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 MS, 원스토어, 혹은 기타 어떤 플랫폼이든 개발자들에게 좋은 거래 조건을 내걸면 우리도 <포트나이트>를 지원하겠다. 말도 안 되는 30% 수수료 관행은 이제 끝에 달했다.”
지난 12월 11일 구글과의 소송전에서 1차 승리한 직후 팀 스위니 에픽게임즈 CEO가 자신의 엑스(구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에픽은 지난 2020년 구글이 시장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자사 앱 마켓인 구글플레이 입점 기업에 15%~30%의 과도한 판매 수수료를 강제한다며 반독점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발단이 된 것은 에픽이 <포트나이트> 안드로이드 버전에 도입한 자체 결제 수단이다. 이는 반드시 구글플레이를 통하게 되어 있는 구글의 인앱 결제 정책을 우회하려는 방편이었다. 이에 구글은 약관 위반을 이유로 들어 <포트나이트>를 구글플레이에서 퇴출했다.
구글과의 1차전 승소를 축하하는 한 개발자 팬에게 남긴 스위니의 답변
이번 판결에서 배심원단은 구글이 실제로 독점적 앱 스토어 및 결제 서비스 운영을 통해 에픽에 손해를 끼쳤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 오는 1월에는 구글플레이 운영 정책 변경을 명령해달라는 에픽의 요청에 대한 추가적 법원 판단이 이뤄질 예정이다.
한편 에픽은 앞서 거의 동일한 내용의 반독점 소송을 애플에 대해서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과 달리 캘리포니아 연방 법원은 애플의 앱스토어 사업은 독점이 아니라고 봤으며, 2심에서도 원심을 유지했다. 양사는 3심 재판을 준비 중이다.
이렇듯 애플·구글과 법정 다툼 중인 만큼, 상술한 스위니의 발언은 양쪽 싸움에서 최종 승리해 30% 수수료 관행을 끝내겠다는 호언장담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스위니가 언급한 스팀, MS, 원스토어 등 3개 주요 플랫폼 중 ‘최대 30% 수수료’를 유지 중인 것은 스팀뿐이다. 실제로 그동안 스위니는 스팀의 30% 수수료가 개발자들을 갈취하고 있다며 수차례 비판해왔다. 그렇다면 스위니의 암시대로 밸브 역시 스팀의 30% 수수료를 포기하게 될까?
표면적으로 에픽은-남아있는 항소심을 일단 차치물론하면-애플에게는 졌고, 구글에게는 이긴 상태다. 그러나 ‘30% 수수료 강제 금지’라는 아젠다에서는 양쪽 소송전 모두에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애플과의 소송을 살펴보면, 캘리포니아 연방 법원은 애플의 앱스토어 운영이 독점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으며, 에픽이 제기한 9개 쟁점 중 8개에서 애플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 반독점법에 따라, ‘앱스토어 입점 개발자들이 이용자에게 외부 결제 수단을 안내할 수 있게 하라’는 청구 취지만큼은 인용했다.
이는 에픽이 소송을 제기한 핵심 원인 중 하나인 ‘폭리적 판매 수수료 금지’에 맥이 닿아 있다. 따라서 재판에서 애플의 독점 행위 및 이에 따른 에픽의 직접 피해를 입증하진 못했다고 하더라도, 주장 관철에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한편 구글의 경우 독점 혐의가 인정됐는데, 경쟁 배제를 위해 서드파티 기업들과 ‘거래’에 나섰던 사실이 배심원 사이에서 독점 행위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재판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구글은 ‘프로젝트 허그’라고 불리는 일종의 플랫폼 프로모션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었다. 앱 개발사와 게임 개발사들에 구글플레이 플랫폼을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거액의 대가를 약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액티비전, 반다이남코, 베데스다, 넷마블, 넥슨 등 22개 기업에 접촉했으며, 그중 20개 기업이 실제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스마트폰 제조사들에게 삼성 갤럭시 스토어 사용 배제를 종용했던 ‘프로젝트 바니안’ 등 유사 프로그램도 병행 운영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이번 1심 판결은 미국 정부와 구글이 진행 중이던 별도의 반독점 소송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구글의 수수료 정책에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올 예정이다.
지난 2021년 9월, 미국 39개 주 정부는 구글플레이 입점 개발자에 대한 30% 수수료가 과도하다며 소비자를 대리해 공동명의로 구글을 제소했다.
이후 올해 9월 미국 50개 주 정부가 구글과 잠정 합의에 도달했던 데 이어, 12월 19일에는 구글이 7억 달러(약 9,142억 원) 합의금을 내면서 소송 취하가 결정된 것. 이는 에픽과의 1심 결과가 해당 소송에 적용될 경우 막대한 민사적 부담을 지게 될 것을 염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번 합의에서는 합의금 지급 외에도 구글의 구글플레이 운영 정책에 대한 다양한 변화가 지시됐다. 이들 중 상당수는 개발자들이 구글의 구글플레이 앱 생태계 밖에서 유저들에게 앱을 판매하고 인앱 결제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외신 더 버지가 정리한 판결문 주요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향후 7년간 안드로이드 모바일 기기에 구글플레이 외 방법으로 서드파티 앱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적 지원을 지속
▲향후 5년간 개발자들이 소비자들에게 구글플레이 외 인앱 결제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도록 보장 (이른바 ‘유저 선택 결제’ 제도)
▲향후 5년간 개발자들이 구글플레이 및 구글플레이 결제 시스템을 선택하는 유저들에 한해 최고의 가격을 제공하도록 강요할 수 없음
▲향후 4년간 서드파티 앱 스토어가 유저 승인 없이 앱을 업데이트할 수 있도록 허용
▲향후 4년간 기업에 앱 스토어가 구글 API의 '기능 분할'(feature splits)을 사용해 앱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
▲향후 5년간 ‘유저 선택 결제’ 제도를 활용하는 개발사들은 유저에게 구글플레이 외부에서 더 나은 가격을 제시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또한 앱 내장 웹뷰를 통해 개발사의 기존 웹 기반 결제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
▲ 향후 6년간 자체 결제 기능이 없는 소비 전용 앱(예시: 넷플릭스)들이 외부 웹사이트 연결 없이 (앱 안에서) 외부의 저렴한 가격을 안내할 수 있도록 허용. (예시: ‘저희 웹사이트에서 9.99달러에 구매하세요’ 따위의 문구 출력)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적어도 향후 몇 년간 앱 개발자 또는 게임 개발자들은 안드로이드 환경에서 구글플레이의 30% 수수료를 우회할 방법을 여럿 보장받게 됐다.
밸브 역시 현재 30% 수수료를 둘러싼 반독점 소송을 진행 중이다.
지난 2022년 5월 6일 존 코프헤너 미국 시애틀 연방지법 판사는 밸브가 반독점법 위반 혐의를 조사받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해당 소송을 제기한 것은 게임 묶음 판매 사이트 ‘험블번들’의 최초 창립 기업이었던 ‘울파이어 게임즈’다.
이보다 1년 앞선 2021년 4월에 울파이어 게임즈는 밸브가 시장 독점적 지위를 이용, 정상적인 경쟁시스템 하에서 책정할 수 없는 수준인 30% 판매수수료를 개발자들에게 강요한다며 밸브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코프헤너 판사는 스팀 판매 수수료가 서비스 초기부터 30%로 책정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고소를 기각했다. 스팀이 처음 시장에 진입한 2003년 당시 게임 도매 기업들 사이에서 30%의 판매 수수료는 일반적 수준이었다는 이유다.
재판부는 밸브가 당시의 표준적 수수료로 시장에 진입해 다른 업체와 공정하게 경쟁한 것으로 봤다. 시장 독점적 지위를 먼저 획득한 뒤 수수료를 비정상적 수준으로 올리는 일반적 독점 관행과는 다르다는 판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코프헤너 판사는 2022년 다시 제기된 소송에서 이러한 기존 판결을 뒤집었다. 밸브가 시장에 진입하던 당시 유일한 디지털 판매 기업이었다는 특수성을 감안한 결과다.
코프헤너 판사는 “밸브는 시장 권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제품 생산비 대비 훨씬 높은 수준의 판매 수수료를 매길 수 있었다. 다른 기업들은 생산비가 훨씬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판시했다.
더 나아가 재판부는 울파이어 게임즈가 제기한 추가 혐의에 관한 조사 필요성도 인정했다. 울파이어 게임즈는 밸브가 스팀 입점 게임사들에게 ‘플랫폼 최혜국 대우’(PMFN) 대우를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PMFN은 원래 국가 간 통상 용어인 MFN(최혜국 대우)에서 유래한 말이다. 해당 소송에서는 맥락상 ‘스팀 플랫폼 내에서의 게임 판매 가격이 다른 플랫폼에서의 판매 가격보다 높을 수 없다’는 내용의 조항을 의미한다.
울파이어 게임즈는 밸브가 이러한 조건을 불문율 및 명문화된 규정으로 강화했으며, 그 외 몇몇 조항을 통해서도 입점 기업들의 게임 판매 및 가격 정책에 관여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코프헤너 판사는 혐의 제기가 가능한 수준의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고, 법적 조사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대중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인 게이브 뉴웰 밸브 CEO가 직접 법정에 나설 예정이다. 지난 11월 16일 미국 워싱턴 서부 지법은 원고의 증인 요청에 따라 뉴웰 CEO에게 법원 출두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조건에서 벌어진 애플·구글 대 에픽 소송이 서로 다른 판결로 이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 반독점 소송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건은 다양하며, 결과 예측도 쉽지 않다. 다만 두 사례를 가른 중요한 차이 하나를 살펴본다면 밸브의 앞날을 점치는 데 있어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미국의 경쟁보호법은 1890년 제정된 셔먼법을 근간으로 하며, 시장의 특정 경쟁자가 아닌 경쟁 그 자체를 보호한다. 따라서 특정 기업이 정상적이고 적극적인 경쟁으로 시장 점유율을 확보, 상대 기업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일 자체는 독점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기업의 시장 점유율 확보 전략이 일반적 경쟁을 저해하는 유형일 경우가 있다. 이 또한 혁신과 소비자 편익 증대를 위한 것이라면 정당화될 수 있지만, 만약 경쟁을 약화시켜 가격을 인상하려는 시도라면 독점행위로 간주하며 제재 대상이 된다.
그리고 기업의 행위가 독점화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기업이 어떤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對) 에픽 소송에서 구글과 애플의 운명을 나눈 결정적 요소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애플 소송에서 이본 곤살레스 로저스 판사는 단독으로 애플이 참여하고 있는 시장을 ‘디지털 모바일 게임 시장’으로 규정했다. 이 경우 소니, 닌텐도, 마이크로소프트(Xbox 사업 한정) 모두 30%가량의 수수료를 책정하고 있기 때문에 애플의 정책 역시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다.
반면 구글 소송의 판결은 배심원들에게 맡겨졌다. 구글은 재판에서의 ‘관련 시장’을 획정함에 있어 모바일 거래 시장 전반(스마트폰 및 앱 판매 시장)을 주장했으나, 배심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배심원단은 에픽이 제시한 “안드로이드 앱 배포 및 안드로이드 인앱 결제 서비스 시장’을 판결의 기준으로 삼았다.
울파이어 게임즈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인디 게임 번들 사이트 험블번들을 창립, 운영했던 기업이다. 현재 험블번들은 IGN 엔터테인먼트의 모기업 지프 데이비스(Ziff Davis)가 소유 중이다.
울파이어가 제기한 소송에서 밸브가 참여하고 있는 시장의 규명은 더욱 중요한 쟁점이다. 울파이어는 스팀 플랫폼 사업과 스팀 스토어 사업이 사실상 두 개의 별도 시장에서 벌어지는 별도 사업에 해당하며, 밸브가 이를 위법하게 통합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 사건을 맡은 시애틀 연방 지법 재판부는 이러한 혐의 제기에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고 조사 필요성을 인정한 상황이다.
즉, 울파이어에 따르면 밸브는 다른 게임 스토어/플랫폼보다 높은 30% 판매 수수료를 고수하면서 동시에 PMFN을 강요했다. 이런 강요가 가능했던 것은 스팀 스토어뿐만 아니라 스팀이라는 강력한 플랫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개발자들은 30% 미만의 수수료를 부과하는 스토어에서도 스팀에서와 같은 게임 가격을 책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밸브가 경쟁을 저해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만약 이같은 주장이 사실로 밝혀지고, 재판부가 이를 위법행위로 판결한다면, 밸브는 반독점법 위반에 따른 처벌과는 별개로 PMFN 조항을-그런 것이 실존한다면-강제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타 플랫폼과의 가격 경쟁으로 인해 30% 수수료 인하에 대한 시장적 압박이 가해질 가능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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