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블로의 오준원 대표이사는 사회생활 초기에 대기업이 싫어 IT회사에 취업했다. 그는 IT회사를 다니며 자신의 아이디어가 반영되기 어렵고, 어쩌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더라도 쉽게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현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어떤 이유로든 쉽게 사라졌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방문하게 된 보드게임 카페에서 보드게임 박스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개발자의 이름을 봤다. 그리고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꿈을 꾸며 보드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며 퇴근 후, 주말 시간을 투자해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는 보드게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30여 종의 보드게임(젬블로, 톡톡우드맨, 라온 등)을 디자인했다.
다소 엉뚱한(?) 이유로 보드게임 업계에 뛰어든 오준원 대표이사는 이제 사람들에게 보드게임 개발을 권한다. 그는 누구나, 어떤 직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상관없다며 '죽기 전에 보드게임 하나 정도는 만들어 보라'고 말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오준원 대표이사의 강연을 정리했다. / 디스이즈게임 이영록 기자
젬블로 대표이사 오준원
# 모든 게임은 통한다!
보드게임과 디지털게임 간 플랫폼 전환이 늘어나고 있다. 인기있는 보드게임이 모바일게임으로 출시되고, 인기있는 모바일게임이 보드게임으로 출시되기도 한다. 또 보드게임과 비디오게임 간에 크로스오버가 일어나기도 한다. 게임과 게임 간의 플랫폼 전환이 자유로워졌다.
보드게임이 모바일게임이 되고, 비디오게임도 된다. 때로는 콘솔게임이 되기도 한다. 보드게임을 기획하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기획력을 갖출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보드게임은 플랫폼 전환이 자유롭다.
<리그오브레전드>도 보드게임이 출시됐다.
# 보드게임은 '교육'이다.
최근 게임을 활용한 교육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논문이 나오고 시범 학교가 운영되는 등 게임 관련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게임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진 있는 학교에서도 보드게임은 별다른 거부감없이 교육용으로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코딩과 관련된 테마, 안전 교육 테마 등의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학교에서만이 아니다. 요새는 회사에서 직원 교육용 보드게임이 생겨나고 있다. 회사의 업무 프로세스 이해와 연구, 신제품을 개발하는 과정 등을 신입 사원에게 보드게임으로 체험하게 해 교육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최근 네오플 직무연수에서는 자사의 게임으로 보드게임을 만드는 과정을 체험해보기도 했다.
차츰 유명 게임 개발사나 중소 게임 개발사들도 보드게임을 활용한 아이디어 회의 또는 연수가 필요해질 것이다.
직원 교육에 보드게임이 활용되고 있다.
# 보드게임은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보드게임은 플레이어끼리만 즐기는 '게임'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플랫폼과 결합해 계속해서 확장한다.
보드게임은 '더 지니어스'처럼 방송 콘텐츠로 확장할 수 있다. '더 지니어스'는 전형적인 보드게임의 룰을 가지고 있는 방송 콘텐츠다. '더 지니어스'는 방송의 인기에 힘입어 실제 보드게임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오준원 대표이사는 방송사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보드게임 관련 아이디어를 달라는 요청이 오기도 한다고 언급했다.
보드게임은 레크리에이션, 무대 이벤트로 확장할 수도 있다. 동시에 100~200명이 동시에 할 수 있는 무대 이벤트로 보드게임이 활용될 수 있다. 보드게임만으로도 재미있는 사회자, MC가 될 수 있다.
방송 콘텐츠에서 보드게임이 활용되기도 한다.
보드게임은 미디어 콘텐츠가 될 수 있다. 동화 또는 소설과 결합한 형태의 보드게임이 나오기도 하고, 보드게임이 영화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영화가 보드게임으로 탄생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진 '트랜스포머'는 1986년에 개발된 보드게임이 원작이다. '쥬만지'는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보드게임이다.
이처럼 보드게임은 다양한 플랫폼, 매체와 결합해 확장한다. 카네기 멜론 대학 엔터테인먼트 기술센터 교수이자 셸게임즈(Schell Games)의 CEO인 제시 셸은 2025년에 가상현실(VR) 또는 증강현실(AR)이 결합된 보드게임이 유행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트렌스포머'는 보드게임이 먼저였다.
# 보드게임 시장에는 8만 가지의 유용한 아이디어가 있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게임 개발자, 기획자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보드게임긱 닷컴(www.boardgamegeek.com)'이란 사이트가 있다. 여기에는 8만 가지가 넘는 퍼블릭 도메인(저작권이 소멸된 저작물) 보드게임들이 올라와 있다.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다.
<루미큐브>는 퍼블릭 도메인을 잘 활용한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이스라엘의 한 회사는 1887년에 개발된 <루미>라는 보드게임을 기반으로 1930년에 <루미큐브>를 개발했다. <루미큐브>는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이 팔리는 보드게임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루미큐브>는 <루미>를 참고해 만들어진 게임이다.
<Rolit>도 1883년에 개발된 <오델로>라는 퍼블릭 도메인을 잘 활용한 사례 중 하나다. <Rolit>은 <오델로>와 똑같은 게임 룰에 4인이 플레이할 수 있도록 변형시킨 보드게임이다.
이렇듯 보드게임긱 닷컴에 있는 퍼블릭 도메인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해 간단하게 자신만의 보드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또 이 사이트에 모인 수많은 아이디어를 다양한 기획에 사용할 수 있다. 보드게임에 관심을 갖고 8만 가지가 넘는 아이디어를 잘 활용하자.
<Rolit>은 <오델로>의 4인 버전이다.
# 보드게임 메커니즘은 '기획력'이 된다.
보드게임에서 작동하는 약 50가지의 메커니즘은 게임인에게는 '좋은 무기'가 된다.
보드게임에서 흔히 사용되는 주사위만으로도 다양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롤앤무브(Roll and Move)' 메커니즘이 주사위를 굴리고, 나온 눈의 수 만큼 움직이는 것이라면, '다이스롤링(Dice Rolling)' 메커니즘은 2개 이상의 주사위를 던진다. 롤앤무브에서는 '랜덤요소' 자체에서 재미를 준다면, '다이스롤링'에서는 랜덤 요소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전략적 선택의 재미를 더한다.
하나의 주사위에서도 다양한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다. 처음에는 주사위의 눈 만큼 점수를 얻는다는 룰을 정한다. 그리고 무한히 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횟수에 제한을 둔다. 거기에 주사위 눈이 1이 나오면 그때까지 얻은 점수가 0이 된다는 룰을 더할 수도 있다.
주사위 하나에도 다양한 메커니즘이 적용된다.
이외에도 보드게임에는 리얼타임, 액션포인트, 롤플레잉 등 수많은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 메커니즘을 알면 기존의 디지털게임의 메커니즘을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디지털게임의 메커니즘 중 하나 이상을 선택해 보드게임으로 옮길 수도 있다. 반대로 보드게임 메커니즘을 디지털게임으로 옮길 수도 있다.
보드게임은 간단한 룰 한 줄, 간단한 구성물 하나를 어떻게 하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재미를 이끌어내는 연습이 보드게임 개발이다. 보드게임 메커니즘은 기획력과 분석력을 증가시켜 다른 게임 개발에도 도움을 준다.
보드게임 메커니즘은 게임 기획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
# 보드게임은 '커뮤니케이션'을 돕는다
해외의 많은 게임 개발사에서는 게임 기획 단계에서 '보드게임' 프로토타입을 활용하고 있다. 라이엇 게임즈의 선임디자이너 크리스티나 노먼은 보드게임으로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게 코딩하는 것보다 더 빠를 때가 있다고 언급했다. 빨리 만들어진 프로토타입은 기획 단계의 게임을 타 부서와 공유할 때 유용하다.
보드게임 방식의 프로토타입은 숲을 한눈에 보는 효과를 제공한다. 프로토타입 보드게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게임 룰을 적어야 하고, 시각화해야 한다. 셸게임즈(Schell Games)의 CEO인 제시 셸은 "전통적인 게임을 만들고 분석하는 것이 완전하게 작동하는 비디오게임의 개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언급했다.
보드게임 방식으로 기획 단계의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페이퍼 프로토타이핑'은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각화할 수 있고, 아이디어 공유에도 매우 유용하다. 또 전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많은게임 개발사들도 페이퍼 프로토타이핑을 많이 활용했으면 한다.
페이퍼 프로토타이핑
# 보드게임 시장은 '선빵필승'이다
다른 게임 시장에서는 '아이디어'가 지켜지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모바일게임 시장에서는 한 게임이 인기를 얻으면 수십 개가 넘는 카피캣이 등장한다. 그리고 카피캣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두기도 한다. 먼저 좋은 아이디어를 낸다 하더라도 살아남기 힘들다. 어떤 게임이 원조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보드게임 시장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강탈하는 자가 성공하기 어렵다. 독특하게도 보드게임 시장은 소비자가 스스로 카피캣 상품 구매를 꺼린다. 예를 들어, 여러 명이 함께 보드게임을 하는 자리에서 '할리갈리'가 아니라 '할니갈니'라는 카피캣 게임이 등장했다고 한다면 플레이어가 부끄러워한다. 보드게임은 카피캣이 오리지널을 이길 수 없는 시장이다.
그렇기에, 전 세계에서 보드게임은 아이디어 전쟁 중이다. 2000년대 중반 유행하던 얼음쌓기 놀이가 보드게임으로 출시됐다. 90년대 유행했던 '아이 엠 그라운드'도 2008년 프랑스에서 보드게임으로 출시됐다. 이제 '아이 엠 그라운드' 보드게임을 내면 카피캣이 된다.
보드게임 시장에서는 카피캣이 오리지널을 이길 수 없다.
보드게임 시장은 아이디어 전쟁 중이다.
그럼에도 보드게임의 아이디어는 끝이 없다. <타임라인>은 실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카드로 만든 보드게임이다. 여러 카드 중 하나를 기준연도로 설정하고 다른 카드를 사건의 순서에 맞게 끼워 넣으면 되는 방식이다. <타임라인>은 이같은 간단한 아이디어로 전 세계의 인기를 끌었다. <타임라인> 한국사 버전도 출시됐다.
젬블로에서 만든 <라온>도 마찬가지다. 한글 자모를 분리한 타일들로 가장 많은 단어를 만들거나 가장 긴 단어를 만드는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방식이다. 이렇듯 작은 아이디어로도 좋은 보드게임을 만들 수 있다.
# 내 게임을 만들 수 있다
보드게임은 소셜펀딩과 잘 어울린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소셜펀딩으로 모을 수 있는 금액은 많아야 천만 원에서 이천만 원 사이다. 이 정도 예산으로 모바일게임을 개발하는 건 매우 힘들다. 그러나 보드게임은 가능하다.
소셜 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의 CEO 얀시 스트리클러는 보드게임이 2012년 기준 천억 원 정도로 소셜펀딩에서 상당한 비중 차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국내에서도 텀블벅을 이용한 보드게임 출시 성공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크툴루'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보드게임 <크툴루 워즈>가 텀블벅에서 소셜펀딩을 진행했고, 목표 금액인 1,800만 원의 3배가 넘는 6,355만 원을 모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보드게임은 '내 게임'을 만들기 적합한 플랫폼이다.
보드게임은 소셜펀딩에 적합하다.
# 지금은 보드게임 황금기!
세계 각국에서 보드게임의 황금기가 됐음을 기사화하고 있다. 독일의 유명 보드게임 디자이너인 Klaus Teuber는 1995년에 <카탄>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2,400만 개 넘게 판매했다. <카탄> 현재까지도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군대에서 걸레를 접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로 만들었다는 고태윤 작가의 <폴드잇>은 25개국에 20만 개가 수출될 예정이다. 송대은 작가가 만든 <슬라이드뱅뱅>은 국내를 포함한 미국, 중국 등 10개국에 수출되고 있으며, 보드게임에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연동한 <라이징5>는 킥스타터 성공 이후 중국 및 유럽 등에 수출 논의 중이다.
보드게임 개발은 교육, 기획력, 커뮤니케이션 등에 유용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게임인이라면, 한 번쯤은 '꼭' 보드게임 개발에 도전해보기를 권한다. 그게 기획 단계든, 아니면 상용화를 위한 것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