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세계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이들, 플레이어에서 창작자로 변모하며 게임 세계를 재창조하는 이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사회적 목소리를 키워가는 이들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디지털 게임이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상을 탐구하기 위해 디그라한국학회가 첫 발을 내딛었다. 세계 최대 게임 연구 단체 '디그라'의 18번째 지회인 디그라한국학회는 2월 21일, 연세대 성암관에서 제1회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단순한 이론적 탐구를 넘어, LLM을 활용한 게임 내 비속어 분석부터 초등학교에서의 게임 기반 교육 실험까지, 현장의 생생한 사례들을 통해 게임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한다. 여기에 넥슨 게임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한 라운드 테이블과 윤태진 학회장의 키노트까지 더해져, 한국 게임 문화의 정체성을 더욱 선명히 그려냈다.
디지털 게임이 바꿔놓은 우리의 삶, 그리고 앞으로 게임이 만들어낼 새로운 변화의 현장의 면면을 기사로 옮겼다.
# 디지털 게임의 정체성과 그 변화
수집형 게임, 비주얼 노벨, UGC 등 새로운 유형의 게임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에 많은 사람들이 정의하던 게임과는 다른 양상으로 게임 문화를 바꿔가고 있다. 이에 대한 게임 연구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기획 세션인 "디지털 게임의 정체성과 그 변화"는 디지털 게임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게임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재구성되는지를 다뤘다. 이 세션에서는 게임 속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관계, 게임 내 내러티브의 변화, 그리고 기술 발전에 따른 게임 환경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순천향대 이정엽 교수는 요즘 인디게임 씬에서 점차 늘어나고 있는 1인 개발자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투 더 문>, <페이퍼 플리즈>, <허 스토리>, <언더테일>, <스타듀밸리>, <레플리카>, <바바이즈유> 등 1인 개발자의 인터뷰를 분석했다. 그 결과 많은 개발자들이 표현의 자유와 작업의 자율성을 이유로 1인 개발자의 길을 택했다고 답변했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Games and Life Lab의 도영임 교수와 채지훈 석사과정생은 게임 NPC의 정체성과 역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과거의 NPC는 단순한 배경 요소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재에는 플레이어와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게임 경험을 조형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뒤에는 기술의 발전이 있었다. 앞으로는 빠르게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토대로 NPC의 정체성 자체가 변화할 수도 있다.
오후에도 발표가 이어졌다. 서울대 이아름 연구자는 서브컬처 수집형 게임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스타라이트 스테이즈>의 전후로 서브컬처 게임 지형이 변화했다고 봤다. 특히, '프로듀서-아이돌'과 같이 권력적 위계가 조정되며 콜렉팅한 캐릭터의 숫자가 자본이나 단순한 시간의 소모가 서사적 깊이를 대체했다는 점을 짚었다.
연세대 이미몽 연구자는 '추리/호러' 장르의 게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비주얼 노벨은 시각적 요소와 소설적 요소를 결합한 장르로 게임의 형태를 통해서 서사를 전달하는 독특한 매체다. 이 연구자는 다른 장르들과는 달리 스토리 감상 자체가 주된 목적이 되므로 게임 방송을 통한 '낭독극'의 형태로 발전할 여지가 있다고 전했다.
청강대 조원준 연구자와 한기대 박민수 연구자는 UEFN과 로블록스를 중심으로 UGC 생태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발표했다. 과거 단순히 게임을 소비하던 플레이어의 역할이 창작과 공유까지 확장되면서 창작, 소비, 공유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게임 문화가 움텄다고 말했다. 특히 <로블록스>나 <포트나이트> 같은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쉽게 게임을 제작하게 되며, 플레이어와 크리에이터, 개발자라는 경계가 점차 흐려지는 추세라고 주장했다.
서울대 이아름 연구자가 논문 <플레이어에서 프로듀서로: 캐릭터 수집형 게임 시대의 게이머 주체성>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 수용자에서 행위자로, 게임 '플레이어' 연구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게임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성암관 215호에서는 '게임을 하는 행위'를 인간 행동의 일종으로 파악하는 연구 발표가 진행됐다.
첫 번째 일반 세션인 "수용자에서 행위자로: 게임 플레이어 연구"는 게이머가 단순한 콘텐츠 소비자에서 능동적인 행위자로 변화하는 과정을 집중 조명했다. 이 세션에서는 게임 플레이어가 어떻게 게임 세계에 개입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지를 탐구했다. 'LLM을 활용한 게임 내 비속어 처리 방법 탐색', '게임을 하며 딴짓을 하는 이유와 그 효과 연구' 등 흥미로운 주제의 발표가 이어졌다.
서울대 이상혁 연구자는 게이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어떻게 비속어를 사용하는지에 대해 LLM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연구했다. 그는 기존의 사전 기반 방식에서 탐지하기 어려운 대량의 텍스트와 맥락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기존의 탐지기가 발견한 텍스트를 생성형 LLM에 투입하여 결과를 비교했다. 결과는 악플과 욕설의 영역은 잘 구분했지만, 여전히 교묘한 우회 표현이나 변형된 텍스트까지 완벽히 대응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생성형 LLM과 앞뒤 문장의 문맥을 파악해서 단어의 뜻을 유추하는 BERT 방식을 적절하게 결합하고, 여러 단계의 필터링을 통해 보다 정교한 텍스트 분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경희대 유창석 교수는 PC 게임과 모바일게임을 동시에 플레이하면서 유튜브를 시청하고 동시에 다른 플레이어들과 채팅을하고, 커뮤니티에 댓글을 다는 게이머들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온라인 설문지로 600명에게 의견을 듣고 그것을 분석한 결과 게임과 관련된 멀티테스킹은 인지적 만족도에서 큰 효과를 보인 반면, 게임과 관련 없는 멀티태스킹은 그렇지 못했다. 이는 기존 연구들과는 달리 플레이어들에게 게임을 하는 동안 적절한 멀티태스킹 환경에 참여하도록 장려하면 전반적인 이용 만족도가 향상할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경희대학교 전려화 연구자는 'e스포츠'라는 단어를 연상했을 때 즉각적으로 어떤 단어가 연상되는 단어를 수집, 분석했다. 그는 브랜드 연상 기법을 활용하여 97개의 브랜드 관련 단어들을 모았고, 이들의 연결관계를 분석한 결과 젊은 층에서 e 스포츠는 이미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다만, 각각의 연상 사이의 연결성이 낮아 브랜드 연상 강도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모델을 적용하여 후속 연구를 진행하겠다고 전했다.
연세대 이연우, 알토대 박솔잎 연구자는 소비자로서의 게이머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게이머들은 이제 단순히 게임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가치와 운영 방식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적극적인 소비자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새롭게 등장한 서비스로서의 게임 문화는 게임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불매운동을 넘어선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게이머를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서울대 이상혁 연구자가 논문 <LLM을 활용한 게임 내 비속어 처리 방법 탐색>을 발표하고 있다
# 게임의 행위성과 젠더 연구
두 번째 일반 세션인 "게임의 행위성과 젠더 연구"는 게임 플레이 속에서 드러나는 행위성과 젠더 이슈를 다뤘다.
박다흰 독립연구자는 '매직서클' 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가지며 게임 업계의 규범과 젠더 문제를 풀어냈다. 그동안의 연구는 게임은 현실과 분리된 놀이 공간인 '매직서클' 개념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 게이머는 현실에서 다양한 괴롭힘 문제를 마주해왔고 그에 따라 게임에서 성별을 숨기는 등 게임 속에서도 여전히 현실 문제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서강대 호규현 연구자는 2023년 진행된 페미니즘 사상 검증 이슈에 대해 분석했다. 현상 발생 시점으로부터 1개월 동안 작성된 커뮤니티 글을 크롤링하여 분석했고, 여러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 2년 정도 지난 지금은 사상검증을 반대하는 이들이 반대 진영으로 결집하고 있고, 제도적인 연결점이 분명하게 생겨 이전과 양상이 달라졌다고 본다. 그는 게임문화와 여성혐오, 게이머 정체성과 게임산업에 대한 구조적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하며 발표를 마무리 했다.
게임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통해 행위성을 분석하는 시도도 있었다. 연세대 박동수 연구자는 <에스퍼의 빛>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를 연구했다. 연구에 따르면, 게임의 행위성은 단순한 규칙에 따르는 것을 넘어, 다른 소설, 영화 등의 미디어 창작에 게이머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때, 그는 다큐멘터리 분야에서도 게임이 활약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게임이 단순히 즐기는 것을 넘어 영화나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을 반영하고 해석하는 매체로 진화하고 있으며, 디지털 세대의 새로운 서사 방식이라고 전했다.
경기 진말초의 박광희 연구자는 3학년 학급 26명을 대상으로 8차시에 걸쳐 <모뉴먼트 밸리>를 활용한 도형 이해 교육을 진행했다. 급우들과 함께 게임을 플레이하고 게임 속 세계를 직접 만들어보는 활동이었다. 교육 과정에서 학생들이 그린 결과물과 네트워크 분석 도표를 확인한 결과 학습자들이 인물, 공간, 고정된 관계를 넘어 상호작용을 통해 게임의 행위성을 이해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박다흰 독립연구자가 논문 <여성 게이머의 플레이 규범 연구>를 발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