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블리자드)는 사내 괴롭힘 방지(anti harassment) 제도, 동일 임금 제도, 그 외 직원들을 위한 평등 고용 기회 시스템을 국내에서 가장 많이 마련한 기업으로서, 게임 업계의 안식처(safe haven) 같은 직장이었어야 했다.”
20일 캘리포니아주 공정고용주택국(DFEH)이 미국 LA 고등법원에 제출한 소장의 일부다. 피고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혐의는 사내 성폭력 방치·조장과 직원 차별이다.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중요하다’(every voice matters)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평등의 가치를 강조하던 기업이기에 게이머들과 업계의 충격은 더 큰 상태.
이번 소송은 더 나아가 고소장에 기술된 성폭력·차별 사례의 구체성과 심각성 등 여러 측면에서 눈여겨볼 사안이 많다. 주요 내용을 정리해봤다.
DFEH는 캘리포니아 주 정부 산하의 부서다. 고용·주택·공공시설 관련 차별, 그리고 증오 범죄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는 업무를 맡는 기관이다. 사무국장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임명한다.
미국 내 인권(civil rights) 관련 정부 기관 중 규모가 가장 큰 조직으로서 자체적인 특수 조사 부서를 두고, 인권 침해 사례의 증거를 수집해 소송을 제기한다. 그간 캘리포니아주 내의 여러 차별 사건을 다뤄왔다. 미국 법과대학원입학위원회(LSAC)의 장애인 차별 사건, 통신사 버라이즌의 직원 부당 대우 사건, 지역 농업자들 대상 성차별 사건 등 대형 소송 사례들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소송은 2018년 10월에 처음 조사를 시작했다. 소장에 따르면 2년 넘는 조사 과정을 통해 피고가 업무할당·승진·해고·실질적 해고 등 업무환경 및 계약 차원에서 여성 직원들을 차별했다는 증거들이 발견됐다. 또한 피고가 여성들을 불법적인 괴롭힘·차별·보복으로부터 보호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남성 직원들과 비교해 동일 업무에 동일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거대 정부 기관이 오랜 조사 끝에 제기한 소송인 만큼, 일각에서는 이미 DFEH의 고발 내용을 상당 부분 신뢰하고 이들의 승소를 점치고 있다. 하지만 블리자드는 “블리자드의 과거에 대한 왜곡되고 대부분 거짓인 주장”이라며 “현재의 블리자드는 공정보수 지급과 문화 다양성 보장, 괴롭힘 방지 등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반박했다.
다음은 DFEH가 소장의 개요에 적은 블리자드의 주요 성차별·성폭력 사례들이다.
*이하 내용에서 ‘피고’란 액티비전 블리자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액티비전 퍼블리싱 3사를 한꺼번에 지칭한다.
“전체 직원의 20%만 여성이고, 고위 임원은 주로 백인 남성이다. CEO와 대표 자리 모두 과거부터 현재까지 항상 백인 남성이었다. 고위 직무에 오른 여성은 매우 적다. 고위직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동일 직급 남성보다 임금, 인센티브, 총보상(total compensation)이 모두 더 적었다. 이는 피고 측의 공식 기록을 통해 증명되는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불공정은 회사 전반에 존재한다.”
*총보상: 조직이 직원에 제공하는, 급여·승진·교육·업무환경·복리후생 등 금전적, 비금전적 보상의 총합
“사내 여성들은 저임금 직무에 배정됐고, 승진 기회도 적었다. 직무가 상당히(substantially) 비슷한 경우에도 여성의 초봉이 남성 초봉보다 적었다. 이렇듯 불리한 계약 조건을 마주한 여성 직원 다수가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피고는 사내에 남자 패거리(frat boy) 문화가 만연하도록 만들었고, 이 문화는 계속 강해졌다. 사무실 내에서 여성 직원들은 이른바 ‘큐브 돌아다니기’(cube crawls)에 당해야만 했는데, 이는 남자 직원들이 술을 많이 마시고 여성 직원들이 일하는 칸막이(cubicle·큐비클)를 돌아다니는 행위를 말하며, 이때 남자 직원들은 여성 직원들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남성 직원들은 전날 마신 술이 깨지 않은 채 출근했으며, 업무시간에 한참 동안 비디오 게임을 했고, 그 와중에 자기 책무는 여성 직원들에 떠넘겼다. 성 경험에 대한 농담을 주고받았고, 여성의 신체에 대해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으며, 성폭행에 대해 농담을 했다.”
“당연하게도 피고의 ‘남자 패거리’ 문화는 여성 직원들을 향한 차별과 괴롭힘의 온상이 됐다. 여성 직원들은 지속적인 성희롱의 대상이 됐고, 동료 직원과 상사들이 가하는 원치 않은 성적 발언과 접근을 견뎌야 했다. ‘큐브 돌아다니기’ 및 다른 행사 와중에 남자직원들은 여성 직원들의 몸을 더듬었다.”
“피고는 사내에 대가성(quid pro quo) 성폭력 문화와 공격적 직장 환경(hostile work environment)을 모두 용납했다. 이런 메시지(묵인의 분위기)는 직원들 사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국 노동법상 직장 내 성폭력은 ‘대가성 성폭력’과 ‘공격적 직장 환경’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전자는 직원이 채용을 빌미로 입사 후보자에 성행위, 성적 접촉 등 성적 요구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는 불법적 차별로 특정 직원들에게 불편한 환경을 조성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위법한 괴롭힘, 차별, 보복 행위에 관한 수많은 민원이 J. 알렌 브랙 대표를 포함해 피고의 인사과 임직원들에게 접수되었다. 하지만 피고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효과적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해자들이 인사과 직원들과 서로 가까운 것으로 알려지면서 직원들은 민원 접수를 더 꺼리게 됐다. 피고의 사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사과를 향한 직원 신뢰는 매우 부족하며, 인사과의 내부 평판이 낮은 것으로 드러났던 바 있다.
직원 민원은 당연하게도 형식적이고 소홀하게 취급됐으며, 기밀 유지도 안 됐다. 이로 인해 여성 직원들은 프로젝트에 끼지 못하거나, 다른 부서로 강제 전출되거나, 해고(휴직)되는 등의 방식으로 보복당했다.”
고소장에 제기된 구체적 성폭력 및 차별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원고에 따르면 고위 임원 및 크리에이티브 직무 인원들은 노골적인 성폭력을 가하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겪지 않았다. 이로 인한 특히 비극적인 사례로, 남성 상사와 출장을 갔던 여성 직원이 출장 도중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있다. 문제의 남자 상사는 해당 출장에 성 기구(butt plug)와 윤활제를 가져갔던 것으로 밝혀졌다.
피해자는 그전에도 다른 직원들로부터 성적 모욕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한 직원은 사내 파티에서 남자 직원들이 피해자의 노출 사진을 ‘돌려 봤다’고 증언했다.
그 외 성폭력 가해자에는 임원급 직원이 속해 있으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수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가 회사를 떠난 알렉스 아프라시아비가 그 중 한 명으로 지목됐다.
아프라시아비는 블리즈컨 도중 임직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여성 직원들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거나, 입맞춤을 시도하고, 팔을 두르는 등 성적으로 접근했다. 그 정도가 심해 일부 임원들이 여성 직원들로부터 그를 떼어내야 했다.
이에 J. 알렌 브랙 대표가 아프라시아비와 여러 번 대화를 가졌다. 하지만 브랙 대표의 질책은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강도가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소장에 따르면 브랙 대표는 아프라시아비와 대화에서 직원들에게 “너무 친근하게 굴었다”고 우회적으로 말하는 등 ‘솜방망이 처벌’을 가하는 데 그쳤다.
아프라시아비는 이후에도 한 여성 직원의 손을 잡고 자기 호텔 방으로 오라고 말하거나, 다른 여성을 더듬는 등, 여성 직원들을 상대로 성적인 접근과 부적절한 행동을 지속했다. 블리자드에서 프로듀서로 일한 여성 스테파니 크러스틱은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이러한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 나서서 말하겠다. 내가 바로 그 여성 중 하나였다. 나는 2013년 블리즈컨에서 일을 당했다. 지난해 퇴사를 마음먹을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내 이름이 알려지고, 보복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고 전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팀의 여성 직원들은 팀 내의 다른 남자 임직원에 관해서도 비슷한 사례를 보고했다. 이들에 따르면 남자 직원들은 추파를 던지고, 성폭행에 관해 무례한 발언을 했으며, 그 외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 또한 수석 기술 책임자로 일하던 한 임원은 행사에서 술에 취한 여성 직원을 더듬었고, 여성 직원을 채용할 때는 외모를 기준 삼기도 했다.
한편 백인이 아닌 여성 직원의 경우 특히 더 많은 차별을 받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 IT 부서에서 일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직원은 1페이지에 달하는 ‘휴가 계획서’ 작성을 강요받기도 했는데, 이는 다른 어떤 직원에게도 요구된 적 없는 일이었다고 DFEH는 주장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는 여러 외신을 통해 DFEH의 주장에 대한 강력한 어조의 반박 성명을 냈다.
이들은 “우리 기업이나 게임업계, 혹은 기타 어떤 업계에서도 성적인 비위행위나 모든 종류의 괴롭힘 행위는 존재해선 안 된다. 우리는 제기되는 모든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피해 고발을 조사하고 있다. 비위행위에 대해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조처해왔다”며 DFEH가 제기한 혐의를 전반적으로 부정했다.
또한 DFEH의 조사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내세웠다. DFEH는 관련법에 따라 이번 소송을 제기하기 전 자신들과 충분한 논의와 해결 노력을 가져야 했으나, 적극적 협조에도 조사하고 있는 구체적 사안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는 것. 액티비전 블리자드는 “대신에 DFEH는 성급하게 부정확한 소장을 제출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DFEH는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오기 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고 말한다. DFEH는 소장에서 “법적 해결을 시도하기 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당사자 간 분쟁 처리 절차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해결은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는 또한 극단적 선택을 한 직원에 관련해 “이번 사례와 전혀 관련이 없는 한 직원의 비극적 죽음을, 유족에 대한 존중도 없이 끌어들인 DFEH의 부끄러운 행태에 큰 불쾌감을 느낀다”며 해당 사건이 사내 성폭력과 관련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DFEH는 블리자드의 과거를 왜곡하거나 많은 부분 거짓되게 설명하고 있다.”며 “DFEH가 만들고자 하는 그림은 오늘날 블리자드와 다르다. 우리는 처음 조사가 시작된 2018년 이래 지난 수년 간 사내 문화를 크게 변화시켜왔다”며 제시된 혐의 대부분에 방지책을 마련해 두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