유일 것 같다. 

 

 

 

그 뒤에서 오는 청년들은 커다란 초록색 바람개비를 들고 있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의 모임이 그 뒤에서 걸어왔다. 노란색 비둘기를 들고 있었다. 역시 평화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날의 테마는 평화였다.

 

 


다양한 색깔의 종이꽃을 들거나 꽂은 참여연대 멤버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의 바람에 동의한다.

 

 

 

그 뒤가 장관이었다. 대학생 단체들이 거대한 깃발을 펄럭이며 따라왔다. 바람소리도 함께 따라왔다. 펄럭임과 바람소리는 굉장했다. 가장 많이 눈길을 끄는 그룹이었다.

 

 


민족주의 계열로 보이는 또다른 학생 그룹이 그 뒤를 따랐다. 시위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함께 따라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정의당이 그 뒤를 이었다. 백남기 어르신의 쾌유를 기원하는 노란색 피켓의 행진이 인상적이었다. 아,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보였다. 편찮은 몸을 이끌고 시위를 함께 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자동반사였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의 펄럭이던 머릿결이 떠올랐다.

 

 

 

종교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십자가가 앞장을 섰다. 머릿속에는 깨진 안경을 썼던 로메로 신부가 호출됐다. 

 

 

 

 행진 앞에는 이런 길이 놓여 있었다. 좁았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세종대로를 올라갈 때 봤다. 한참을 보고 있었다. 그 날은 꽃이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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