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면 편견 때문에 맹점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데이터는 편견 없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이하 'NDC 18')가 12년차를 맞았다. 매해 국내 게임업계의 관심사를 다뤄온 NDC의 올해 화두는 무엇일까? 강대현 넥슨코리아 부사장은 24일 성남 넥슨코리아에서 열린 NDC 18 '즐거움을 위한 항해 - 넥슨이 바라보는 데이터와 AI' 기조강연에서 연구 중인 데이터 분석과 인공지능 솔루션 계획을 밝혔다. / 디스이즈게임 장이슬 기자
강대현 넥슨코리아 부사장 겸 인텔리전스랩스 총괄
# 게임이 주는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이번 강연을 위해 옛 강연 내용을 확인하던 중 벤쿠버 올림픽 당시 컬링을 두고 '재미없는 경기'라고 설명했다며 쓴웃음을 지은 강 부사장은 "재미있는 게임이란 뭘까요?" 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벤쿠버 올림픽 당시 그가 봤던 컬링 경기는 해설도 지루하고 한국팀이 출전했는지도 알 수 없는데다 지는 경기가 많아 재미가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평창 올림픽의 컬링 경기는 전혀 달랐다. 승승장구하는 한국팀이 있었고, 경기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선수들의 캐릭터도 독특하고 친근했다. 규칙은 같지만 재미를 전혀 다르게 느낀 것이다. 강 부사장은 이 차이에서 게임의 재미는 어디서 오고, 진짜 즐거움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또 웹서핑 중 발견한 블로그 글을 예로 들었다. "게임을 한 판만 한다는 건 정말로 게임 한 판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존재감 있게 싸워서 이기는 한 판만 해야지'라는 뜻"이라고 쓴 글이 즐거움의 본질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강 부사장은 게임을 즐기는 사람의 만족감은 콘텐츠 외에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닐지, 유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얼마나 효율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지 반문했다.
# 게임의 재미는 규칙, 그래픽, 스토리... 그것뿐일까?
넥슨의 PC 게임은 종료했을 때 만족도 조사를 한다. 여기서 나온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특이한 점이 발견됐다. 매일 같은 게임을 하는 유저가 접속할 때마다 만족도 점수를 다르게 주는 것. 똑같은 게임을 해도 유저가 어떤 경험을 했는가에 따라 상상 이상으로 만족도가 크게 변동을 하고, 이는 게임 재방문율에도 영향을 준다.
이는 평균 만족도가 높은 게임과 낮은 게임의 차이보다도 큰 숫자였다. 만족도가 상위권에 있는 게임과 하위 게임은 평균 10 정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한 명이 같은 게임을 플레이해도 어떤 날에는 10, 어떤 날에는 30을 주는 등 매우 큰 차이를 보였다.
정교한 규칙과 뛰어난 그래픽, 훌륭한 스토리 등 게임을 구성하는 요소에 만족하는 유저도 물론 있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겪은 사건이나 만남 등, 부차적으로 여겨졌던 '경험'에 의해 게임의 재미를 크게 평가하는 유저도 있다. 유저의 경험은 이탈이나 재방문 등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기에 매우 중요한 수치다.
이러한 데이터들은 재미를 창출하는 요소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다는 정황을 말한다. 이 정황을 '맹점'(Blind Spot)이라고 표현한 강 부사장은 "지금까지 많은 개발사가 이를 통제할 수 없는 요소로 보고 '유저들이 만드는 커뮤니티'라는 미명 하에 방치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볼 만한 데이터"라고 정리했다.
강 부사장은 "넓고 새로운 시선으로 게임을 바라보면 정말로 우리가 만드는 게임의 재미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콘텐츠의 비중이 적다는 것이 아닌,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경험'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데이터가 가리킨다는 것. 또한 예전보다 게임을 즐기는 계층이 다양해졌으므로 이런 분야의 연구가 절실해진 상황이다.
"왜 이런 데이터를 간과할까요? 일부러가 아니라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우리는 모두 게임이 좋아서, 오래 전부터 게임을 했기에, 예전에 좋아했던 게임을 재현하려 노력한 것이 아니었나, 결국 이게 사고의 흐름을 좁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어쩌면 과거의 로망을, 지금 유저들에게는 없을지도 모를 로망을 실현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로망은 미래지향적인가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 머신러닝은 편견에 가려진 '맹점'을 보여준다
온라인 게임 유저들의 소소한 고민 하나. "어느 서버, 어느 채널에 갈까?"
한 FPS 게임의 신규 유저 이탈율이 유난히 높게 집계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 가설을 여러 개 세워서 확인하는 형태로 간다. 인터페이스가 불친절한가? 난이도가 너무 높은가? 조작법 안내가 충분치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의 가설은 모호하게 결론이 나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예 포함이 안 된 경우도 많다.
이 문제를 머신러닝을 통해 분석해보니 신규 유저들이 서버를 자주 옮긴다고 나왔다. 알고 보니 게임 서비스가 오래되어 유저끼리 서버를 사용하는 규칙이 생긴 것이다. 예를 들어 1채널은 채팅 전용, 2채널은 특정 맵만 플레이하는 채널, 3채널은 특정 무기만 플레이하는 채널 등 암묵의 규칙이 있고 이것도 서버마다 다르다.
누군가의 안내 없이 게임을 처음 하는 유저가 이를 알 리 없으니, 들어가는 모든 채널이나 서버마다 배척을 받는다. 신규 유저는 게임을 즐기지도 못하고 '이상한 게임, 재미 없는 게임'으로 정의해 이탈하고 나쁜 입소문도 발생한다.
또다른 예는 MMORPG다. 어떤 게임에서 특정 직업의 유저들이 유난히 특정 퀘스트 완료율이 떨어지고, 이 퀘스트를 만나는 시점에서 이탈율도 높다. 개발자 입장에서 이 퀘스트는 아무나 플레이할 수 있는 일반 퀘스트인데도 그렇다.
문제의 핵심은 각 직업 캐릭터의 시작 위치에 있었다. 게임을 시작하게 되는 지역이 직업마다 다른데, 전사는 해당 퀘스트 지역에서 가깝기 때문에 적정 레벨보다 더 일찍 퀘스트를 접하는 것이다. 사소한 설계 미스임에도 불구하고 이탈율에 크게 영향을 끼친 문제다.
저레벨 구간에서 겪는 어려움과 난이도는 실제 유저로부터 피드백을 듣기가 굉장히 어렵다. 게임에 애착을 갖기 전에 불합리한 점을 발견하면 게임을 그만둘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피드백을 받기는 어려운데 게임에 큰 영향을 끼치는 문제를 AI를 통해 미리 발견할 수 있다면 유저의 게임 경험과 사업 모두 큰 도움을 받게 된다.
만약 이런 점을 보완하는 AI 솔루션을 만들어 게임에 적용하면 어떨까?
강 부사장은 <메이플스토리>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헤네시스'에서 로그아웃한 유저가 있다고 가정하면, 당시의 레벨과 직업, 플레이 성향을 감안해 데이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파티 플레이를 좋아한다면 다음 접속시 이를 선호하는 유저가 많은 채널로 유도하고, 근처 사냥터의 평균 레벨보다 유저의 레벨이 낮다면 부활시켜줄 수 있는 유저가 많은 채널로 배치하는 AI를 적용한다면? 게임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이 크게 늘 것이다.
#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방법에 따라 새로운 길이 열린다
게임계의 오래된 논쟁거리. 게임 실력은 타고나는가, 성장하는가? 데이터를 통해 분석해보니 평균적인 유저들은 게임을 접한 2~3시간 안에 실력이 빠르게 오르고, 그 이후는 눈에 띌 정도로 더디게 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후로 실력이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 자신의 실력이 정체된다고 느끼면 유저는 그때부터 재미가 없다고 느끼므로 게임을 빠져나간다. 그래서 대부분의 게임에서 정체 구간과 이탈 발생 구간이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얼핏 보면 '게임 잘 하는 사람은 타고난다' 와 같은 안타까운 결말이 나오기 쉽다. 그러나 평균이 아닌, 실력이 꾸준히 오르는 소수의 유저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새로운 관점이 나온다. 지속적으로 실력이 오르는 유저와 평균적인 유저의 결정적인 차이는 피드백이었다. 게임을 잘 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스스로 공략 등을 찾아보며 피드백을 받은 유저들은 실력이 향상될 뿐 아니라 게임에 꾸준히 접속하는 것.
즉 적절한 피드백이 있으면 평균 유저들도 이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게임이 이 문제를 유저 커뮤니티 등 자율에 맡겨두고 있지만,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꾸준히 실력을 올릴 수 있는 피드백 시스템을 게임 내에 구축한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머신러닝 등을 연구하는 게임사의 관점은 대부분 이렇고, 한참 개발하는 단계에 있다.
강 부사장은 자동전투 논쟁에도 입을 열었다. 많은 게임 개발자들이 긴박하고 긴장감 있는 게임이 재미있을 것이라 전제해 승률 50%의 PvP 게임 등을 구상한다. 하지만 다양한 사례를 정리해보니 많은 유저들이 적당히 쉬운 난이도의 게임에 가장 큰 만족도를 느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30판을 플레이하고 50% 승률을 기록한 유저에게 "게임이 재미있었나" 물어보면 대다수의 유저가 재미없었다고 평가한다. 특히 "게임이 공정했는가"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변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승률 75~80%의 유저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면 게임이 재미있고 공정하다고 평가한다. 제3자 입장에서 본 '공정함'과 게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평가하는 공정함, 만족도는 다른 것이다.
"실제 인게이지먼트(몰입도 높고 긴장감 있는 플레이)와 이탈률의 상관 관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례도 충분치 않고 아직 연구 주제지만, 우리는 그런 게임이 더 재미있고 사람들이 열심히 한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이런 데이터를 보면 적절하게 느슨한 플레이, 플레이어가 많이 관여하지 않는 패턴이 평균 유저에게는 만족도가 높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유저마다 다른 문제고 좀 더 연구해보면 적절한 흐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게임에 범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 솔루션 개발이 목표
'느슨한 플레이'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자동전투다. 관여도가 낮고 몰입감도 떨어지는 플레이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하고, 또 개발되고 있는 패턴이다. 하지만 명확한 정의나 연구는 미비하기 때문에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재미를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강 부사장은 밝혔다. 또한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맥락에서 게임을 이해하되 유연한 발상으로 넓게 봤으면 좋겠다고 첨언했다.
"아직 게임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하게 방치된 영역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말씀드린 이야기들은 굉장히 사소한 이야기지만, 지나치지 않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많은 맹점이 발견되고 새롭게 게임의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이런 영역 때문에 저평가되면 억울한 일이잖습니까."
급격한 시대 변화로 '전통'이라고 여겨졌던 게임산업과 인식의 여러 부분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때야말로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라는 본질을 철저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며 전통적이거나 편견으로 인해 볼 수 없었던 '맹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데이터는 편견 없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시야를 넓히는 도구가 되고, 인공지능 솔루션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
마지막으로 강 부사장은 "넥슨에는 실용주의 문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이라는 트렌드에 휩쓸려 기술 자체에 매몰되기보다 실용적인 결과를 균형 있게, 재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탐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실을 넥슨 내의 모든 게임이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넥슨 인공지능 연구의 방향성입니다." 라고 전하며 기조강연을 마무리했다.