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박했던 저작권 인식 속에서 해외 인기 만화책, 애니메이션 등이 버젓이 불법 복제되어 국내 유통되던 시절이 있다. 제목과 인명만 우리 식으로 바꿔 처음부터 국산이었던 양 둔갑시키거나, 원작의 주요 내용을 고스란히 베끼는 등의 방법으로 복제품들은 만들어졌다.
보드게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례로 국내 문방구에서 판매되며 큰 인기를 끌었던 ‘죨리 시리즈’는 유명 만화 IP를 활용한 여러 작품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 일본의 ‘파티죠이’ 시리즈를 그대로 카피한 제품이란 사실을 정확히 인지했던 소비자는 당대에 많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정작 지금은 시리즈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어떻게 보면 의도치 않게 ‘파티죠이’ 시리즈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어린이들의 동심마저 책임졌던 브랜드였던 셈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와 가까웠던 파티죠이 시리즈에 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카탈로그형 서적 <원조 문방구 보드게임 대백과>(이하 ‘문방구 보드게임’)가 최근 출시되어 눈길을 끈다.
출판을 맡은 것은 해외 게임도서를 자주 국내에 소개하고 있는 출판사 스타비즈다. ‘레트로 보드게임’이라는 마니악한 장르, 그중에서도 대부분 그 존재조차 낯설어할 ‘파티죠이’ 시리즈에 관련 책을 출간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보드게임 마니아가 아니어도 살펴볼 만한 책일까? 스타비즈의 홍승범 대표의 설명을 들어봤다.
홍 대표가 <문방구 보드게임> 원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보드게임에 대한 개인적 애정 덕분이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보드게임을 종종 즐기고 있는 그는 2000년대 이전 보드게임을 보지 못한 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홍 대표는 “그러던 중 파티죠이 게임 시리즈를 카탈로그화한 책이 있다는 걸 알게됐다”고 이야기했다.
<문방구 보드게임>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홍 대표는 몇 가지 해프닝을 겪어야 했다. 그는 “판권 확보 시, 일본 판권을 가진 출판사가 ‘한국에 출시도 안 된 보드게임에 왜 관심을 갖냐’고 물어본 게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파티죠이>의 복제판 제품인 <죨리 시리즈>에 관한 기억이나 자료를 찾는 데서도 애를 먹었다. 홍 대표는 “비공식 로컬에 해당하는 죨리 게임이나 기타 복제 게임들 관련 페이지 용도로 쓸 수 있는 자료를 모으는 게 역시 큰 애로사항이었다”고 설명했다.
2023년 플레이엑스포를 방문한 '스타비즈' 홍승범 대표
<문방구 보드게임>의 마지막 단락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일본 대중문화가 아직 개방되지 않았던 1980년대 일본 IP의 무단 복제는 국내에서 흔히 일어났으며 보드게임 역시 그 대상이었다. 일례로 전투형 보드게임 <택틱스>의 카피게임, 변종 게임 등이 국내에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런 무단 복제 보드게임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바로 ‘죨리 게임’ 시리즈다. 그 외에 ‘동우리’, ‘금메달’, ‘유니콘’, ‘코끼리’ 등 시리즈 브랜드명으로 파티죠이 시리즈가 복제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서도 <드래곤볼> 해적판으로 유명한 명지기획 등 회사에서 파티죠이 시리즈의 복제품을 일부 만들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뤄졌던 90년대 중반을 즈음해서는 제목을 원작과 조금씩 다르게 비틀어 문제 회피를 시도하거나, 원본과의 유사성이 없는 표지그림을 채택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마리오> IP 보드게임을 복제한 죨리 게임 제품 (사진: 다음카페 '고동이' 님 제공)
<문방구 보드게임>에 흥미를 느낄 만한 독자는 누구일까?
홍 대표는 “아무래도 198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현재 40대 이상이 주된 독자가 될 것이라 예상한다. 다수의 대중보다는, 특수 장르에 대한 연구나 레트로 아이템에 관한 지식 습득 등을 원하는 소수의 분명한 독자층을 노린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80~90년대의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흥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연령 관계 없이 두루 권장할 만하다.
한편, 보드게임 마니아에게 책에 대한 감상은 조금 다를 수 있다. 홍 대표는 “전략 보드게임 <카탄>의 등장 이후로 상향 평준화된 현재의 보드게임 시장에 익숙한 장르 팬들은 ‘파티죠이’, ‘죨리 게임’ 같은 제품 유형이 보드게임보다는 그저 캐릭터 상품이나 OSMU(원 소스 멀티 유즈)의 한 유형으로 느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파티 죠이 시리즈는 대다수가 특정 기믹 하나에만 중심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아, 다양한 전개나 승부가 가능한 현대의 전략 특성이 강한 보드게임과 노선이 조금 다르긴 하다. 다만 아이들과 간단히 즐기는 데에 있어선 특유의 간단한 전개가 익히기 쉽다는 점에서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고전적인 만큼 담백한 디자인에서 오는 연구 가치도 기대해 볼 수 있다. 홍 대표는 “지금 보면 이런 부류의 보드게임은 외려 종이만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믹의 한계에 도전하는 의미도 있다. 또한 간단한 창작 룰을 만들거나 연구하는 보드게임 골수팬에게는 참고삼을 만한 책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심플한 모바일게임, 파티게임 기획자에게도 자료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한편 <문방구 보드게임>은 단순한 레트로 아이템 수집가, 고전 IP 관련 제품 수집가들 역시 흥미를 느낄 만한 책이다. 홍 대표는 “파티 죠이 보드게임 시리즈가 일본의 유명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 IP를 활용해 만든 경우가 많다 보니, 해당 IP 관련 아이템을 다 모으려는 수집가들에게도 관련 항목을 채울 자료 서적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파티 죠이가 이렇듯 유명 IP를 자주 기용한 배경에는 당대의 시장 상황이 있다. 홍 대표는 “가정용 게임기인 ‘패미컴’ 출시 이후 보드게임이 (값비싼) 비디오 게임에 시장을 빼앗기는 상황에서, 파티죠이 시리즈는 제작비 절감과 접근성 제고를 위해 기믹 중심의 염가형 제품군으로 기획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불법 복제품이었던 죨리 게임 시리즈 역시 당시 1,000원 대의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유통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마리오>, <건담> 등 접근하기 힘들었던 IP를 쉽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국내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문방구 보드게임>은 시각 자료를 보강할 목적으로 원서보다 판형을 키우고 자료사진의 또한 최대한 키워 보기 편하게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더 나아가 파티 죠이 복제 버전인 죨리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15페이지가량의 분량이 추가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역자 엄다인이 저술한 해당 챕터에서는 파티 죠이 시리즈가 어떻게 죨리 게임 등의 음성적 형태로 국내에 전파되었는지, 당대의 어린이 놀이 문화와 저작권 의식은 어떠했는지 등을 간단히 다룬다. 더불어 출판사가 어렵게 입수한 ‘죨리 게임’ 시리즈의 이미지 자료를 원본과 비교해 살펴볼 수 있다.
흥 대표는 “죨리 게임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다루는 것을 통해, 나쁜 사례를 기억하고 이를 좋은 영향으로 승화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출판 의도 일부를 전했다.
또한 “스타비즈는 현재 여러 게임 관련 서적을 내고 있지만 레트로 문화에도 관심이 많은데, 이를 주로 해외 서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조금 부끄럽게 느끼고 있다. 국내 레트로 게임 및 옛 문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분들과 함께 관련 서적을 출판할 의향이 있으니, 관심 있는 여러분의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